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집2 ] 2003년05월14일 제459호 

그렇게 우리는 아름다웠다

독자 9명의 가장 화려했던 인생의 봄날… 세월의 무게를 이겨낸 기억은 어떤 것들일까


일러스트레이션 | 박현미


사람들은 인생의 어떤 날을 가장 아름다운 시절로 기억할까. ‘독자의 화려했던 봄날’ 공모는 이런 궁금증으로 시작됐다. 예상대로, 100여통에 달하는 독자들의 사연은 그리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각자의 찬란한 기억들은 누구나 한번은 지나왔음직한 과거의 어떤 시간, 어떤 공간에 들어 있었다. 그 특별하지 않은 ‘과거의 것’들이 때로 세월의 무게를 이겨내고 우리 삶을 지탱해주는 힘이 된다. 힘든 선정과정을 거쳐 독자 9명의 아름다운 시절을 공개한다. 이번에 선정되지 않은 응모작 중 일부는 앞으로 ‘독자와 함께’면에 계속 연재할 계획이다. 소중한 사연들을 보내주신 독자들께 감사드린다.



어느 복학생에 대한 기억

가방을 꾸린다. 이제 이런 일이 습관처럼 손에 익었다는 것이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휴지, 칫솔, 치약, 냄비, 쌀, 부식재료, 빗, 화장품, 속옷…. 이렇게 짐을 싼 지 여섯 번째다.

내 인생의 봄날은 대학교에 들어가면서 시작됐다고 생각했었다. 학과는 내 적성과 능력을 고려해 선택한 것이기 때문에 더 바랄 것이 없었다. 나름대로 성실했던 탓에 졸업 뒤에 교수님의 권유로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학과 조교로 남게 되었다. 남편을 만난 건 대학을 졸업하던 해의 가을 어느 날이다. 그는 복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머리가 짧은 채 내가 근무하는 학과 사무실에 찾아왔다.

“제가 이번에 교양필수로 문학개론을 선택했거든요.” 어눌한 말투로 말문을 연 그는 누가 봐도 그다지 호감을 느낄 만한 외모는 아니었다. 굳이 장면을 꼽아본다면 키가 크다는 것 정도. 나는 또 학점 로비하러 온 학생이구나 싶어 친절한 시선을 보내지 않았다. 우리 과에 성적을 부탁해오는 다소 숫기 좋은 타대학 복학생들이 자주 드나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요?” “그런데 제가 워낙에 문학에 소질이 없어서요, 최선을 다하겠지만 저를 기억했다가 그래도 성의껏 작성했다 싶으면 정성을 봐서라도 성적에 고려를 해주셨으면 해서요.”

무조건 엄살을 떠는 다른 학생과 달리 그래도 성의 있는 그의 부탁이 그다지 거슬리지 않았던 것 같다. 그 만남은 오래도록 우리를 우정으로 연결시켜주다가 몇년이 지난 뒤에 서서히 이성으로 발전시켜주었다. 한결같은 그의 친절함과 성실함이 크나큰 장점이자 매력이라는 것을 발견하는 데까지 나는 너무나 아둔했고 인색했던 것 같다.

가난한 그와 나는 열심히 살았다. 첫딸을 낳고 행복했던 일, 그리고 2년 뒤 또 아들을 낳아 더 바랄 것 없이 1녀1남의 부모가 된 일. 그래도 욕심은 끝이 없어 더 행복해지기 위해 무엇을 그리 바삐 살아왔는지.

남편은 지난해 늦은 가을 구강암 판정을 받아 수술을 하고 한달에 한 차례씩 항암치료를 받으러 입원한다. 이제 마지막 여섯 번째 입원을 위해 나는 가방을 싼다. 정말 이번이 마지막 입원이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남편과 결혼한 지 5월18일로 19년이 되는데, 정말 아둔하고 인색한 나는 그와 함께한 힘들고 어려웠던 가난한 신혼시절을 포함해 모든 쇠털 같은 나날들이 내 인생의 봄날이었음을 이제야 고백하고 깨닫는다. 사랑하는 당신, 암을 이겨내고 우리 정말 인생 마지막 날까지 봄날처럼 살자고요.

김영순/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안양1동



“넌 학생이 아니라 남자였어…”



지금으로부터 10년도 훨씬 지난 고등학교 시절, 당시 난 명문이라고 꽤 이름이 난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이놈의 학교는 공부밖에 모르는 학생들과 공부만 시키려는 선생님들로 득실거렸다. 그것도 남자 학교에 남자 선생님들만 가득했다. 공부밖엔 특별히 할 게 없던 고등학교 2학년 어느 가을, 너무나 갑작스럽게 영화처럼 나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 찾아왔다.

2학기가 시작되고도 한참이 지나 가을냄새가 물씬 나던 어느 나른한 오후 수업시간. ‘미친개’란 별명이 태어날 때 받았던 이름보다 더 잘 어울렸던 학생부 부장 선생님이, 초봄의 싱그러움을 한껏 머금고 있는 여자 선생님을 데리고 들어온 것이다. 순간 어수선하던 교실의 모든 것이 스틸 사진처럼 멈춰버렸다. 늘 조용하기만 하던 교실 여기저기서 탄성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멍청하리만큼 행복한 웃음을 지으며 선생님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새로 온 여자 선생님은 흥분한 학생들을 진정시키고 자기소개를 해주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여자 중학교에 1년 있다가 바로 우리 학교로 오게 되었다고 했다. 선생님의 소개가 끝나고 나는 선생님을 위해 노래를 불러드렸다. 암울한 나의 고등학교 시절, 공부밖에 할 게 없던 그 고등학교 시절! 난 드디어 공부말고도 해야 할 일이 생긴 것이었다. 당시 친구들 사이에 탤런트 고현정이 우상이었다면 나에겐 그 선생님이 우상, 아니 그 이상이었다.

그녀를 처음 본 그날 밤, 난 잠을 잘 수 없었다. 그녀를 위해 밤새워 편지를 썼다. 정성스럽게 예쁜 편지지에 쓴 그 편지는, 당시 교무실 청소를 담당하던 반 친구들이 그녀에게 전해주었다. 며칠 뒤 나는 반 친구들을 통해 답장을 받을 수 있었다. 그녀의 수업시간에 항상 맨 앞자리에 앉아 수업을 받았다.

어느 날 콘서트 표가 생겨 그녀에게 함께 가자는 제의를 했다. 물론 그녀는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였고, 난 쑥스러운 마음에 친구 둘을 데리고 갔다. 비록 그녀 곁에 앉지는 않았지만, 콘서트를 보던 그날이 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날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행복한 고교 2학년 시절이 끝나갈 무렵 선생님은 연극을 보여주신다고 했고, 기쁜 마음에 같이 가기로 한 친구와 약속 장소에 아무 생각 없이 나갔다. 선생님은 그때 조카를 데리고 왔다. 그날도 연극을 재미있게 보고 즐거운 저녁식사도 했다. 도대체 행복의 끝은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나보다 두살이나 많은 선생님의 조카와 가까워지기 전엔 말이다.

겨울방학이 시작됐지만 고3에 올라가는 우리는 학교를 계속 다니며 보충수업을 들었다. 방학 중에 선생님의 생일이 있었고, 난 친구들과 <겨울아이>란 노래를 직접 반주하고 노래해서 테이프를 만들어드렸다. 선생님은 아이처럼 좋아하셨지만 그날 같이 있던 조카의 모습은 왠지 쓸쓸해 보였다. 계속되는 대학입학 시험 낙방으로 삼수의 길을 걷게 되어 약간의 우울증 증세를 보였던 것이다. 힘든 상황을 이겨보려 내게 잘해주며 다가오는 그녀를 어린 나로서는 피할 수 없었다. 겨울방학은 끝이 나고 개학하기 며칠 전 선생님은 우리에게 생일선물의 보답으로 맥주를 사주셨다. 그 자리에 선생님의 조카와 난 이미 연인이 돼 있었다. 어리석게도 난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고 믿었다. 하지만 단 몇잔의 술에 몸을 가누기 힘들 만큼 취해버린 선생님은, 술을 깨기 위해 간 커피숍에서 탁자에 엎드린 채 나에게 힘들어하며 말씀하셨다. “나는 너를 학생으로 생각하지 않았어. 너를 남자로 생각했었다.”

나는 그날 밤새 울며 어느 아파트단지를 미친 듯이 돌아다녔다. 지금은 선생님도 좋은 사람과 결혼을 해서 잘살고 계시고 누나도 물론 행복하게 살고 있다. 나는 어린 고등학교 시절의 그 열정적이었던 사랑을 떠올리며 웃음을 지어보곤 한다.

김도형/ 서울시 영등포구 당산동



다시 아내와 꼬막을 먹고 싶다



“뭐, 필요한 거 없어?” “반찬거리.”

나는 전화를 끊고 나서 연신내역 계단을 바삐 오른다. 갈현초등학교 앞을 지나 횡단보도를 건너면 작은 골목이 나타난다. 저만치 가게가 눈에 들어온다. 아침에 지나쳤다가 밤에 다시 보는 야채가게다. 가게에 들어서자 아저씨가 반갑게 맞이해준다. 나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안으로 걸어 들어간다. 포장된 꼬막을 손톱으로 톡톡 건드려본다. 깜짝 놀란 꼬막이 벌건 살을 껍질 안으로 쏘옥 집어넣는다. 나는 꼬막을 계산대 위에 놓는다. 다시 안으로 들어가 이것저것 살핀 다음 두부 한 모랑, 오뎅 한 봉지를 집어든다.

“얼마예요?” “3900원입니다.”

나는 한 손에는 책을 들고 한 손에는 비닐봉지를 든 채 비탈길을 오른다. 목적지는 산중턱에 있는 전셋집. 나와 아내와 딸아이의 소중한 보금자리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다 보면 이마에서 땀이 배어나온다. 양말은 땀으로 젖는다. 초인종을 누르자 아내가 문을 연다.

“여보! 다녀왔소.” “어서 와.”

아내가 반갑게 맞이해준다. 딸아이는 엄마 옆에 서서 방긋 웃는다.

“지우, 안녕? 엄마랑 잘 놀았어?” “응!”

딸아이를 번쩍 안아올리자 다시 웃는다. 아빠를 똑 닮은 딸아이. 꼭 내가 웃는 듯하다. 거실에 꼬막 냄새가 가득하는가 싶더니, 아내가 술상을 들고 방 안으로 들어온다. 나는 아내의 잔에 술을 따르고, 아내는 내 잔에 술을 따른다. 건배를 하고 나서 술잔을 들이켜고, 꼬막을 까먹는다. 딸아이는 곤하게 잠들어 있다. 창가에 놓인 클로버가 하얀 꽃을 활짝 피우고 있다.

돌이켜보면 행복한 시절이었다. 딸아이는 건강하게 자라났고, 아내는 밝은 얼굴이었다. 아이들한테 꿈을 심어주는 글을 쓰는 나날이 보람찼다. 그러나 이제는 꿈같은 옛일이 되어버렸다. 사고로 인한 하반신 마비, 실직, 취업, 이직…. 그새 많은 일들이 있었고, 나는 지쳐버렸다.

생활이라는 게 만만치가 않다. 새로 옮긴 학원에서 아이들에게 논술과 독서토론을 지도하면서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돈을 받고 있다. 머잖아 가르치는 아이들이 늘어나면 돈도 더 받게 될 것이다. 그러면 아내의 얼굴에서도 웃음을 엿볼 수 있을까. 그날이 오면, 다시 꼬막을 안주 삼아 아내랑 술잔을 기울이고 싶다.

홍용희/ 서울시 은평구 갈현동



아빠, 7년의 세월 저편에 있는…

아빠. 저예요. 아빠가 그렇게 예뻐하던 작은 딸 말이에요.

벌써 아빠와 얼굴을 못 본 지 7년째로 접어들고 있네요. 그때만 해도 ‘이혼’이라는 말이 얼마나 무서운 건지,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지 이해하지 못했고 몰랐기에 지금 와서 더 가슴 아파하는지 모르겠어요. 아마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두분이 이렇게 되지 않도록 말렸겠죠.

아빠와 떨어져 있는 사이 저는 아주 많이 자랐답니다. 식구들 중에서 유난히 키 안 큰다고 저를 걱정해주셨죠 아빠가 저를 마지막으로 보던 그때보다 10cm도 더 컸답니다. 그것도 모자라 아직도 크고 있어요. 단발머리도 많이 자랐고요, 이제 머릿속도 세상에 대한 궁금증으로 많이 채웠죠. 아빠 책 읽고 신문 읽는 거 좋아하시잖아요. 우리 다시 만나면 거창한 토론 한번 해볼까요?

‘봄’이라는 이름 들으면 보통 이런 거 생각하잖아요. 세상의 온갖 생물들이 자라고 세상이 아름답고 생기 있는 계절. 하지만 저에게 봄은 그리 썩 달갑지는 않은 계절이랍니다. 아빠 생각이 나기 때문이죠. 저, 아직도 수첩에 아빠 생일은 꼭 적어놔요. 우리 가족, 봄 되면 아빠 차 타고 경주 가고 그랬잖아요. 엄마가 사진 찍어주고 아빠는 저를 안고 포즈를 잡아주시고. 우리, 그랬잖아요.

아빠가 우리를 떠나고 한동안 많이 힘들었답니다. 마침 그해 경제한파가 몰아치면서 당연히 저희 집도 어려웠죠. 그렇게 열심히 매달린 작곡 공부도 그만둬야 했고, 특별반이라서 경쟁심에 매일 12시까지 야간자율학습을 하다 보니 스트레스로 6개월 동안 15kg나 체중이 늘었어요. 엄마는 그래서 날 볼 때마다 매번 안쓰러운 눈으로 쳐다봐요. 그래도 이런 건 충분히 이길 수 있었어요. 정작 힘들었던 건 비로소 나중에서야 깨달은 아빠의 빈자리였죠. 이건, 그 누구도 채워줄 수 없더라고요.

아빠. 비록 저는 아빠를 볼 수 없지만 항상 아빠의 행복을 빌고 있답니다. 그 행복을 같이 만들어갈 수 있었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그러기엔 이젠 7년이라는 시간의 벽과 함께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우리를 가로막고 있네요. 이제 몇년 뒤면 환갑이 되실 텐데 무엇보다 건강하시고요, 아빠가 보시지 못하는 어딘가에서 작은딸이 열심히 살고 있다는 거, 잊지 말아주세요. 이제야 아껴둔 그 한마디를 합니다.

아빠. 보고 싶어요. 그리고 사랑합니다.

승인/ 서울시 구로구 고척동



살아 있어라, 친구들이여

시골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우리들은 하나뿐인 학급에서 6년을 함께 지냈습니다. 5학년쯤 되면 우리 동네 친구든, 남의 동네 친구든 친구집의 숟가락 수는 자동으로 알게 되어 있었지요. 간혹 제법 멀리 떨어진 친구집에 놀러가면, “뉘집 자식이냐?”, “운암 사는 누구네 동생입니다”, “아버지 요새 술 많이 안 드시냐?” 이런 식이었습니다. 술버릇이 고약한 아버지를 둔 나는 오빠 이름을 대지만 그래봐야 별 소용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때 어른들은 왜 그렇게 술을 많이 먹었고, 주사 있는 사람들은 또 왜 그렇게 많았는지. 해질 녘 소리 질러대며 부부싸움은 또 왜 그리들 하셨는지. 그때는 그 모든 것들이 부끄러움이더니 이제는 그리움입니다. 온 동네 개들을 살맛 나게 짖어대게 하던 아버지의 힘찬 목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

개울에 헤엄치는 그 작은 것들을 싸잡아 우리는 피래미라고 불렀는데 그게 별명인 친구가 있었습니다. 여름철 심심풀이로 고무신에 잡아넣으면 금방 배를 뒤집고 가쁜 숨을 쉬지요. 몸이 성치 않는 친구는 그 피래미처럼 그냥 그렇게 빨리 죽으라고 별명으로 불렀다 합니다. 이래가지고 사람구실 못한다고 조부모가 붙인 별명을 모질게 부르고 들일 갔던 친구의 엄마는 매던 밭고랑이 얼마나 길었겠습니까 그 친구는 그래도 죽지 않고 살아 이렇게 산천에 꽃피는 봄날이면 학교로 오는 중에 조팝꽃을 꺾어와 교실에 꽂기도 했습니다. 6학년 때 담임 선생님을 무지 좋아했는데 칭찬 듣고 고개를 허리와 함께 외로 꼬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우리는 놀리기는 했어도 피래미라고 부르지는 않았습니다.

조카를 따라 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삼촌이는 우리보다 대여섯살이 많았습니다. 이름을 부르기도 하고 친구따라 삼촌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쫄망쫄망 선생님을 바라볼 때는 책상을 보고 우리가 책상을 볼 때는 선생님을 보던 삼촌이. 집으로 가던 그 먼 길을 늘 챙겨다녀야 했지만 6년을 처음부터 그리했기에 귀찮은 줄도 몰랐습니다. 다른 동네에 살던 친구들은 삼촌이를 처음엔 무서워했습니다. 머리가 커다랗고 허리가 구부정하니. 그래도 늘 보면 익숙해지고 익숙해지면 너와 나를 구분하지 않는답니다. 매일 보는 친구를 쓸데없이 구분하는 바보가 어디 있겠습니까. 편을 나눠 놀 때는 약해 보이는 편에 삼촌이를 덤으로 붙여 놀면 그뿐이었습니다.

윤분이는 우리 앞집에 사는 월남한 사람의 여섯째 딸이었습니다. 점심을 고구마로 때워야 하는 형편에도 아들 낳게 해달라는 굿은 무진장 했습니다. 그렇게 빌고 빌어 낳은 아이가 윤분이었습니다. 윤달에 낳은 분한 자식이라 해서 윤분이라 지었답니다. 윤분이는 아기 때, 아침부터 저녁까지 혼자 방에 누워 지냈습니다. 들일에 바쁜 엄마는 발에 차이는 딸, 낳아놓으면 끝이었고 부모가 안 돌보는 아이 언니들도 별로 챙기지 않았습니다. 우는 소리가 담장을 넘어 넘어, 들리고 또 들리면 참다 못해 내가 담을 넘어가 놀아주었습니다. 그렇게 한번 넘은 담 나중에는 평지 길 가듯 수월히 넘어다녔습니다.

삼촌이는 이제 죽어서도 부실한 자식 걱정이던 그 부모의 무덤 옆에 묻혔습니다. 조팝꽃을 꺾어오던 피래미는 산업재해를 입어 팔 하나를 잃고 시골로 돌아온 동네 오빠와 결혼해 살고 있습니다. 윤분이는 시집 가서 아들 낳고 딸 낳고 친정부모 섬기며 잘살고 있습니다.

세월은 이렇게 저렇게 흘러 나와 친구들 얼굴에 잔주름을 새겨놓았습니다. 이제는 친구들과 그러지요. 세월이 저만 가고 우리 젊음은 이제 안 가져가면 좋겠다고요.

김혜영/ 대전시 서구 괴정동



사랑으로 슬프던 날은 행복하였네



선배와 헤어진 지 몇년이 지난 지금, 난 예전엔 없던 버릇이 생겼어요. 사람들 만나면 괜히 다른 사람 안부 묻는 척하면서, 에둘러 선배 얘기 듣고 싶어 무진장 애쓰는 버릇 말이죠. 비록 상대가 눈치챌까봐 궁금한 건 많지만 꾹 참고 그 정도로 만족해야 하지만.

지금껏 결코 먼저 연락하기는커녕, 선배가 일하는 먼 곳도 마다하지 않고 찾아간 후배를 반가운 척(?)도 해주지 않던 선배를 왜 이렇게 궁금해하고 그리워하는지. 아마 그동안 선배가 나에게 심어준 많은 추억 때문이겠지요.

대학 새내기 시절 처음으로 선배를 만났을 때였죠. 그땐 온통 선배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찼고, 뭐든 선배랑 연관지어 생각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언제나 바쁜 선배를 만나기는 ‘하늘의 별따기’. 그래서 간혹 얼굴이라도 마주칠 때면 어찌나 기뻤는지 하루종일 콩닥콩닥 뛰는 마음 진정 시키느라 혼난 적도 한두번이 아니었어요. 또 언제쯤 선배가 내 이름 불러줄까 잔뜩 기대하고 있는데 내가 아닌 내 친구 이름을 먼저 부른 날, 얼마나 속상했는지 며칠 동안 가슴앓이를 한 적도 있어요. 유치하죠?

그러면서 선배에게 내 마음을 보이기 위해 아마도 한 트럭도 넘을 만큼의 편지를 썼던 기억도 나네요. 매일 쓰는 편지를 두장 넘기기 일쑤인 나를 보며 저조차 신기할 정도였죠. 그리고 유식해(?) 보이려고 좋은 글귀 인용해서 한마디씩 빼기려고, 그때 뒤적인 책만 해도 수십권일 거예요.

이런 일도 있었어요. 어버이날, 학교 앞 꽃집에서 아르바이트하고 주인 아줌마가 부모님 드리라고 준 꽃바구니를 선배한테 줘버린 적도, 선배가 준 작은 쪽지 하나도 매일 읽어 거의 외우다시피 한 적도. 이런 일들이 어느덧 피식피식 웃음을 나게 하는 추억이네요. 아마 그때 이랬던 나를 선배는 모르겠죠….

그러고 보면 선배는 참 냉정하고 나에게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어요. 때로는 이런 선배가 밉고 선배를 좋아하는 내가 싫은 적도 있었지만 나에게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을 가르쳐준 것도, 혹여 만날지 모르는 선배를 기다리게 하는 인내심을 기르게 해준 것도 선배였죠. 무엇보다 선배는 함께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나에게 펄펄 넘치는 ‘생기’와 주체할 수 없는 ‘행복’을 안겨준 사람이었어요. 비록 내 마음을 받아주지 못한 선배로 인해 가장 슬프고 힘들었던 그때가 지금 생각하면 가장 기쁘고 하루하루, 매시간 내가 살아 있는 것조차 고마웠던 시절인 만큼 내 생의 ‘가장 아름다운 추억’으로 마음 한켠에 남아 있네요.

사실 선배란 말이 너무 거리감이 느껴져 ‘오빠’라고 부르고 싶은 적도 있었는데 어느새 선배는 오빠라는 말이 ‘징그러울’ 30대가 돼버렸네요. 만일 다음에 만나게 되면 오빠보다 한 아이의 ‘아빠’라고 불러야 될 것 같아요. 늘 건강하고 행복하길 바라요.

김장효숙/ 부산시 남구 용호2동



남들과 다르지 않다는 기쁨

사람이 자기의 어린 시절을 기억할 수 있는 최소나이가 네댓살이라고 한다. 내가 기억할 수 있는 최초의 시간은 내가 남과 무언가 다르다는 걸 인식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부모님과 주위 어른들이 내 다리에 관해 걱정하는 얘기를 들었고 얼마 뒤 유치원에 들어갈 무렵 동네병원에서 두 차례 수술을 받았다. 그러나 두 차례에 걸친 수술은 별 성과 없이 수술자국과 어린아이에게 마음의 상처만 더해주었다. 그 뒤 학교를 다니면서 나는 내 오른쪽 다리가 여느 아이들과 다르며 내 걷는 모습이 남과 다르다는 것을 아이들의 수군거림을 통해 알게 되었다. 다른 아이들이 너무나 쉽게 오르내리는 계단을 한칸씩 한칸씩 다녀야 했고 그나마 내려올 때는 계단에서 떨어질 것 같은 공포 때문에 당시 난 세상에서 제일 두려운 게 계단 내려오는 거라 생각했다. 중·고등학교 때는 체육시간에 혼자 교실을 지키거나 혹은 운동장에 나가서 다른 이들 체육하는 걸 구경해야 했는데 그럴 때면 묘한 감정이 들곤 했다. 특히 요즘처럼 햇살이 따사로운 봄날에는 더욱. 그래서 늘 체육이 들은 날엔 비가 오기를 바란 기억이 난다. 남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가장 좋았던 때가 학창시절이라는데 나에겐 그렇지 않았다. 대학에 입학해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린 시절처럼 놀리거나 상처를 주는 말을 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강의와 강의 사이에 강의실을 옮겨야 하는 건 생각지 못했던 복병이었다고나 할까. 커다란 캠퍼스의 건물들을 옮겨다니고 계단을 다니는 것 자체가 너무나 버거워 오히려 중·고등학교 시절의 작은 건물, 수업을 한 교실에서 그대로 앉아 들을 수 있었을 때가 그리울 정도였다.

그 무렵 대학 3학년을 마치고 휴학신청을 한 뒤 다리 수술을 받기 위해 애양원으로 내려갔다. 애양원, 주로 소아마비 환자들과 한센병 환자들을 전문적으로 치료해주는 기독교계 병원인데 그곳에는 정말 모두 한센병 혹은 다리 치료를 받기 위해 온 환자들로 가득했다.

모두가 지체장애 혹은 그 보호자들, 그곳에서 수술받고 물리치료를 받는 동안은 누구도 장애인임을 인식하지 않고 지낼 수 있었다. 평소 각자 살던 곳에서는 삶 속에서 편견과 호기심, 동정의 시선을 받았는데, 그곳에서는 완전히 자유로웠다. 나 역시 양쪽 무릎을 수술받고 몇달간의 깁스생활, 그리고 물리치료를 받는 등 육체적으로는 참 힘든 시기였지만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편했다. 특히 날씨가 좋은 날엔 물리치료가 끝나고 나서 몇몇이 나무그늘에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혼자서는 전혀 이동이 불가능해 초등학교도 마치지 못하고 20년 이상을 집에서만 보냈다는 분, 집에서 심심할 때마다 영어, 수학을 공부하여 이젠 정석을 외울 정도라는 분. 특히 기억나는 건 그곳에 있는 분들 대부분이 치료가 다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기가 싫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랬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여러 사람들과 많은 공감을 나누며 이야기를 할 수 있고,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최초의 유일했던 시간. 나 역시 그 시절 1년은 지금도 따뜻한 봄 햇살의 기억으로 남아 있다.

임경숙/ 인천시 남동구 간석3동



깊은 밤, 노란 주전자



해가 발을 길게 내딛는 오후 여섯시에 노란 양은 주전자를 들고 집을 나서면 강물소리를 목에 걸고 달리는 기찻길이 있고 긴 둑길을 따라 큰 길가로 나가야 국밥집이 나왔다. 국밥집 아줌마는 하얀 얼굴에 동그스름한 얼굴선이 어린 내 맘에도 곱고 이쁜 아줌마였고 무엇보다 엄마하고 친구여서 막걸리만 주전자 가득 담아 주는 게 아니라 오뎅이 많이 든 사발을 내 앞에 갖다놓으며 숟가락을 내 손에 쥐어주곤 해서 주전자를 들고 둑길을 걷는 창피함이나 무섬증을 아주 작게 만들곤 했다.

봄, 공기는 잔뜩 부풀어 불을 막 지피기 시작한 빵 굽는 가마처럼 따뜻했고, 방죽엔 쑥이 지천이었다. 버들가지는 연둣빛 머리칼을 강물에 휑궈내고 있을 때였다. 빈 주전자를 달랑거리며 집을 나서서 어린 맘에도 익을 대로 익은 봄의 단기운에 취했는지 아님 사춘기의 전조증상이었는지 강가로 내려가 아직 서늘한 강물에 손을 담가보기도 하고 파릇한 새싹을 뜯어 강물에 띄워보내기도 하다 푸른 공기가 꽉 차자 그제사 강가에 저 혼자 오롯이 있는 주전자를 찾아 들고 일어나 국밥집으로 향했다.

“얼른 가거라” 하시는 아줌마 당부에도 막걸리가 가득 담긴 찰랑이는 주전자를 들고 오는 발걸음은 아무래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데 큰길에서 둑길로 접어드니 꼭 누가 나를 따라오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저절로 걸음이 빨라지고 주전자 꼭지에서는 막걸리가 출렁거리며 쏟아져도 무섬증이 눈덩이처럼 커져 발걸음에 붙는 가속도가 줄지 않았다. 철도 건널목을 지나 집에 불빛이 보이자 숨을 헐떡이며 공처럼 굴러 “엄마!” 큰 소리로 부르고 나서 주전자를 팽개치고 땅바닥에 두 다리를 뻗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울음소리에 놀란 엄마가 뛰어나오시고, 그제사 꺼이꺼이 울며 뒤를 돌아보니 깜깜한 어둠뿐 아무도 없었다.

이야기를 들은 국밥집 아줌마는 국밥집 문을 닫고 막걸리를 노란 주전자에 담아 밤늦게 집으로 오셨다. 김치 보시기를 가운데 두고 두분이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이런저런 이야기가 이야기 반, 잠 반 속에서도 어떻게 달던지. 밤에 산길을 걷다 도깨비를 만난 이야기라든가, 누가 곗돈을 탔는데 오는 길에 강도를 만나 어찌어찌 그 강도를 잡고 보니 계주였다는 이야기 등. 또 나직나직 신세 한탄조의 노래는 얼마나 애잔했던지 두 눈이 빨간 엄마가 “그냥, 자고 가소” 하자 엄마 말을 뿌리치지 못해 두분이 나란히 베개를 마주하며 잠드셨다.

작은 도시에서 떠들썩한 연애 사건이 몇해 전에 있었는데 변심한 애인집 앞에서 약을 먹고 죽었다는 청년이 그 아줌마의 하나뿐인 외아들이었다는 것도, 그 청년이 아줌마 인물을 빼닮아 훤칠했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두분이 간밤에 술을 마셨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밥하는 냄새가 방안에 흘러들었고 마당은 물을 뿌려 깨끗이 빗질이 되어 있었다. 아줌마는 “밥 먹고 얼른 학교에 가거라” 하시며 말간 얼굴로 말을 건너셨다.

그 고장을 떠난 지 오래되었고 아줌마 소식도 엄마가 잊으신 지 오래된 듯했다. 옆에 계시지 않는 아버지와 엄마, 막걸리가 출렁이는 노란 주전자, 국밥집 아줌마의 훤칠한 아들 이렇게 요약하듯 10대를 보내고 어느새 무장무장 세월이 흘러와 버렸다. 그 시절 가을에서 봄까지 입었던 빨간 스웨터처럼 아줌마의 애잔한 노랫소리가 따뜻하고 강렬하게 남아 있어 아주 가끔 그 노란 주전자에 두 손을 쬐어 본다.

박승자/ 전남 목포시 용해동



남편들은 우리의 추억을 알까



남편이 밤늦게 돌아왔다. 한 친구가 느닷없이 동치미 국수를 기가 막히게 하는 집이 있다면서 가자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 의기투합한 동료 너댓이 어울려 젖은 밤길을 달려 양평까지 가서 살얼음이 서걱서걱한 동치미 국수를 먹고 왔다는 것이다. 나는 공연히 심통이 나서 맛이 어땠느냐고 묻지도 않고 흥 하니 콧방귀만 뀌어주었다. 나이 사십이면 불혹이라고 공자님이 그러셨지. 그런데 저 친구들은 사십이 지난 나이에 무엇에 그리 강렬하게 혹해서 비에 젖은 밤길을 달려갔던 것일까. 그깟 국수 한 그릇 먹자고.

시샘과 질투에 입술을 앙다물고 베란다 문을 열었다. 비에 젖은 검은 아스팔트가 비늘인 양 번들거리고 가로등 불빛도 젖어 설탕처럼 녹아나고 있었다. 호오 하고 입김을 불어보니 하얀 연기가 되어 슬며시 퍼져나가고 그를 따라 물비린내가 스쳐들어온다. 익숙한 냄새다. 물비린내에 옛 기억이 엿실처럼 묻어나온다.

봄 하고도 밤이었다. 둘도 없는 내 친구와 나, 그 친구의 친구 둘, 이렇게 우리 넷은 공연히 설레서 서울 밤거리를 쏘다녔다. 꽃망울이 밤새 터지는데 가만히 누워 자고 있으면 죄를 짓는 것이라는 친구의 선언 때문에 우리는 그날 밤새 거리를 걷기로 작심했던 것이다. 물론 초저녁에 한잔씩들 했기 때문에 그런 치기 발랄한 이유를 걸고 의기양양할 수 있었던 게지만.

바람이 좀 불어 꽃잎들이 날린다 싶더니 이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마른 길바닥에서 붉은 땅내가 훅훅 올라왔다. 우리 일당들은 그마저 신이 나서 낄낄거리다 얼마 안 가 어깨동무를 하고 걸었다. 그러다 한 친구가 좋은 집을 안다면서 앞장을 섰다. 높고 긴 돌축대에 붙은 포장마차였다. 우리는 바람에 날리는 천막을 들추고 들어갔다. 안경 위로 포근한 김이 가득 서려왔다. 비에 젖어 몸서리를 치고 앉았는데 친구의 친구들이 저희들 겉옷을 벗어 덮어주고는 정작 저들은 추위를 참느라 후우후우 심호흡을 해댔다. 그 꼴이 불쌍해서 다시 겉옷을 벗어 던져주거니 안 받거니 하면서 잠시 실랑이를 벌였다. 안 춥다고, 절대로 안 춥다고 손사레를 하던 그 친구들은 그걸 증명하기 위해 제 겉옷을 입지도 주지도 못하고 무릎 위에 올려놓고는 파랗게 질린 입술로 연신 입김을 불어댔다.

우리는 뜨뜻한 어묵국물과 조개탕으로 언 몸을 노곤히 녹이다가, 소주 몇잔이 이어지면서 완전히 해체되었던 듯싶다. 비바람이 조금 세지면서 천막을 휘리릭휘리릭 감아 들춰대고 툭툭툭툭 굵은 빗방울이 신이 나서 천장을 두들겼다. 한 작은 극단의 신출내기들이었던 친구의 친구들은 노래를 부르고 덩실덩실 춤을 추었고, 몸에서는 모락모락 김이 올랐다. 두어곡 부르고 나면 뚱보 아줌마 엉덩이처럼 묵직하게 내려앉은 천장을 작대기로 밀어올렸고, 그러면 고였던 물이 한꺼번에 좌악 하고 흘러내렸다. 우리는 그걸 무슨 의식을 하듯 해가며 배꼽을 잡고 낄낄거렸다. 나중에는 대접 술을 또 몇잔 걸친 포장마차 아줌마까지 합세해서 노래를 부르고 어설픈 포크댄스를 추며 빙글빙글 돌았다. 안주에서, 몸에서, 머리카락에서, 입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라 포장마차 안은 축축한 목욕탕처럼 되었다.

그날 밤 그곳은 우리들의 성이었다. 젊은 신명이 가득 넘쳐나던 성채였다. 젊은 열정이 부유하는 구름 위의 요새였다. 봄이면, 펄럭이는 마음처럼 바람과 함께 비오는 봄밤이면 항상 그날 그 장면이 떠오른다. 아마 내 젊은 날의 정점이었던 그날이.

베란다 문을 닫으며 아린 것 같기도 하고 울멍울멍한 것 같기도 한 가슴도 같이 닫는다. 방에서는 가장이 참석하지 않는 식탁 덕에 김치볶음밥 뚝딱 볶아 먹인 아이들이 퍼져 자고 있고, 그 옆에서는 동치미 국수를 먹으러 흐뭇한 밤안개를 뚫고 먼 길을 달렸던 남편이 자고 있다. 그 모습을 한참을 내려다보면서 나는 주문을 왼다.

남편들이여. 나는 그 시절을 잊었지만 당신들은 즐기라. 나는 그 봄밤의 추억을 접어넣었지만 당신들은 그냥 계속하라. 처진 눈가에 물기 맺힐 만큼 시새움이 나지만, 당신들은 그리하라. 그러면서 내게 있었던 그 시절을 생각한다면 입 꾹 다물고 해주는 밥과 국과 사소한 반찬 나부랭이들일망정 황송해하며 먹을 일이다.

김종옥/ 서울시 동작구 사당동



일러스트레이션 | 박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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