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집2 ] 2003년09월05일 제475호 

치사하다, 전기 공급 중단

불안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바그다드 풍경… 반군의 공격으로 겁에 질린 미군, 무차별 대응

전쟁의 흔적은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었다. 이라크 북쪽인 키르쿠크와 모술로 올라가는 도로가에는 불발로 끝난 미사일이 보이고 끊겨진 도로도 드러났다. 반대편 도로에서는 미군 화물차량이 중무장한 지프의 호위를 받으면서 화물수송에 여념이 없었다. 북부지역의 키르쿠크시 가까이에 이르자 멀리서 타오르는 불꽃이 보였다. 말로만 듣던 바로 ‘검은 황금’이 묻힌 유전지대다. 사막 한가운데서 검은 연기를 내뿜으면서 타오르는 불꽃지대는 미군 화물차량의 통행이 보여주듯 주인이 이미 바뀌었다. 조금 더 북쪽으로 올라가자 성서에 나오는 유명한 강인 티그리스가 보인다. 도로가에는 미군 탱크가 세워져 있으나 탱크 위에 있어야 할 병사가 보이지 않는다. 탱크를 지나치자 작은 오두막 건물의 그늘에 두 미군 병사들이 아예 철모는 물론 군화까지 벗어던지고 누워 있다. 전시 중 군무이탈 행위로 영창행이지만 50도가 넘는 불볕더위 속에서 탱크 위에서 소나기처럼 땀을 흘리고 앉아 있어야 하는 이들의 처지도 족히 이해가 감직하다.

산산이 붕괴된 치안

지금 이라크 주둔 미군들의 불만은 하늘을 찌르고 있다. 직업군인이라지만 거리에서는 적대적인 이라크 시민들이 증오스런 눈길을 던지고, 더구나 매일 두세명의 병사들이 사살되는 곳에 주둔한다는 것은 사실 견디기 힘든 일이다. 이미 미국에서는 군인들의 어머니들이 백악관 앞에서 항의시위를 조직하여 자식들의 본국 귀환을 요구하고 있다. 이라크 전쟁이 시작된 뒤 이라크는 미군의 통제 아래 들어갔지만 실제로는 미군들이 이라크의 통제 아래 들어갔다는 표현이 어울릴 것이다. 곳곳에 미군 탱크들이 진을 치고 탱크 위에서는 미군들이 시가지를 내려다보고 있지만 이들의 표정이 밝지만은 않다. 적대적인 이라크 시민들과 직접 상대해야 하는 미군들은 공포에 떨고 있다. 지나가는 이라크인들로부터 총알이 언제 날아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바그다드 시내를 순찰하는 장갑차나 중무장한 지프는 거의 시속 80km의 속력으로 시내를 질주하고 있다. 점령군으로서 시내를 순찰한다면 시속 30km 정도의 속력으로 천천히 주행하는 것이 보통이겠지만 아예 점령군의 위신도 깡그리 접고서 거의 도주하는 모양새다.


사진/ 8월1일 바그다드 시내를 순찰하고 있는 미군. 계속되는 후세인 반군의 공격으로 미군들의 불만도 극에 달했다.(SYGMA)


겁에 질린 미군들의 과잉대응도 문제가 되고 있다. 자신들을 향해 총소리만 났다 하면 시민들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해대는 바람에 많은 비무장 시민들이 부상을 당했고 심지어 몇명은 목숨을 잃는 일도 발생했다. 얼마 전에는 <로이터통신> 소속 기자의 카메라를 로켓발사총으로 오인한 나머지 그를 사살한 사건도 발생했다. 쿠르드 기자 브렌트가 내게 들려준 생생한 목격담 속에 바그다드의 상황이 그대로 녹아 있다. 두주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바그다드 시내에 쇼핑을 하러 나갔다가 무슬림 복장차림의 이라크인 10명 정도가 주둔하고 있는 미군 탱크를 향해 총을 난사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곧이어 미군들의 대응사격이 시작됐는데 그곳을 지나는 시민들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해댔기 때문에 멀리서 이를 지켜보던 나도 생명의 위협을 느껴 있는 힘을 다해 달아나야했다. 곧이어 수십대의 탱크와 헬리콥터가 도착했고 그 지역은 일대 아수라장을 이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바그다드시 치안은 전혀 기대할 수 없게 됐다. ‘알리바바’로 표현되는 무장강도가 판을 치는 도시로 변했다. 미국 침공 전 사담 후세인은 약 1만명의 살인범, 절도범 등 강력범들을 모두 교도소에서 풀어놓았고 이들은 다시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고 한다. 외신기자나 구호단체 관계자, 외교관 등을 가리지 않고 외국인이면 모두 범죄의 대상으로 삼고 있어 벌써 16명의 외국 언론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 때문에 외신기자들은 주로 호텔방에서 지내면서 이라크인 기자들이 취재해오는 내용들을 받아서 보도하고 있는 실정이다. 필자도 모술이나 바그다드 시내를 오갈 때는 두명의 호위를 받으면서 다녀야 했다. 모술에서 바그다드로 올 때도 필자의 안위를 염려한 쿠르드쪽에서는 건장한 청년 한명을 바그다드까지 동행시켰다. 그리고 아직 어둠이 내리기 전 오후 7시쯤이 되자 동행했던 젊은이들도 돌아갈 것을 권유하면서 택시 밖으로 고개를 내밀지 말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사실 험상궂게 생긴 사람들이 길거리에 서서 지나가는 차 안을 들여다보는 장면이 종종 눈에 띄었다.

반군 공격하면 수도·전기 공급 끊어

아무리 밝은 대낮에 교전이 벌어지고 총소리가 난다 해도 당장 이라크 국민들이 분통을 터뜨리는 문제는 전기와 수돗물에 관한 것이다. 한 여름 50도를 오르락내리락하는 찜통더위 속에서 전기와 물 없이 산다는 것은 당해보지 않고서는 모르는 일이다. 전기도 온종일 들어오지 않고 가끔씩 들어오기 때문에 냉장고 속에 넣어둔 음식물들이 쉽게 썩고 수돗물도 거의 공급이 중단된 상태다. 게다가 수돗물도 정화했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수질이 나쁘다. 하지만 이런 물도 얻기 힘든 상태라 화장실도 이용하기 불가능할 정도다. 미군의 통제 아래 들어간 바그다드나 이라크 북부지역의 주민들은 최소한의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해주기를 미군정 당국에 요구하고 있지만 미군 당국의 태도는 모호하다. 미군은 이라크 시민들이 사담 후세인 반군을 지원하고 있다고 단정하고 이들의 공격이 계속되는 한 집단적인 징계인 전기나 수돗물의 공급 중단이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기본적인 삶이 어려워질수록 이라크 시민들의 반미감정은 더욱 고조될 조짐이다.


사진/ 8월25일 미군이 반군에 가담한 혐의로 한 이라크 시민을 체포하고 있다. 미군의 무차별 강경대응은 이라크인들의 증오를 부른다.(GAMMA)


대다수 이라크 사람들은 사담 후세인을 ‘독재자’로 혐오하고 있다. 이라크에서 버스로 국경까지 오면서 앞자리에 앉았던 이라크인들이 들려준 얘기는 아주 충격적이었다. “지금까지 32년간 사담 후세인 통치 아래에서 다른 나라를 한번도 여행한 적 없었다. 이번 요르단 여행이 처음이다.” 사담 후세인의 철권독재는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누구도 마음대로 여행하거나 위성 안테나로 외국 방송을 시청할 수 없다. 물론 반대당이나 단체 등은 존재할 수 없다. 그동안 미국의 친구로서 이란과의 전쟁까지 대신 수행했지만 미국과의 관계가 어긋나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반미주의자’가 되었다. 러시아와 손잡고 유럽과 관계를 돈독히 맺어 자신의 권력을 지키려 애썼지만 결국 이들 나라도 사담 후세인을 구해주지 못했다.

사실 사담 후세인이 그렇게 핵폭탄 개발에 심혈을 기울인 이유는 핵폭탄만이 그의 권력을 지켜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바그다드에서 암만으로 여행하는 길에 만난 한 이라크인은 아주 흥미로운 얘기를 들려주었다. 아메르 나시프(46)는 자신이 과거 2년간 바그다드에서 핵무기 개발에 참여했다고 얘기했다. 계속 끈질기게 달라붙으며 추궁하는 필자에게 두 손을 들었는지 하나둘씩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가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에 참가했던 시기는 걸프전 발발 직전인 1989년과 1991년 사이였다. 사담 후세인이 핵무기 개발에 관심을 보였던 시기는 이란과의 전쟁이 끝난 1987년부터다. 핵무기에 관심을 보이면서 최초로 그가 실시한 프로젝트는 모든 과학자나 엔지니어들을 서방세계로 보내 핵무기 관련 정보를 수입하는 일이었다. 당시 이라크의 많은 과학자나 엔지니어들이 서방세계의 핵무기 관련 기술자와 접촉하고 정보를 긁어모았다. 다음 단계는 구체적으로 핵무기 생산시설을 세우는 일이었다. 원자로 등 기계 시설 건설은 독일이 담당했다고 한다. 물론 그곳에서 많은 독일 기술자들도 함께 일했다.

“후세인, 핵무기 개발 추진”

핵무기 개발 장소는 ‘반지하공장’이었단다. 밖으로 공개된 공장건물은 보통 공장으로 공산품을 생산했지만, 지하에 설치된 공장에서는 핵무기 관련 물품을 제조했다고 회상했다. 그에 따르면 핵무기 개발 공장은 한곳이 아니라 여러 곳이었는데 모두 일반공장과 겸용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사담 후세인이 핵무기 개발에 열을 올리던 당시 공장의 기술자들이 모두 핵무기 개발로 빼돌리는 바람에 일반공장의 가동에도 문제가 생길 정도였다는 것이 그의 기억이다. 그는 바그다드 대학에서 재료공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핵무기에 관련된 재료를 취급하는 일을 주로 담당했다. “당시 핵무기 개발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던 나라는 독일이었고 모든 기계는 독일의 ‘디고젯’이란 회사의 제품이 독점했고 독일 기술자들과 중국 기술자들과 함께 일했다”고 털어놓았다. “사담이 핵무기나 화학무기 개발을 추진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완성된 무기를 손에 넣었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고 그는 밝혔다.

모술·바그다드= 하영식 전문위원 youngsig@teledomenet.g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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