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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섹션 : 특별기획 등록 2002.11.07(목) 제433호

[특별기획] 오등은 발의 해방을 선언하노라

딱딱한 정장화는 이제 신물 난다… 디자인도 기능도 다양한 패션 캐주얼화 열풍

“고삐리냐”

정부부처 산하기관에 근무하는 안아무개(31)씨는 얼마 전 운동화를 신고 출근했다가 동료들에게 ‘한 소리’ 들었다. 그는 최근 각광받는 패션 운동화를 신고 갔다. 지난해부터 건강을 생각해 틈나는 대로 걷기 시작한 안씨는 출퇴근길에 딱딱한 정장화를 벗어던졌다. 캐주얼화를 주로 신지만 운동화를 신는 날도 많다. 발이 편해 좋고, 멋스러워 신난다. 신용카드 광고에 나오는 정우성처럼 ‘능력 있는’ 남자도 아닐뿐더러 10대 청소년처럼 운동화로 스타일을 겨루는 나이도 아닌 그에게 동료들은 핀잔 섞인 코멘트를 날리건만, 안씨는 꿋꿋하다. 그의 주장은 이렇다. “타인의 눈길보다 중요한 것은 내 발의 자유!”

패션의 시작과 끝

발 해방족들. 딱딱한 신사·숙녀화를 벗어던지고 굽 낮은 캐주얼화나 편한 운동화로 ‘발갈이’를 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복장 엄숙주의 탈피 분위기는 신발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안씨 역시 “고삐리냐”는 동료들의 핀잔 속에 ‘호기심’과 ‘부러움’이 공존하고 있다고 느낀다. 게다가 아롱다롱 빛깔과 천차만별 디자인에 꼭 필요한 기능성이 가미된 신발들이 쏟아져나오며 패션의 시작과 끝을 신발에서 찾는 것은 익숙한 풍경이 됐다. 굽 낮고 쿠션 좋은 신발들은 날렵한 걸음걸이를 보장해주고 신체 오장육부의 축소판이라는 발 건강에도 보탬이 된다.

경기도 고양시에 사는 김아무개(31)씨는 최근 굽 높은 신발을 벗어던졌다. 다리가 짧고 굵다는 콤플렉스가 있는 김씨는 늘 7cm 이상의 통굽구두를 고집했다. 그러나 구두굽에서 오는 피곤함이 쌓이고 건강에도 적신호가 울리는 느낌이 들었다. 최근 오랜만에 백화점 구두매장을 찾은 김씨는 매대 전면에 나와 있는 수많은 단화들을 보았다. 순간 김씨의 머리에 떠오른 생각. “그래, 다른 여자들도 그동안 괴로웠던 거야! 난 혼자가 아니야!” 여성화 코너에 진열된 낮은 굽 신발들을 보고 “하이힐 벗어던지는 여성들과의 연대”를 떠올린 김씨의 생각은 분명 과장된 것이지만, 그동안 높은 굽 신발로 인한 스트레스가 그만큼 컸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김씨는 3cm 정도 높이에 밑창이 편한 자주색 가죽신발을 하나 골랐다. 가격은 부담됐지만 “그동안 혹사한 발에 대해 처음으로 예의를 갖췄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포츠 브랜드들이 다양한 디자인과 기능을 살린 운동화를 내놓는다면, 기존의 제화 브랜드에서는 퓨전·액티브 등의 꼬리말을 붙여 운동화처럼 편한 캐주얼화를 내놓았다. 두 흐름이 ‘딱 만난’ 게 스니커즈(sneakers)라 불리는 패션 단화들이다. 스니커즈는 원래 ‘살금살금 걷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고무창 덕분에 발소리가 나지 않는 신발에 붙여진 이름이다. 오랫동안 나이키·아디다스 등 다국적 스포츠 브랜드에서 출시한 기능성 운동화를 일컫는 말로 쓰였지만 어느덧 활동성이 보장된 멋쟁이 단화를 통칭하는 일반명사가 됐다. 연간 1조원이 넘는 국내 스포츠 시장에서 패션 스니커즈의 점유율은 20%에 이른다. 여기에 제화업체들이 가세해 패션화 시장은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우들스 신발기획팀의 김영만 차장은 “신발의 디자인과 기능성이 ‘젊어’지는 것은 세계적 추세다. 국내의 패션 스니커즈 시장은 넌바운더리, 즉 디자인과 특성, 소비층의 연령을 구분하지 않는 포괄적인 카테고리를 형성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신발에 죽고 사는 스니커즈 마니아

스니커즈 마니아층은 두껍다. 스니커즈가 좋아 하나둘씩 수집하다 아예 온라인 판매회사(www.realshoes.co.kr)까지 차린 대학생 박지선(22)씨도 마니아 가운데 한명이다. 우리보다 일찍 스포츠와 패션이 궁합을 이뤄 캐주얼 포털패션의 흐름을 바꾼 일본은 4∼5년 전부터 스니커즈 마니아들이 유력한 소비군으로 떠올랐고, 40∼50켤레 이상 갖고 있는 이들도 많다. 이런 추세는 한국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99년께부터 스니커즈 마니아가 생긴 이래 스니커즈와 스니커즈로 상징되는 ‘쿨한 패션’은 10∼20대의 트렌드로 자리잡았다. 박씨는 “아직까지 나이키나 아디다스 등 다국적 스포츠 브랜드가 스니커즈 시장을 독점했지만, 한국의 업계들이 뛰어들어 기능과 디자인 경쟁을 하고 있다. 선택의 폭이 점점 넓어졌다”고 풀이한다.

마니아층이 넓어지다 보니 운동화에도 명품이 생겼다. 일명 ‘올드 스쿨’이라는 나이키의 포스와 코르테즈, 아이다스의 슈퍼스타, 리복의 클래식 등은 말 그대로 수십년 동안 꾸준히 스테디셀러로 인기를 끌고 있다. 생산 연도에 따라 희소성이 다르고 값도 다르다. 명품에 얽힌 사연들도 가지가지다. 나이키 에어포스 시리즈 가운데 일명 ‘검완창’이라는 신발은 가끔 ‘모 년 모 일 모 처에서 전설의 검완창을 봤다’는 글이 동호인 사이트에 오르면 난리가 날 정도로 희소성이 높다. 일명 ‘빨완창’이라는 신발 역시 가수 서태지가 1집 때 신고 나와 서태지 완창으로도 불린다. 스니커즈 열풍의 원조인 미국에서는 조던 시리즈가 인기가 높다. 17까지 나온 시리즈 가운데 가장 인기가 높은 것은 조던1로 2001년 다시 나왔을 때 미국에서는 한 사람당 두 켤레 이상 팔지 않을 정도였다. 1972년 생산된 이래 색상을 바꿔가는 코르테즈는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 톰 행크스가 미국을 횡단할 때 신은 것으로 한국 연예인들이 가장 애호하는 모델이라고 한다.

한국은 불과 몇년 사이에 다국적 스포츠 브랜드의 하청 생산국에서 주요 소비국으로 변모했다. 입을 열면 줄줄 스니커즈에 얽힌 얘기를 쏟아내는 박지선씨는 “30대에서도 스니커즈 마니아들이 많다. 그만큼 대중화됐다는 얘기다. 국내 스니커즈 잠재시장은 엄청나다”고 강조한다.

톡톡 튀는 개성과 깊이 있는 정보를 자랑하는 스니커즈 전문 개인 사이트들도 인기를 끌고 있다. 스니커컬렉션(www.sneakercollection.pe.kr)을 운영하는 고재혁(31·웹디자이너)씨 역시 “신발에 죽고, 신발에 사는” 스니커즈 마니아다. 고씨의 사이트는 새 상품이 출시되면 곧바로 디자인과 색상을 비교하는 라이브폴을 붙인다. 수천명 이상이 즉각 참여하는 탓에 업계에서도 주력상품을 결정하기 전에 의뢰를 해올 정도다.

패션화는 밑창이 중요

운동화는 운동화대로 정장화는 정장화대로 주력상품의 지대를 캐주얼화로 넓혀가고 있는 중에 아직 ‘신발 변신’을 하지 못한 이들은 잠재적 소비군에 머물러 있다. ‘호주머니 사정’보다는 ‘문화적 사정’이 더 큰 이유다. 올해 42살인 윤아무개씨. 한 대기업 계열사에서 일하는 윤씨는 자타가 공인하는 멋쟁이다. 넥타이 대신 스카프로 와이셔츠 대신 목티로 정장바지 대신 청바지로 이미지를 관리하지만, 신발 영역에서 그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는 정장풍 캐주얼화였다. 10대에 진입하면서 운동화에 열을 올리는 딸아이 손을 잡고 쇼핑하러 간 10월 초의 어느 날, 윤씨는 과감한 선택을 했다. 색상이 단순한 스니커즈를 하나 고른 것이다. 직장에는 감히 신고 나가지 못하지만 주말 모임 등에는 틈나는 대로 신고 다닌다. 윤씨는 “신발이 편하고 멋있어 걸을 때 기분이 좋고, 그러다 보니 자꾸 걷게 되고, 덩달아 뉴욕의 여피라도 된 듯 뿌듯한 기분이 든다”고 말한다. 윤씨는 자신의 사연을 한 인터넷 사이트에 올렸다. 그 뒤 익명의 네티즌들로부터 메일을 받고 있다. “아저씨, 짱이야!”라는 가벼운 지지부터 “아저씨들이 답답한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무거운 격려까지 다양하다. 윤씨는 “넥타이나 와이셔츠보다 더 큰 결단이 필요한 것은 신발”이라고 말한다.

패션화들이 기존 구두와 가장 크게 다른 점은 밑창이다. 과거의 소비자들이 가격->디자인->밑창의 순으로 신발을 선택했다면, 최근에는 밑창->디자인->가격의 순으로 바뀌었다. 이런 흐름 속에서 국내 제화업계는 밑창의 기능성과 착용감에 주목한 신발들을 내놓고 있다. 에스콰이어는 신사화 매장에 기존 정장화(드레스 코드)와 캐주얼화(캐주얼 코드) 사이에 퓨전화라 이름 붙인 상품들을 배치했다. 운동화처럼 편안하면서도 정장화처럼 보이는 구두들이다. 기존의 고무 밑창보다는 우레탄 등 다양한 소재를 사용한 몰드창을 재질로 한 것이 눈에 많이 띈다. 디자인도 제각각이다. 축구화나 골프화처럼 미끄럼 방지를 위한 핀들이 돌출된 것에서 선이 촘촘하게 패어 탄력을 유지하며 안정감을 주는 것까지 다양하다. 장단점도 다르다. 그렇다면 어떤 밑창을 골라야 할까 에스콰이어 상품기획실 홍석원 디자이너는 “고무 밑창은 좀 무겁지만 튼튼하고 발을 잘 받쳐주는 느낌을 주고, 몰드창은 가볍고 마모가 적고 탄력이 좋다. 내근을 주로 하는 분들은 고무 밑창도 상관없지만 많이 걷는 분들에게는 몰드창을 권한다”고 설명한다.

남성화 전체 매출의 30%를 차지할 정도로 남성 패션 캐주얼화는 자리를 잡았지만 ‘한국적 코드’로 불리는 높은 굽 여성화 시장은 드레스 코드가 여전히 주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굽 높이는 점차 낮아지는 추세다. 페라가모 등 해외 명품 브랜드들이 앞다퉈 단화를 내놓아 소비자를 자극한 가운데 유럽의 의류 브랜드에서도 한정 디자인의 단화를 내놓으며 속속 한국으로 입점하고 있어 국내 업계들은 바짝 긴장하고 있다.

가격의 양극화 현장 도드라져

시장의 흐름 속에 가장 도드라지는 현상은 “가격의 양극화”다. 에스콰이어 상품기획실 김찬균 대리는 “사회 전체적으로 소비 양극화가 강화되는데다, 동남아 등지에서 생산되는 제품들과 가격 경쟁력이 맞지 않아 중가 신발들은 거의 사라지는 추세”라고 설명한다. 남성 패션화의 가격 수준은 최소 15만원 이상으로 올라 있다. 그런데도 청바지나 정장에도 응용할 수 있고, 자유롭고 세련된 분위기가 난다는 이유로 소비량은 해마다 5∼10%씩 증가하고 있다.

패션화 시대를 연 스니커즈 시장은 올 여름까지 UFO에서 갓 빠져나온 듯한 기상천외한 디자인과 금속성 색상으로 빅뱅을 했다. 올 겨울 추세는 화려한 장식이 빠진 기본 모델에 공기, 통풍, 키높이, 신발끈 보호, 미끄럼 방지 등 다양한 기능이 가미된 것들이다. 한국나이키는 “11월에 내놓은 새 상품은 젖은 노면이나 눈에 강한 것으로 신발끈 보호용 커버가 있는 게 특징이다. 항목별로 기능성은 강화시키되 디자인은 80∼90년대 유행한 기본 모델, 즉 깔끔하게 두 가지 색깔로 조화를 이룬 상품을 내놓고 있다”고 소개한다. 소비군의 연령이 높아져 실용적인 흐름이 커진 탓이 있고, 질리지 않으면서 편안한 신발이 최고라는 고전적 견해를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편하고 멋스러운 신발을 고르는 에너지는 궁극적으로 편하고 멋스러운 삶에 대한 욕망이다. 물론 그런 삶은 누가 봐주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편하게’ 신고 ‘편해 보이게’ 신는 것은 동전의 양면 같다. 올 가을, 예쁜 단화 바람은 어느 쪽에 더 가까울까.

글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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