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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섹션 : 특별기획 등록 2003.01.02(목) 제441호

[특별기획] “꿈★은 어디로 이전되는가”

행정수도는 그들의 고향으로 향할 것인가… 장기·오송·아산 신도시를 가다

경부고속도로에서 최근 새로 뚫린 천안-논산 고속도로로 갈아타자 공주는 20여분 만에 닿았다. “다 끝난 거여. 더 볼 것도 없지유. 여그가 한양 지세를 그대로 옮겨놓은 곳인디…. 20년 전에 벌써 철근이 얼마, 시멘트가 얼마, 목재가 얼마나 들어간다는 것까지 다 조사해뒀잖어. 청와대·중앙청이 나라의 중심인데 아무 데나 갖다앉혀 때려 지을 수 있간디.” 지난 12월26일, 충남 공주군 장기면사무소에서 만난 이장 윤승현(56·장기면 하봉리)씨는 확신에 차 있었다. 행정수도를 옮긴다면 여기말고 다른 데로 갈 데가 없다는 투였다.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마을 사람 누군가 불쑥 끼어들었다. “근데 어제 방송 보니까 옛날에 정했던 것 다 무시하고 원점에서 시작한다는디”

박통때 수도유치 좌절됐던 장기면

도계리에 사는 고영철(60)씨는 “투표할 때 행정수도가 장기로 올 가능성이 높다면서 까놓고 노무현을 지지한 축도 있었다”고 말했다. “엊그제 밤에 대전에서 전화가 왔는데 땅을 팔라는 거야. 내가 안 판다고 했는데도 값을 올리면서 자꾸 전화가 오더라고.” 멀리 마을을 사방으로 둘러싼 야트막한 산마다 머리에 흰 잔설을 이고 있었다. 겉으로는 평온한 겨울 농촌이지만, 행정수도 후보지로 입에 오르내리는 장기면 일대(장기지구)는 이미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장기면은 22년 전부터 이미 행정수도 바람이 한두 차례 휩쓸고 지나간 곳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 당시 구상한 행정수도 이전 백지계획(상자기사 참조)이 그것이다. 박 대통령이 죽고 얼마 뒤, 3공화국이 장기지구를 새 행정수도로 선정했다는 말이 뒤늦게 나돌면서 땅 투기 바람이 분 것이다. 초로의 중년남자들은 “그 당시 이미 조사해둔 게 있으니까 장기로 수도를 옮기면 예산도 절감되고 시일도 앞당겨진다”며 제각각 유치 논리를 폈다. “이런 것 봤어” 식당에서 만난 한 마을 주민이 밥을 먹다 말고 호주머니에서 뭔가 꺼내 윤 이장한테 건넸다. ‘행정수도 건설 백지계획’에 대한 옛 신문기사였다. “이거, 우리집에도 있는데 자네도 갖고 있었나”

“자꾸 신문·방송에서 떠들어대면 별로 안 좋아. 땅이 곧 (토지거래허가구역으로) 묶일 것 아냐. 그러면 땅도 못 팔고….” 윤씨의 말은 은근한 기대에 들뜬 장기면의 분위기를 그대로 표현하고 있었다. 박 대통령이 죽으면서 무산되고 말았지만 이번에는 반드시 수도 이전이 이뤄진다는 것일까. 사람들 사이에 “지금 서울 중앙청사는 평당 1억원 간다”는 말도 심심찮게 나온다. 어느 날 ‘수도시민’이 될 수 있다는 생각보다는 땅값에 대한 기대와 관심이 더 컸다. 하지만 주민들은 내색을 경계하면서 이런 말도 잊지 않았다. “수도가 들어서면 보상받고 고향을 떠나야 할 판이라 별로 탐탁하지도 않고 불안하기만 하지 뭘.”

대전·청주와 삼각을 이루는 장기지구는 북으로 국사봉, 남으로 장군봉 등 올망졸망 솟은 야산이 빙 둘러싼 분지형 지역이다. 앞뜰로는 금강이 흐르고 동쪽에는 연기군 대평뜰이 널찍하게 펼쳐진다. 겨울바람이 휑하니 불어가는 면내 거리에 인적은 드물었다. 하지만 길 한쪽에 붙은 장기부동산에는 유독 사람들이 뻔질나게 드나들고 있었다. “논 한평에 7만∼8만원 준다고 해도 물건이 하나도 없다네. 내가 너무 늦었나.” 한 중년여자가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머뭇머뭇 부동산을 나섰다. “서울서 돈 싸들고 와 두드리는 통에 땅값만 치솟고 있지. 선거 끝나자마자 부산·여수 등지에서 아줌마들이 애 업고 와서 땅을 물어보고 가기도 했는데 분위기만 붕붕 떠 있고 거래는 없지. 행정수도가 될지 모른다고 다들 땅을 안 내놓거든.” 장기부동산 유장환씨가 사람만 북적대고 입싸움만 무성하다며 한숨처럼 말했다.

“벌써 컴퍼스 돌리는 건 오버다”

뒤이어 부동산에 들어선, 대전에서 온 사람들 3명이 벽에 걸린 장기면 지도를 한참 훑어보더니 한마디 던진다. “발전된다면 이쪽인가요.” 그 때 서울 번호판을 단 검은 에쿠스 세단이 흙먼지를 날리며 부동산 앞에 멈춰섰다. 양복차림의 40대 젊은 남자였다. 옛날에 장기 행정수도 얘기가 한창 돌 때 여러 군데에 땅을 샀는데 그 뒤로 잠잠해진 탓에 물먹었던 사람이다. 이번에 장기가 다시 주목받자 동태 파악차 들른 것이다.

노무현 당선자쪽이 제시한 행정수도 입지조건은 △서울에서 멀지 않고 △청주국제공항과 (고속)철도, 고속도로 등이 잘 갖춰진 곳 △도로와 상하수도 등 인프라 구축 비용을 최소화할 수 있는 곳 △50만명에서 100만명의 인구 수용이 가능한 곳 등이다. 노 당선자와 민주당쪽에서 특정 지역을 행정수도 후보지로 언급한 적은 없다. 하지만 벌써부터 장기지구, 오송·오창지구, 아산새도시, 풍수지리상 길지로 평가받는 목천지구(천안시 목천면 일대, 독립기념관 주변), 태조 이성계가 수도 천도를 위해 주춧돌을 놓았다는 ‘신도안’ 지역에 인접한 논산지구(논산시 상월·노성면 일대)가 후보지로 꼽히고 있다.

민주당 신행정수도건설추진위원회 김필중 대변인은 “지금 지도를 펴놓고 컴퍼스를 돌리는 건 오버다. 몇 군데가 후보지로 거론되고 있지만 우리가 면적을 조사하고 입지조건을 판단한 적도 전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충청권에서는 행정수도 이전 이슈가 이미 달아올랐다. 행정수도 대전근교 유치를 추진 중인 대전시는 “대전 외곽 충남북 경계의 미개발지역에 대한 중장기 토지이용계획을 준비하는 등 행정수도 입지대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전시는 행정부처는 충남북으로 가더라도 국회는 분산돼 대전으로 올 수 있다는 점까지 고려하고 있다. 충남북도 ‘행정수도 유치기획단’을 구성하는 등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장기면에서 차로 20여분 달려 도착한 충북 강외면 오송리. 오송리 연제저수지 위쪽 정자에 올라 내려다본 오송 들판은 군데군데 흰 눈에 덮인 채 끝없이 펼쳐지고 있었다. 탁 트인 사방 멀리 대한제지 등 몇몇 공장의 굴뚝 연기가 피어올랐다. 경부고속도로와 중부고속도로가 만나는 오송은 인구 1만명이 사는 한적한 농촌이다. 청주와 조치원이 근처에 있고, 경부고속철도 오송역에서는 고속철도가 시험운행 중이었다. 연제저수지 옆으로는 140만평에 이르는 생명과학단지가 들어설 예정이다. 그래선지 오송은 이미 외지인들의 발길이 잦고 부동산업소가 11곳이나 새로 생겼다. 오송 땅 소유자 중 외지인이 80%에 이른다고 할 정도다. 오송리 글로벌공인중개사무소 박종모씨는 “선거 끝나고 일요일에 서울서 가족, 부동산업자 등 20여팀이 찾아와 바글바글했다. 외지인은 땅 찾으러 돌아다니고, 나온 물건은 다시 들어가버리고 파는 사람이 한명도 없다”고 전했다. 땅값은 대선 뒤 15%가량 가파르게 뛰었다.

사방팔방으로 교통이 뚫린 오송

“아산·천안새도시는 서울권이나 마찬가지라 수도를 옮기나 마나다. 생명과학단지 조성으로 인프라가 구축될 경우 여기서 10조원이면 수도 건설이 충분하다. 30분이면 천안·대전·청주에 닿을 수 있는 3각 지점의 한복판이 오송이다.” 박씨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오송을 확신하고서 땅을 사겠다고 목매는 사람도 있다. 우리야 그렇다고 할 수도, 아니라고 대답할 수도 없는 처지다.” 그래서 즐겁다는 것인지 답답하다는 것인지 그가 까닭모를 표정을 지어보였다. 떠 있는 분위기와 달리 강외면사무소 김창수씨는 걱정부터 했다. “수도가 들어서면 다 고향을 쫓겨나게 될 터인데 그 때 땅값 보상이 얼마나 나올지…. 그 돈으로 농협 빚 갚고 딴 데 가서 살 수 있을까”

정진문 강외면장은 앞으로 오송에 호남고속철도 분기점까지 유치되면 새 행정수도로 손색이 없다고 자랑했다. “행정수도 후보지로 충청권이라는 큰 타이틀만 나왔지만, 오송이 사방팔방으로 교통이 뚫린 요지라 그런지 우리 군 14개 읍·면이 다 기대심리를 갖고 있었죠. 투표에서 노무현 지지가 예상외로 월등히 높았어요.” 오송리 박하규(68)씨는 “왜정 시대부터 조치원과 여기는 전혀 발전이 안 됐다. 이제 한번 무엇이든 들어와야 전기를 마련할 것 아니냐”면서 느닷없이 오송 생명과학단지의 토지 보상가격 얘기를 꺼냈다. 보상가가 인근 땅값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평당 5만원대에 불과해 주민과 마찰을 빚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의식한 듯 “보상값을 적게 준다면 수도가 안 오는 게 낫다는 생각도 마을에 퍼져 있다”고 귀띔했다.

해질녘이 다 돼 도착한 충남 배방면 일대 아산새도시 예정지는 천안시와 바로 붙어 있는 탓인지 도회지나 다름없었다. 동방마트(옛 국제방직 터)를 중심으로 선문대학교 앞뒤 장재리·매곡리 등 탕정면 일대 800여만평이 2020년까지 새도시가 들어설 지역이다. 새도시 한쪽을 낀 채 통과하는 경부고속철도 천안역사(또는 장재역)가 먼저 눈길을 끈다. 고속철도가 개통되면 서울에서 30여분 만에 도착한다. 동행한 배방면사무소 이종택(32)씨는 “대선이 끝나자마자 급작스레 아산새도시가 행정수도 후보지로 떠올랐다. 그동안 도청 유치를 놓고 충남 자치단체들이 시끄러웠는데, 이제 도청은 잠깐 유보하고 행정수도로 옮겨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아산새도시는 투자위험이 적다”

아산새도시는 단 몇분 안에 천안시내로 들어설 정도로 천안 접경지역에 있기 때문에 천안의 확대에 불과하다거나, 서울에서 너무 가까운 탓에 수도권의 평면적 확산에 그쳐 행정수도 이전의 효과가 적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주민들은 오히려 ‘서울에서 출퇴근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깝기 때문에’ 후보지로 유력하다고 믿고 있었다. 동방마트 맞은편 미래부동산컨설팅은 “다른 후보지는 투자를 많이 해야 하지만 아산새도시는 조성계획이 확정돼 있고, 행정수도에 맞게 새도시 계획을 일부 수정만 하면 된다”며 “오송이나 장기에 비해 아산새도시는 어차피 새도시로 개발하는 지역이라 투자위험이 적은 편”이라고 말했다. 그는 아직 손이 안 타 땅값이 별로 안 오른 좋은 땅도 일부 있다고 했다. 하지만 새도시 예정지 앞 신라아파트에 사는 전아무개(53)씨는 “여기에 행정수도까지 오면 어마어마한 요지가 되겠지만, 새도시 개발로 이미 땅값이 오를 만큼 올랐다. 땅값이 비싸서 행정수도 건설에 돈이 더 많이 들기 때문에 수도를 여기로 옮겨오기는 힘들 것 같다”고 내다봤다.

‘수도 서울’이 막을 내리고 행정수도가 이사갈 새터 후보지로 공식 언급된 곳은 전혀 없다. 하지만 벌써부터 장기, 오송, 아산새도시는 각각 장기 시대, 오송 시대, 아산 시대가 온다는 기대에 들떠 있었다. 애초 마을 주민들은 몰랐는데 그곳이 행정수도 후보지라고 ‘바깥에서’ 말이 나돌면서 뒤늦게 알게 됐고, 덩달아 분위기가 뜨고 있는 것이다.

공주·오송·아산=글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사진 김종수 기자 jongs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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