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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섹션 : 특집2 등록 2003.10.22(수) 제481호

[특집2] ‘최악의 시나리오’가 탈고된다

정부가 이미 결정해놓고 감춰온 ‘이라크 파병’ …‘테러의 표적’을 감당할 것인가

결국 파병이 결정됐다. 시민사회는 노무현 대통령에게 뒤통수를 맞았다며 흥분하고 있다. 정부는 북핵 연계설을 흘렸지만, 별로 관계가 없어 보인다. 파병의 미래는 대한민국에게 무엇을 가져다줄 것인가.

“제 생각이 중요한 게 아니라 지금 이 시기에 대통령이 해야 할 일을 잘 따져 하겠다.” 10월17일 재향군인회 임원들과의 청와대 오찬간담회 뒤 노무현 대통령의 마무리 발언 가운데 한 대목이다.

그때는 노 대통령의 ‘무른’ 안보관을 못미더워하는 재향군인회 임원들에게 ‘걱정 마라’고 다독거리는 말처럼 들렸지만, 다음날 아침 발표한 이라크 추가파병 방침에 대한 대통령의 인간적 고민을 진솔하게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시민사회, 대통령한테 뒤통수 맞다

하지만 시민사회는 정부의 추가파병 명분도 설득력이 없지만 그 과정도 기만적이라고 성토하고 있다. 이들은 정부가 일찌감치 추가파병이란 밑그림을 짜놓고 시민사회단체들을 여론 수렴이란 모양새를 갖추기 위한 들러리로 세웠다며 불만을 나타낸다.

그도 그럴 것이 노 대통령이 17일 오후와 10일 오전 사이 반나절 만에 추가파병과 관련해 말을 뒤집는 듯한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은 17일 오후 3시 청와대에서 파병을 반대해온 시민사회단체 대표 8명과 만났다. 이날 시민단체 관계자들은 ‘청와대가 19일께 파병 관련 입장을 낼 것’이란 <문화일보> 보도 내용에 대해 사실 여부를 물었고, 노 대통령은 “파병 문제에 대해 언론에 나는 것은 부정확한 것이 많다”고 해명했다.

이날 노 대통령은 시민단체 대표들에게 파병 결정 일정에 대해 “이때까지 가벼운 논의만 하였을 뿐 정부 내에서 진지한 논의는 없었다. 18일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서 처음으로 논의할 계획이다. 지금까지 (미국과) 비밀리에 교섭하거나 흥정한 것이 없다. 여러분에게 내놓을 특별한 정보가 없다”고 말했다.

당시 시민단체 대표들은 ‘대통령이 신중하게 여론을 수렴해 파병 결정을 하겠구나’라는 기대를 했다가, 다음날 아침 추가파병 방침에 큰 충격을 받았다. 간담회에 참석한 김기식 참여연대 사무처장은 “NSC 회의와 시민단체 대표와의 간담회 이전에 이미 추가파병 결정을 해놓았던 것이다. 국민적 여론 수렴을 한다고 해놓고 전 국민을 상대로 쇼를 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다른 시민단체 간부는 “우리가 너무 순진해 청와대의 장단에 속았다. 이런 식으로 뒷통수를 칠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정토회 지도법사인 법륜 스님은 “그동안 정부는 파병 반대 주장에 대해 당당한 설득과 대안 제시보다는 결정된 게 아무것도 없기에 국민여론을 신중하게 수렴해 파병 결정을 하겠다고 했다. 한때 노 대통령은 재신임 발표 뒤 파병 결정을 연기하는 듯한 기만적 행동을 하기도 했다. 정부가 이제껏 파병을 결정하고 그 수순을 밟아가고 있음을 만천하에 드러냈다”고 주장했다.

10월18일 오전 이라크 추가파병 발표 뒤 ‘유엔 이라크 결의안 통과 직후 파병 결정이 내려진 것은 이라크 문제가 정해진 시나리오가 있다’는 의혹이 강하게 일었다.

‘10월 마지노선’의 논리

물론 정부는 이른바 ‘파병 시나리오설’을 강하게 부인했다.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아펙)에 참석한 노 대통령을 수행하던 반기문 청와대 외교 보좌관은 19일 “이라크 추가파병을 정부가 사전에 결정해놓은 게 절대 아니다”고 여러 번 강조했다. 반 보좌관은 “18일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전에 정부의 결정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게 확실하냐”는 취재기자의 질문의 “그렇다”고 답변했다.

하지만 진작부터 정부 안 외교안보 당국자들 사이에서는 파병 불가피론이 우세했다.

50여일 동안의 정부 파병 의사 결정 과정을 보면 ‘정부안 파병 불가피 공감대’에 기초한 ‘(유무형의) 파병 시나리오’가 있었다는 정황상 추정은 충분히 가능하다. 9월4일 미국으로부터 추가파병 요청이 들어왔을 때부터 외교 안보당국 실무자 사이에서는 늦어도 10월 말까지는 추가파병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이른바 ‘10월 마지노선’의 논리는 다음과 같다.

한국군 추가파병 예상 지역인 이라크 북부 모술에 주둔한 미국의 제101공중강습사단이 내년 2월께 교체될 예정이다. 파병 병력 규모는 5천명에서 1만명가량이다. 이 정도의 병력을 선발하고 부대를 편성한 뒤 현지 적응훈련을 시키는 데 한달반에서 두달가량이 걸린다. 훈련이 끝난 병력과 장비를 이라크까지 수송하는 데만 한달 이상이 걸린다. 추가파병에 세달 안팎의 실무 준비 기간이 필요하다. 내년 2월까지 미군 제101공중강습사단 대신 모술에 한국군이 주둔하려면 아무리 늦어도 10월 안에는 파병 결정이 나야 하는 것이다. 만약 추가파병 결정이 10월을 넘기면 준비 부족으로 한국군 인명피해 발생 가능성이 커지고 미군감축 계획과 맞물리지 못하면 추가파병을 하고도 미국으로부터 고맙다는 이야기를 듣기 어렵다는 것이다.

파병불가피론자들은 이런 전제에 기반해 △파병 명분으로 미국의 이라크 재건 로드맵을 제시할 때까지 기다릴 필요 △평화와 재건을 위한 보편외교란 명분하에 파병 필요 △현지 이라크인과의 융화 여부가 대아랍권 관계에 관건 △파병의 실익은 단편적·장기적이므로 국민들의 기대를 높이지 않는 것이 중요 △정부는 의사결정의 시기를 놓치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인터넷 등을 통해 아랍 및 이라크에서도 한국 상황이 매우 자세히 알려졌기 때문에 파병 문제에 정부가 최대한 신중하게 고민하는 모습을 아랍권 전체에 보일 것을 주장했다.

이라크 재건 지원만? 글쎄…

지난달부터 지금까지 추가파병과 관련해 정부가 취한 대응을 되짚어보면 철저하게 파병불가피론의 논리에 터잡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시민사회의 빗발치는 비판에 대해 정부는 추가파병이란 총론을 결정했다는 것이다. 파병을 반대하는 쪽에서는 이라크 사람들에게 총을 겨누는 전투병을 파병했다고 비판하지만 전투병이냐 공병이냐 등 부대의 성격과 형태, 규모, 주둔지역 등 각론은 이제부터 논의한다는 설명이다. 각론에 따라서는 한국군이 ‘점령군’이 아니라 ‘이라크의 친구’로 자리매김할 수도 있다는 희망이다.

주로 NSC쪽에서 이런 주장을 펴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르면 파병부대를 공병부대, 의료부대, 보병 등이 전투병과 비전투병이 반반가량 섞인 부대로 편성해 서희부대가 이라크 남부 나시리아 지역에서 한 것처럼 급수장·상하수도·배수관 등 사회기반시설 복구공사와 도로·학교·병원 등 공공시설 복구 지원 등 인도 지원을 치안유지 임무와 병행한다는 것이다. 정부는 전투병 파병이란 부정적 이미지를 벗기 위해 파병부대 성격을 ‘치안유지군’이나 ‘이라크 재건 지원군’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한국군 파병 예상 지역인 모술의 중심지 치안은 확보되었다고 하나, 모술 지역 국제민간구호단체들의 말에 따르면 시가지 정찰을 하는 미군 차량들이 공격을 받지 않기 위해 전속력으로 질주하고 있다고 한다. 모술에서는 아직도 ‘후세인이 나타난다’는 말이 나돌 정도이기 때문에, 한국군이 치안유지를 위해서는 거리 검문검색뿐만 아니라 가택 수색 등도 해야 할 것으로 본다. 이 경우 이라크 저항세력과 물리적 충돌을 빚을 가능성이 높다.

현재 모술의 미 제101공습강습사단은 아파치 등 헬기 200여대와 48문의 곡사포, 대전차 및 지대공미사일로 중무장한 채 주둔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 제101공중강습사단보다 자체 방호력이 떨어지는 전투병과 비전투병으로 짜인 한국군이 모술 지역에 주둔할 경우 피해 발생 가능성도 높아질 것이다.

여기에 이라크 저항세력의 공격 양상도 걱정스럽다. 이들은 미군 등의 순찰지역에 미리 매복하고 수류탄과 유탄발사기, AK-47 자동소총으로 기습공격을 한 뒤 박격포 등의 지원을 받으며 퇴각하는 전술을 구사하고 있다. 한 군사 전문가는 “이런 식의 기습공격은 사전 예방이 어렵고, 공격받은 쪽은 일단 당하고 나서 대응에 나서야 한다. 우리가 전투력이 강한 정예병력을 추가파병 부대로 보내더라도 일정한 피해 발생이 불가피하다”고 내다봤다.

불길한 오사마 빈 라덴의 경고

알카에다 지도자 오사마 빈 라덴은 10월18일 아랍어 위성방송 <알자지라>를 통해 방송된 육성 테이프에서 이라크 주둔 미군의 철수를 촉구하는 동시에 미군은 물론 미군 지원을 위해 파병되는 다국적군에 대한 공격 의지를 밝힌 것도 추가파병을 앞둔 우리 처지에서는 불길하다. 유엔 결의 이후 추가파병을 결정한 나라는 한국을 빼면 아직 없다.

노무현 대통령도 10월17일 시민단체 대표들과 만나 “내가 실제로 가장 우려하는 것은 한국이 테러의 표적이 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충분히 고려해서 결정하겠다”고 솔직하게 고민을 털어놓기도 했다. 만약 내년 2월께 국군이 이라크에 추가파병되고 치안유지에 나선 국군 병력의 피해가 발생한다면,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이를 둘러싼 책임소재를 가리는 정치적 공방이 가열될 수 있다.

재신임을 자처할 정도로 ‘신뢰’를 강조해온 노무현 대통령으로서는 추가파병 결정으로 지지 기반인 개혁세력이 등을 돌릴 큰 위기를 자초했다. 시민사회단체들은 정부가 파병을 사전에 결정해놓고 국민의 저항을 회피하기 위해 짐짓 상당한 논의 기회가 있는 것처럼 국민을 호도해왔다며 ‘노무현=믿을 수 없는 지도자’로 낙인찍었다. 그렇다고 조속한 추가파병을 주장해온 보수세력이 노 대통령을 도와줄 것도 아니다.

노무현 정부가 시민사회의 요구대로 추가파병 결정을 거둬들일 수 없다면, 파병부대의 성격을 비전투병쪽에 두고 추가파병 부대의 인명 손실 예방에 최선을 다할 것으로 보인다.

권혁철 기자 nu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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