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별기획 ] 2003년01월22일 제444호 

나쁜 여자 전성시대!

‘노’라고 말 못하는 착한 여기자, 욕망에 충실한 당당한 그녀들을 찾아나서다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1월초의 어느날, 동료인 김소희 기자가 ‘나쁜 여자’ 특집을 제안했다. 기획이 기사의 90%라고 늘 주장해온 그녀, 한술 더 떠 제목만 나오면 기획은 이미 끝난 거라고 말해온 그녀, 지난 연말연초 온갖 감언이설로 착한 팀장을 어리둥절하게 해놓고는 놀러만 다닌 그녀. 자기가 놀러 다닌 것은 단순한 ‘비행’이 아니라 모두 ‘나쁜 여자’ 기획을 위한 것이었다고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강조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역시 내용은 없었다. 제목만 있었다. 그래놓고는 자기와 내가 이 특집을 함께 하는 것은 ‘진정한 연대’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착한 여자.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노’라고 말 못 하는 나. ‘나쁜 여자’를 어디서 구한다 근심하던 중 “착한 여자는 죽어서 천당에 가지만 나쁜 여자는 살아서 어디에든 간다”는 독일 심리학자 우테 에어하르트의 말이 떠올랐다. ‘이 말이 맞다면 나쁜 여자는 어디에서든 찾을 수 있겠지’ . 주먹을 불끈 쥐고 ‘나쁜 여자’를 찾아나섰다.

#G·SPOT에서


사진/ 홍대앞 클럽 G·SPOT에서는 일주일에 한번씩 음란한 파티가 벌어진다. 1월11일 비키니 파티를 앞두고 포즈를 취한 운영진들. (류우종 기자)


홍대앞 지하클럽 G·SPOT. G·SPOT은 여성의 질내 성감대를 뜻하는 말이다. ‘미성년자, 숫총각, 숫처녀, 섹스를 극도로 혐오하는 자, 강간범의 입장을 금합니다’라고 쓰인 출입문을 밀고 들어가면 한쪽 벽에선 ‘음모 전시회’가 한창이다. 남자들에게서 한 움큼 또는 몇 가닥씩 뽑아낸 음모를 유리판에 넣어 이름(별명)을 붙인 뒤 고이 모셔놨다. ‘대한 여성 오르가자미 잡기 운동본부’를 내세운 인터넷커뮤니티 ‘팍시러브’(www.foxylove.net)에서 운영하는 이 클럽은 지난해 9월 음란바를 공식 선포하며 문을 열었다. 팍시러브 운영자 이연희(28)씨는 “솔직하게 성을 즐기는 여자들이 나쁜 여자들이라면 우리는 나쁜 소굴이다”라고 말한다. 나쁜 여자들의 ‘소굴’에서 홀을 휘어잡으며 춤을 추고 있는 김아무개(32)씨를 만났다. 완전히 몰입한 채 힙합을 추던 그는 뜻밖에도 처음 이곳에 놀러왔다. 이혼한 지 1년 된 그는 팍시러브에 이혼에 관한 경험을 털어놓으며 해방감을 느꼈다. 그에게 특히 ‘유익한’ 글은 오럴섹스에 관한 것. 남자를 사귀지 않고 있어 글로나마 간접적인 쾌감을 느끼기에 빼놓지 않고 본다. 비트가 강렬해지며 클럽의 분위기가 뜨거워지자 이벤트 담당 남자 알바가 ‘떴다’. 의자에 올라가 바지를 내리자 두개의 끈이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흰 엉덩이가 불빛 속에 도드라져 보였다. 그가 성기만 감싼 언더웨어를 입고 흥을 돋우자 이내 함께 춤을 추던 여성들도 윗옷을 벗어던졌다. 브래지어만 남기고 상의를 홀랑 벗은 김씨의 옆구리에선 헤너로 염색한 나비 한 마리도 함께 너울거렸다.

#까다로운 프리섹스주의자

G·SPOT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중, 이번에 소개받은 ‘나쁜 여자’는 프리섹스주의자였다. 시민단체에서 일하는 이아무개(26)씨는 스스로를 ‘까다로운 프리’라고 소개했다. “꼭 사랑해야 섹스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원나잇스탠드는 안 한다. 왜냐하면 내가 바라는 건 온몸의 세포가 살아나는 듯, 서로를 만져주고 위로해주는 섹스다. 여자도 남자도 어느 누구에게 일방적인 관계는 바라지 않는다. 그러기 위해선 상대방을 일정기간 탐색해 서로가 즐길 만한 파트너인지 확인하는 기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2명의 파트너를 고정적으로 사귀고 있는 그는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했다. 시댁 관계를 포함한 집안문제를 감내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앞으로의 꿈은 대학원에 진학해 비정부기구(NGO) 활동에 전문성을 더하는 것이다. “맏딸이기 때문에 어려운 집안형편을 도와야 한다는 의무감도 있다. 쥐꼬리만한 시민단체 월급을 받으면서 이렇게 나 하고 싶은 대로 살아도 되나 가끔 의문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힘든 것을 이겨냈듯 동생들도 잘 헤쳐나가리라 생각한다. 내가 슈퍼우먼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야 우리 가족도 마음 편해지지 않을까.”

#런어웨이 브라이드


사진/ 자신과 자신의 파트너를 위해 몸에 화장을 하듯 헤너를 하는 여성이 늘고 있다. 경제력 있는 20~30대 싱글 여성이 주고객이다. (김종수 기자)


회사원 정아무개(32)씨는 여자친구들 사이에선 누구보다 ‘의리녀’로 통한다. 동성 친구들에겐 속깊고 심지 굳지만 이성 친구들에겐 마냥 너그럽진 않다. 그가 20대 중반부터 시작해 결혼 날짜를 잡은 것이 두번, 양가 부모가 상견례한 것까지 따지면 통합 다섯번이다. 모두 결혼 문턱까지 이르렀으나 끝내 골에 이르지는 못했다. 몇달 전 벌어진 마지막 결혼 프로젝트에 실패하고난 뒤 그는, 자신의 ‘연애 10년사’를 돌이켜보며 이제까지 사귄 남성들이 모두 ‘약한 남자’였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내가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치기 때문에 나를 압도하고 지배하는 남자는 나도 모르게 선택하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결혼 직전에 이르면 그런 단점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결국 그녀가 내린 결론은 아무리 나이 들어도 나이에 떠밀려 결혼하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먹기 싫은 술, 먹기 싫은 밥 먹는 것처럼 꾸역꾸역 떠넣다가 나중에 정 못 참겠다면서 숟가락 내동댕이치고 밥상 뒤집는 꼴은 못하겠다. 차라리 아예 먹지 않는 게 낫지.”

#매일매일 나쁜 여자가 되련다


사진/ <그래, 난 못된 여자다>를 펴낸 번역공동체 유리의 여자들. 날마다 나쁜 여자가 돼가고 있다고 자신들을 소개한다. (김종수 기자)


신문을 펴들었다. <그래, 나는 못된 여자다>(캐시 하나워 엮음, 번역집단 유리 옮김, 도서출판 소소 펴냄)의 광고가 큼지막하게 실려 있다. ‘26명의 여자들이 섹스, 고독, 일, 모성, 결혼에 관한 진실을 말하다’. 궁금했다. 미국의 나쁜 여자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인 베로니카 체임버스는 남자와의 ‘거래’를 강조한다. 그는 한때 재능은 뛰어나지만 늘 빈곤선에 허덕이는 화가와 연애를 했다. 화가는 뉴욕의 고급 아파트에 살 만한 고소득자인 그에게 전적으로 빌붙어 살았다. “방과 밥과 브로드웨이 티켓과 공짜휴가를 제공하면서도” 그는 도무지 화를 못 낸다. 싸울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결국 몇년 뒤 파국으로 치닫고 나서야 그는 이렇게 부르짖는다. “나에게 훌륭한 샴페인이 있다면 나는 그것을 구입할 돈은 물론이고, 즐길 권리를 번 것이며, 따라서 자랑스럽게 즐기겠다. 다시는 대가 없이는 어떤 것도 나눠주지 않겠다. 사랑의 이름으로도, 그 무엇의 이름으로도.”

이 책의 편집자인 이문희씨는 “대형서점에 가서 여성코너를 둘러보면 페미니즘 서적 또는 성공 스토리를 다룬 책이 대부분이다. 경제적으로 자기 기반을 갖추고 일에서 성취하길 바라며, 연애를 포함한 인간관계에서도 주도권을 쥐고자 하는 여성들의 일상에 관한 이야기는 별로 없다. ‘나쁜 여자’가 설득력을 갖는 것은 이런 대목이다”라고 분석했다. 이 책을 우리말로 옮긴 번역집단 유리는 통역대학원 동문 6명이 모인 독서토론회가 시초가 됐다. 모임의 맏이인 윤미경(39)씨는 매일매일 나쁜 여자가 돼간다. 결혼 6년째인 그가 가장 경계하는 것은 집안일을 군말 없이 재깍재깍 해내는 착한 여자로 길들여지는 것. 바쁜 아침시간에 혼자 동동거리며 집안일을 할 때, 세상 없어도 30분씩은 꼭꼭 신문을 읽는 남편을 보면 화가 치솟았다. 그는 명절을 맞을 때마다 남편에게 무엇이든 부엌일을 자발적으로 한 가지씩 하라고 요구했다. 남편은 이제 스스럼없이 전을 부친다.

#싱글스의 선택

나쁜 여자들을 만나 놀다가 회사에 들어가보니, 어라~ 책상엔 <싱글즈> 대본이 도착해 있다. ‘<처녀들의 저녁식사>처럼 솔직하고 화통하고 발칙한 이야기가 펼쳐지려나’ 기대를 품고 스크립트를 뒤적였다. 일본 TV드라마 <29세의 크리스마스>를 원작으로 한 이 영화(권칠인 감독)는 최근 엄정화·장진영·이범수·김주혁으로 주연 캐스팅을 완료하고 촬영에 들어갔다. 동미(엄정화)와 나난(장진영), 정준(이범수)은 10년지기이다. 패션 디자이너 나난은 결혼하기로 약속한 남자친구로부터 하루아침에 바람맞고, 직장에선 전공과는 상관 없는 외식사업부로 밀려나자 스트레스로 원형탈모증까지 겪는다. 동미는 정준과 순전히 경제적 이유로 동거 아닌 동거 중이다. 동미는 46번째 파트너를 집안에 끌어들일 정도로 정준과 ‘막역한’ 사이라고 믿는 막힘 없는 성격이다. 주위 모든 남자들을 하나씩 대입하며 섹스하는 상상을 할 정도로 허전해하던 나난에게 어느 날 바람처럼 나타난 남자 수헌(김주혁). 동미는 얼른 자보라고 거든다. “이때쯤 꼭 체크해야 돼!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고 난 뒤엔 늦는다.” 하지만 정작 일이 벌어진 건 동미와 정준. 말싸움 끝에 화해한다며 벌인 술자리 뒤 그들은 우연히 잠자리를 함께한다. 정준과의 ‘하룻밤’ 결과 동미는 임신을 한다. 나난은 이들이 결혼하길 바라지만 동미는 자립노선을 걷는다. 여사원 후리기를 즐기던 직장 상사를 골려주는 것을 끝으로 회사 생활을 접고 새 사업에 뛰어든다.

나난 역시 수헌으로부터 결혼반지에 유학까지 덤으로 얹은 ‘패키지’를 프로포즈 받지만 덥석 움켜쥐지 않는다. “나 사실 무지하게 쪽팔려. 남자 하나 나타나니까 다 이뤄지는 것두 쪽팔리고. 자기한테 기댈 생각만 하는 내가 쪽팔려. ” 나난은 결혼반지를 돌려준다. 29살의 문턱에서 서로 다른 이유로 싱글을 선택한 동미와 나난은 함께 크리스마스를 맞는다.

#나쁜 여자를 노래하는 나쁜 여자


사진/ 자기의 삶과 몸을 적극적으로 사랑하는 방법으로 <마스터베이션>을 노래하는 가수 지현. (김종수 기자)


“자기를 소중히 여기는 여자를 나쁜 여자라고들 하죠. 그렇다면 나는 나쁜 여자고, 나쁜 여자가 많아지길 바라면서 노래를 불러요.”

강렬한 눈빛과 짧은 머리(삭발한 머리를 기르는 중이다)의 가수 지현. 정말 제대로 된 나쁜 여자를 만났다는 느낌이다. ‘안심’이다. 97년 여성밴드 ‘마고’에서 활동하다 ‘페미니스트 가수’를 선언하며 솔로로 나선 그녀는 지난해 여름 첫 음반 <후>(逅·만나다)를 냈다. 하지만 자리에 앉자마자 ‘악녀’의 이미지는 온데간데없어졌다. “어, 휴대폰 줄 좀 봐도 돼요 야~ 베티부다. 나 베티부 정말 좋아하는데.”

이렇게 귀여운 여자가 어떻게 나쁜 여자가 되었는가. “우리 엄마는 다른 엄마들과 달리 자기가 존중받아야 한다는 원칙이 분명했어요. 내가 엄마 물건을 갖고 싶다고 하면 ‘그래 하지만 나에게 필요하거든. 너도 돈 생기면 사도록 해라’ 이런 식이었죠. 어려서 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만약 엄마가 ‘난 너밖에 없다’는 식으로 절 대했다면 정말 힘들었을 거예요. 엄마가 자기 삶을 즐길 줄 알았기 때문에 나 또한 내 삶을 사랑하고 스스로 지켜야 한다는 걸 일찍부터 깨달았죠.”

스스로를 사랑해야 한다는 그의 원칙은 마스터베이션 옹호론으로 거침없이 흐른다. 직접 작사·작곡하고 연주한 노래 <마스터베이션>은 이때의 황홀경을 아름다운 가사와 멜로디로 풀어놓았다. “내 손끝이/ 내 온몸을/ 부드럽게/ 따스하게/ 내 온몸에/ 숨어 있는 /내 기쁨을/ 내 환희를/ 붉어지는/ 내 입술을/ 부드럽게/ 촉촉하게/ 내 뜨거운/ 내 숨결은/ 쏟아지는 내 욕망은” 노랫말 중간중간 ‘아아~ 아아~’ 하며 후렴구가 쏟아진다. 그는 “마스터베이션에 관심 있는 여자라면 응당 자기의 몸과 즐거움을 소중히 여긴다. 파트너와의 관계에서 자기가 바라는 것을 정확하고 구체적으로 설명해주기 위해서라도 마스터베이션을 잘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고 힘주어 말했다.

#나쁜 여자는 행복하다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잡지광고 영업현장을 뛰고 있는 최아무개(30) 팀장이 ‘나쁜 여자’가 된 것은 ‘착한 딸’이기를 포기하면서부터였다. 그는 “질척이는 관계는 싫다”고 말한다. 대학에서 임상병리학을 공부한 그는 6개월 동안 병원에서 일하다 명예퇴직한 친구 아버지의 퇴직금을 밑천 삼아 친구와 제과점을 차렸다. “2년 동안 쏠쏠히 벌었죠. 그 돈으로 집에서 독립할 수 있었고.” 그가 집에서 나오기로 결심한 건 그를 “걱정하고 근심하는 것으로 여생을 보내기로 작심한 듯한 부모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갱년기를 맞아 우울증을 겪는 어머니는 사사건건 제게 기대셨어요. 50살 조금 넘은 어머니가 앞으로 30년쯤 더 산다고 할 때, 앞으로 우리가 함께 살아갈 날이 까마득해보였죠.” 그는 아이가 젖을 떼듯 어머니로부터 정을 떼는 것이 낫다고 여겼고 지금도 그 판단이 옳았다고 믿는다. 어머니는 이제 그를 위로 상대에서 의논 상대로 여긴다. 다투지 않으니 친밀감도 높아졌다.

4년 전 제과점 일을 접고 평소 좋아하는 잡지사에 들어올 때도 그는 자신이 바라는 대로 행동했다. 동업하던 친구가 매달렸지만 그를 막을 수 없었다. “나쁜 여자가 되려면 지금의 좋은 관계를 계속 유지하겠다는 욕심을 버려야 해요. 판을 깨거나 망가뜨릴 수 있다는 걸 감수해야죠.” 하지만 아무리 나쁜 그라도 냉정하고 야박하다는 평가가 두렵지는 않을까. “그럴 때면 나는 시간에서 지지 않는다는 다짐을 합니다. 잠시 나쁜 여자가 되더라도 이건 ‘지금’뿐인 거죠. 나중엔 내가 진짜 누구인지 드러날 거예요.” 그는 ‘나쁜 여자가 행복하다’고 믿는다. “다른 사람이 날 좋아하려면, 난 매력적인 사람이어야 해요. 매력적이려면 스스로 즐겁고 행복한 사람이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역시 나빠질 수밖에 없어요. ”

#일터에서의 나쁜 여자들

대기업에서 일하는 한아무개(32)씨는 동호회 회장을 맡는 등 사내에서 적극적인 인간관계를 맺고 있다. 하지만 그는 조직 안에서 인정을 받아 승진하는 데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잘라 말한다. “충성심 깊은 사원들은 비서 업무와도 같은 일에 목매달고 있다. 조직구조로 볼 때 승진의 기회는 너무나 제한적이다. 차라리 40살 때까지 회사에 다니면서 업무와 관련한 공부를 하겠다. 그 뒤로는 다른 곳으로 튈 생각이다.”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기 때문에 조직 안 논리를 무시하거나 거스를 용기도 생겨나고, 불합리한 처사에 ‘이기는 싸움’을 하기도 한다. 금융회사에 근무하는 정아무개(33)씨는 입사 2년 만에 회사에서 언론에 소개시키려할만큼 화려한 이력을 쌓기 시작했다. 하지만 과장이 여직원들을 상대로 업무시간엔 모욕 주고, 술자리에선 희롱하는 행동에 대해선 속이 부글부글 끓어도 속수무책이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어느 날, 문제의 과장을 층계참으로 불러냈다. 커피 한잔 하자며 상냥하게 구는 그에게 과장이 경계심이 있을 리 없었다. 단 둘만이란 것을 확인한 정씨는 호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과장님, 불 있어요” 과장이 당황해서 불을 붙여주자 과장의 얼굴에 연기를 훅 뿜었다. “애가 둘인가 있죠 돈 많이 벌어야겠네. 그런데 과장님, 어쩌죠 과장님 때문에 회사 관두고 싶은 여자들이 많은데요. 한마디로 X같거든요.” 잠시 이 대목에서 과장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런데 내가 회사 혼자 그만둘 것 같니” 그는 하얗게 질린 과장의 어깨를 탁탁 치면서 “잘해”라는 말을 남겨두고 돌아섰다.

일주일 남짓 ‘나쁜 여자’를 찾아헤맨 취재 행각은 막을 내렸다. 주위 사람들이 ‘나쁜 여자’라고 공인해주었건만, 막상 인터뷰를 하고 나면 그들은 전혀 나빠 보이지 않았다. 여자가 튀면 살아남기 힘들다. 또는 성공하더라도 사랑받기 힘들다 이 시나리오는 거짓말이었거나, 적어도 이제는 시효가 다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은 밝고 건강하고 행복해보였다. 언젠가 취재 중에 만난 나쁜 여자들을 모두 한자리에 모아놓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들은 신기해할 것이다. ‘우리가 어딘가 닮기는 닮았는데…’ 하면서.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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