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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사섹션 : 특집2 | 등록 2003.09.05(금) 제475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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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2] 민족국가보다는 민주주의 [인터뷰 | 쿠르드 총사령관 제말]
쿠르드 총사령관 제말이 말하는 미래의 쿠르드…미국과도 협력할 용의 있다
-처음 무장투쟁을 시작할 때 내부 논란은 없었나. =초기와 달리 우리의 언어와 민족 정체성을 부정당한 뒤 상황은 달라졌다. 당시는 쿠르드 민족을 차별하는 분위기였다. 학생이었던 우리는 프랑스 좌파와 베트남 전쟁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조직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자 터키 정부는 민족운동 지도자들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1977년에는 지도자인 하키카라를 죽였다. 당시 상황은 가령 “나는 쿠르드인”이라는 말만 해도 감옥이 아니라 당장 처형되는 판국이었다. 애초 무장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상황은 우리를 무장으로 몰아갔다. -애초 몇명이 산으로 들어갔나. =우리가 처음 투쟁을 시작한 곳은 도시였다. 처음에는 힐반과 바트만에서 선거를 통해 영향력을 확보하고자 했다. 그 뒤 1980년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고 많은 활동가들이 투옥됐다. 당시 5천명이 넘는 활동가들이 체포돼 고문당하고 투옥됐다. 1979년 오잘란을 비롯한 지도자들이 시리아와 레바논을 방문했고 나중에 레바논에서 많은 활동가들이 군사훈련을 받았다. 당시 투옥됐던 쿠르드노동당 활동가들은 터키 정부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바로 이런 조건에서 무장투쟁이 시작됐다. 1984년 8월15일 우리의 최초의 공세가 시작됐다. -무장투쟁이 쿠르드 민족에게 어떤 변화를 몰고 왔나. =쿠르드인들은 자신의 민족 정체성을 찾기 시작했고 자신의 언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 게릴라 운동은 대중적 운동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이 시기를 ‘반역의 시기’로 부를 정도였다. 1988∼89년에 게릴라 수는 겨우 600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1992년에는 1만명 이상으로 불어났다. -이처럼 게릴라 수가 증가하리라 예견했는가. =갑작스러운 변화에 대처하지 못했다. 지금도 비판하는 부분인데 당시에 제대로 준비했더라면 터키와의 싸움에서 이기고 쿠르디스탄까지 건설할 수 있었다. -이라크를 점령한 미국의 동의 아래 터키군이 공세를 취할 것이란 소문이 있다. =중동 지역은 강대국이 편의적으로 분할해 강대국 이해관계에 따라 낡은 제도가 자리잡아왔다. 현재 미국이 이라크에 들어왔지만 어떤 제도를 운용할지는 미지수다. 미국이 이라크 민주주의를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한다면 미국에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쿠르드 민족 문제를 풀기 위해 노력한다면 적극적으로 협력할 용의가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불확실하기 때문에 어떤 가능성에도 대처한다는 게 우리 입장이다. 쿠르드 두 당과의 관계에서 우리는 이들과 평화적이고 통일적인 관계를 유지하기를 원한다. 이를 위해 두 당과 대화와 협력으로 모든 문제를 풀어나갔으면 한다. -지금 많은 쿠르드 민족해방운동가들이 민족국가 수립을 부정한다는 말도 들린다. =민족국가라는 개념은 낡은 개념이다. 과거에 이것 때문에 운동을 시작했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달라졌다. 현재 민족국가의 수립보다는 민주주의를 획득하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다.
자그로스산맥 칸딜산(게릴라 근거지)= 하영식 전문위원 youngsig@teledomenet.g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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