[ 초점 ] 2000년07월26일 제319호 

[초점] '이념'에서 '이성의 연대'로

동서독 관계 정상화에 발목 잡은 보수주의자들… 80년대부터 성숙한 정책토론 시작


(사진/동독의 호네커(오른쪽)서기장과 악수하고 있는 빌리브란트(왼쪽))


독일 정치권도 동서독 관계 개선 초기에는 여야간에 극단적인 대결의 시대를 경험했다.

69년 총선에서 사상 처음으로 탄생한 사민당 정부의 빌리 브란트 총리는 동서독 관계의 정상화를 뼈대로 하는 동방정책에 착수했다. 그러자 야당으로 전락한 기민련 중심의 보수세력이 격렬하게 반발했다. 보수세력은 사민당의 새 정책을, 사회주의 동독정권 불인정과 서방 편입을 뼈대로 한 과거 아데나워 정부의 정책기조를 뒤흔드는 위험한 발상으로 인식했다. 이에 따라 이들은 동독 정부와의 새로운 대화노선이 독일영토 내에서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내세우던 서독의 정체성을 흔들지 모른다고 주장했다.

빌리 브란트의 승리


(사진/빌리 브란트)


기민련은 서베를린 시장을 지냈던 빌리 브란트의 사상전력에 거침없이 붉은 칠을 해대며 정치공세를 퍼부었다. 기민련은 급기야 사민당 정부에 대한 불신임안을 내기에 이르렀다. 기민련의 극단적 행태에는 2차대전 뒤 20여년간 장기집권 끝에 정권을 내준 데 대한 상실감도 작용했다고 한다.

견디다 못한 브란트는 71년 의회의 해산과 조기 총선을 선택했다. 브란트는 총선에서 “독일인들이여, 당신들의 조국을 자랑스러워하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결과는 브란트의 압승이었다. 무려 45%가 넘는 지지로 사민당은 기록적인 다수 의석을 확보했다.

사민당의 구호에는 사실 민족주의적 색채가 짙게 담겨 있었다. 그러나 독일 국민들은 이 구호에서 세계 정치구도의 변화를 재빨리 포착한 브란트의 능력을 읽어냈다. 동독 고립화와 서방 편입을 뼈대로 한 이전 시기의 정책이 냉전시대와 분단상황을 영구히 유지하려는 4대 전승국의 이해가 낳은 산물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총선 승리 뒤 사민당 정부가 동독과 맺은 ‘기본조약’의 국회 인준과정에서 또다시 격돌이 빚어졌다. 가장 보수적 색채가 강한 소수파 기사당이 지배하는 바이에른주 정부는 심지어 기본조약이 국회를 통과하자 위헌소송으로 끝까지 맞섰다.

그뒤로도 정국은 수시로 소용돌이쳤다. 74년에는 브란트 총리의 비서 기욤이 동독의 간첩혐의로 체포됐다. 78년에는 동독 반체제그룹의 유인물을 게재한 <슈피겔>의 동베를린 사무소가 전격적으로 추방당했다. 동서독간에 크고 작은 갈등이 생길 때마다 일부 보수세력은 사민당 정부의 통일정책을 흠집내기 위해 지극히 선정적인 여론몰이를 끈질기게 시도했다. 그러나 73년 여름 헌법재판소의 판결은 큰 분수령이 되었다. 오랜 공방 끝에 동서독간 기본조약이 서독 헌법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최종 판결이 내려짐으로써 비로소 ‘이데올로기 싸움’이 좀더 진지한 정책대립으로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공동선언문으로 새시대 열다

독일 정치권의 변화는 80년대부터 성숙했다. 이 무렵부터 유럽통합운동이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는데, 이 운동은 동서독 재통일을 좀더 큰 틀에서 보도록 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또한 70년대부터 여야를 막론하고 다양한 사회세력이 동독과 교류하면서 얼굴을 맞댄 경험을 축적한 것도 토양이 되었다. 이에 따라 80년대 들어 사민당을 대체해 정권을 잡은 기민련의 콜 정부도 통일정책의 근간을 바꾸지 않았다. 콜 정부는 집권 이후 동서독간의 이질감을 극복하려는 다양한 문화교류 등에 과거 정권 못지 않게 힘을 쏟았다.

소모적인 이념 대립에 종지부를 찍은 사건으로는 지난 87년 당시 야당인 사민당이 동독의 집권당인 사회주의통일당과 공동선언문을 마련한 예가 꼽힌다. 대부분의 독일 언론들은 이런 흐름을 뼈대로 한 80년대 서독사회의 통일정책을 종종 ‘이성의 연대’라고 부른다. 토론과 합의를 바탕으로 다양한 목소리들을 통일에 이르는 길로 이끌어온 경험을 소중하게 평가하기 때문이다.

브레멘=최우성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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