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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섹션 : 특집2 등록 2003.09.24(수) 제477호

[특집2] 동아시아를 슬프게 하지 말자

9·17 이후 혹독했던 1년을 기억하며 다시 평화와 공생을 말하는 사람들

“정말 9·17이 안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20여년간 아시아를 비롯해 세계 100여개 항구를 순회하며 평화를 외쳐온 일본 비정부기구(NGO) 단체 ‘피스보트’에서 기획을 맡고 있는 재일동포 3세 금령하씨는 “지난해 9·17로 시작된 지난 1년이 생애 가장 혹독한 해였다”면서 9·17이 정말 싫었다고 말했다. 일본에서 9·17이란 북·일 정상에 의한 평양선언을 뜻한다. 다른 한편으로 이른바 ‘납치-핵 정국’의 시작, 재일동포 특히 조선적에 대한 매스컴의 일방적 매도와 폭력을 의미하기도 한다.

돌팔매질 당할 이야기?

직접적 피해 당사자인 20, 30대 재일동포들과 이들의 친구가 되어 함께 걱정과 위로를 건네주던 일본 젊은이들이 9·17 한돌을 맞아 무엇인가 돌파구를 만들어보자고 머리를 맞대기 시작했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2개월 전쯤의 일이다. 어차피 부닥칠 것이라면 회피하지 말고 정정당당하게 맞서보자며 의기투합한 것이다. 궁리 끝에 ‘평화와 공생’을 함께할 ‘친구’가 되자는 의미에서, 917명의 재일동포, 일본인 그리고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사람들과 함께 ‘LIVE TOGETHER 어깨동무 友’라는 글씨와 평화 마크를 촛불로 만들어보기로 했다. 영어와 한글, 한자를 섞어, 모두가 어깨동무를 하고 친구가 될 수 있다는 평화의 메시지를 동아시아의 모든 이들에게 알리겠다는 취지에서였다.

금씨는 “악의와 증오, 공격과 전쟁이 아닌 평화를 생각하고 그것을 표현할 사람이 일본에 대체 얼마나 있는지 확인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지난 1년 동안 계속돼온 일본 매스컴의 일방적 보도태도를 감안하면 “한반도 북쪽 친구들하고 ‘어깨동무’하자는 얘기를 일본에서 꺼낸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돌팔매질 당할 만한 이야기”라고 그는 말한다. 하지만 “돌을 맞더라도 한번 얼마나 모이는지 확인해보고 싶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917명의 참석을 목표로 한 9월17일 밤. 도쿄 도심 메이지 공원엔 7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 함께 촛불을 들었다. 실제 예상보다 훨씬 많은 수였다. 메이지 공원에 함께 산책 나온 연인들, 퇴근길을 서두르던 이들도 모두 같이 촛불을 들고 참여했다. 단지 홍보가 부족했을 뿐, 더 많은 사람이 참여할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보통의 일본 사람들 역시 평화를 사랑하고 동아시아의 친구가 될 마음이 차디찬 매스컴의 얼음장 밑으로 계속 흐르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이번 행사에 참여한 단체는 ‘재일동포 청년연합’(KEY)과 ‘일·한 시민스퀘어’, 그리고 총련 산하단체인 ‘재일본 조선청년동맹 도쿄본부’, 일본인이 중심인 ‘피스보트’와 ‘찬스 포노포노’ 등 모두 8개였다. 이들이 모여 ‘피스나우코리아저팬’(PEACE NOW KOREA JAPAN)이란 모임을 만들었고, 이번 행사도 이 이름 아래 개최되었다. 주최자의 한 사람인 가나 도모코는 “부족한 홍보에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 줄 몰랐다”면서 “일본 사람들 중에도 한반도 이북을 포함해 동아시아 사람들과 친구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가 소속한 단체는 ‘찬스 포노포노’(CHANCE!pono2)다. 2001년 9·11 테러를 계기로 만들어진 ‘찬스!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네트워크’에서 생겨난 단체다. 주로 인터넷을 통해 알게 된 친구들이 테러와 전쟁을 평화를 만드는 찬스로 바꾸기 위해 활동하고 있다. ‘포노포노’란 태평양의 작은 섬에서 쓰는 말로 ‘올바른 방향으로 되돌리고 이끌어간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9·17을 동아시아의 위기가 아니라 평화를 만들어내는 기회로 바꾸어내자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촛불로 평화를 새기다

행사는 박보 밴드, 호시 노유카, 우리 파람 등의 공연에 이어, 강상중 도쿄대 교수를 비롯해 만화가 이시자카 게이 등의 짤막한 이야기 순으로 진행되었다. 다음은 이날 행사의 정점인 ‘촛불-사람 글씨(人文字)’ 만들기. 정성껏 촛불을 밝혀들고, 주위의 가로등도 모두 꺼진 채 30여분의 시간이 흘렀다. 이웃한 건물 옥상에서 내려다본 메이지 공원엔 한글 ‘어깨동무’와 한자 ‘友’의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졌다. ‘피스보트’의 공동대표인 구시부치 마리는 “동아시아의 비극은 어쩌면 당신은 한국인, 혹은 조선인, 아니면 당신은 일본인이라고 불리면서 시작되었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국가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한 동아시아의 비극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그는 설명한다. 함께 이번 행사를 주관한 사람들은 그래서 “서로 어려울 때 서로 돕고 나누는 ‘동아시아 시민 혹은 주민’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곧 피스나우코리아저팬 이름으로 북한 방문단을 꾸릴 생각이다. 함께 북한 방문단에 참여하겠다는 히다카 에쓰로는 “상대방의 땅에서 자기가 있는 곳을 바라볼 수 있어야 비로소 동아시아의 친구, 동아시아의 평화가 가능한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도쿄=글·사진 신명직 전문위원 mjshin5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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