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별기획 ] 2002년10월30일 제432호 

5천만의 굶주림, 그리고 룰라

신자유주의와 불평등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상파울루에서 룰라의 희망을 얘기하는 사람들


사진/ "새로운 브라질을 향하여!" 선거가 끝나고 룰라의 승리를 자축하는 리우데자이네루 시민들.


상파울루로 들어가는 관문인 과룰루스 국제공항에 내려 택시를 타고 시원스레 뚫린 대로를 타고 달리다 보면 1년6개월 전에 생긴 거대한 쇼핑센터와 마주치게 된다. 몇년 전만 해도 그곳엔 4천명의 노동자가 일하는 타자기 생산공장이 서 있었다. 쇼핑센터 너머엔 호나우두를 꿈꾸는 깡마른 흑인 소년들이 흙먼지를 일으키고 있는 황량한 공터를 중심으로 거대한 판자촌이 들어서 있다. 지난해 초 상파울루에서 밀려난 실업자들과 상파울루에 애당초 진입할 수도 없었던 집 없는 서민들은 에우칼립토 나무들이 우거진 이곳을 점거했다. 이들은 교육위원회를 만들어 어린이를 비롯해 청장년 문맹들을 가르치고 있으며, 의료위원회에서 외부 지원을 받아 무료로 환자들에게 의약품을 제공하고 있다.

“룰라는 우리를 쫓아내지 않을 거야”

“룰라는 우리를 쫓아내지 않을 거예요!” 노동자당의 붉은 별이 새겨진 포스터가 붙어 있는 판잣집 앞에서 메이리(36)는 기대를 숨기지 않는다. 가장 가난한 동북부 세아라주의 농촌에서 태어나 10대 초반 상파울루주로 이주한 그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통조림공장에서 일하는 어엿한 노동자였다. 초라할망정 생애 처음으로 자기 집을 얻은 그는 기쁨을 숨기지 못한다. 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 아들과 함께 초등학교에 다니며 공부를 시작한 그는 파울루 프레이리의 민중교육 이상을 실천하는 교육위원회의 열성 멤버로 이곳에서 문맹퇴치 사업을 벌이고 있다.

그곳을 떠나 상파울루의 월스트리트 파울리스타 거리로 들어서면 좌우로 도열한 마천루들의 웅장한 위용과 만나게 된다. 이곳은 시티은행·보스턴은행을 비롯한 미국계 은행은 물론이고 스페인계 다국적 은행들과 브라질 은행들의 고층건물들이 늘어서 있다. 건물 외벽 곳곳엔 대형 광고판과 전광판들이 수시로 옷을 갈아입으며 행인들의 시신경을 자극한다. 그 앞에서 만난 이타우은행 직원 미리암(37)은 자신이 모 지점의 관리부장이라는 사실과 집권당 후보인 주제 세하에게 투표했다는 사실만을 알린 채 “우리 은행의 간부들은 정치문제와 관련한 인터뷰에 일체 응할 수 없다”고 전하며 총총히 사라진다.

그곳에서 상파울루 남부의 한적한 주택가로 들어서면 보랏빛 하카란다 봄꽃이 활짝 핀 거리 왼편에서 룰라 선거운동본부 건물을 만나게 된다. “인간적인 브라질을 원한다.” 이윤에 따라 삶과 사람의 가치가 정해지는 냉정한 세상에 도전하는 듯한 구호가 담긴 건물 입구는 늘 지지자들과 기자들로 붐빈다. 1차 투표가 끝난 뒤 이곳을 찾아 선거운동 담당자를 기다리고 있는 아르만도(60)는 “노동자당은 전 세계에서 가난한 민중들이 건설한 유일한 정당”이라며 이번에는 정말로 이긴다는 확신으로 찾아오게 되었다고 전한다.

이탈리아계 이민자인 그는 67년 아르헨티나에서 군부와 좌파가 충돌했을 때 칠레·미국을 거쳐 이탈리아로 갔다가 80년대에 브라질의 미래가 창창하다는 소리를 듣고 브라질에 정착했다. 선박기술자였던 그는 이젠 실업자 신세다. 89년 룰라 후보의 당선을 위해 선거캠페인에 참여했지만 실패를 맛보고 지난 10년간 좌절의 시간을 보내다가 1차 투표 결과를 본 뒤 선거운동에 참여하기로 작심했다. 노동자당의 붉은 별이 새겨진 배지를 달고 유대인을 상징하는 다윗왕의 별 목걸이를 하고 있는 그는 “제 아버지가 파시즘에 맞서 싸웠듯이 우린 신자유주의에 맞서 싸우고 있지요”라며 웃는다.

강도 때문에 헬리콥터로 출근


사진/ 룰라가 투표를 하러 가기 전 승리를 다짐하며 어린이들과 포즈를 취하고 있다. (AFP 연합)


방향을 시 서쪽으로 돌려 커다란 호수와 우거진 숲을 자랑하는 이비라푸에라 공원과 하늘 높이 솟아오른 고급 호텔촌을 지나면 ‘모룸비’라는 지역이 나온다. 그곳엔 낮에는 차량통행이 드문 한적한 고급 주택가가 있다. 담쟁이넝쿨이 내부를 푸르게 가려주는 대저택의 담장엔 도둑고양이 한 마리 얼씬거리지 못하게 고압의 전류가 흐르며, 담장을 따라 주야로 무장 사설경비원이 순찰을 돈다.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삶은 늘 국제 언론의 관심거리다. 스페인의 저명 일간 <엘파이스>의 최신 보도엔 자동차 부품 판매회사 사장 조제 루이스 산 마르틴(45)의 이야기가 실렸다. 그는 아침마다 경호원에 둘러싸여 헬리콥터로 출근한다. 하루 약 300만대의 차가 오가는 상파울루 시내의 교통체증도 문제지만 무엇보다 몇년 사이 악화된 치안사정은 결국 한대당 많게는 200만달러를 호가하는 헬리콥터로 출근하도록 결심하게 만들었다. 상파울루시와 위성도시를 아우르는 상파울루주에선 한달에 1천명의 시민들이 살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여섯대의 차를 수시로 갈아타며 13살짜리 아들에겐 아침마다 경호원 없이 집 밖에 나서서는 안 된다고 주의를 준다. “디에고, 네가 흑인 꼬마면 아무 걱정이 없단다. 그러나 넌 푸른 눈에 금발머리를 가진 아이야.” 이렇게 만반의 조치를 취했지만 그는 세번씩이나 강도를 만났다. 사정이 이러니 99.9%의 회사가 한달에 약 4천달러를 오직 안전을 위해 쓰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루이스 산 마르틴이 전하는 치안 악화의 이유는 빈곤이다. 그가 아침마다 헬리콥터 속에서 내려다보는 상파울루시에는 무려 1800개의 빈민가가 있다. 이 빈민가들은 부촌과는 정반대편인 시 동남부 외곽에 자리잡고 있다. 대규모 공장 건물이 즐비한 잿빛 지대, 굳게 문을 닫아건 공장이 태반인 공단지역 옆 고가도로 밑에 자리잡은 파라과이 빈민촌. 룰라가 태어난 페르남부쿠에서 상파울루로 이주해 6개월 전까지 건설현장에서 일용직 노동자로 일하던 프란시스코 소사(32)는 집세를 감당할 수 없어 쓰레기통을 뒤져 찾아낸 합판으로 고가도로 밑에 집을 세웠다. 이들 대부분은 읽고 쓸 줄 모르는 문맹으로 전입신고조차 하지 않은 채 살고 있는 농촌 이민자들이다. 그러나 투표를 할 수 있다면 룰라에게 표를 던지겠다고 말한다.

상파울루시를 빠져나가면 위성도시들인 상투안드레·상베르나르두·상카이타노 등 한국의 울산에 해당하는 대규모 산업도시들과 만나게 된다. 이곳은 브라질에서 가장 산업화한 지구로 도요타·메르세데스벤츠·포드·폴크스바겐·제너럴모터스 등 세계 굴지의 자동차공장이 다 집결해 있다. 이곳의 엘리베이터 생산공장에서 선반공으로 일하던 금속노동자 룰라는 70년대 말 독재정권에 맞서는 민주주의 운동의 기폭제였던 노동자 투쟁을 이끌었다.

신자유주의 8년 동안 폭등한 실업률


사진/ 노동자당 지지자들이 트럭을 탄 채 대통령궁을 지나 달리고 있다. 룰라는 60%가 넘는 득표율을 얻었다. (AFP 연합)


“금속노동자의 50%가 직업을 잃었어요.” 이 세 산업도시를 아우르는 금속노조의 조직위원장 타르시시오 세콜리는 8년에 걸친 카르도수의 신자유주의 정책이 노동자들의 삶에 미친 파괴적인 결과를 전한다. “실업자들 가운데 일부는 청소·요리·사설경비 등 금속분야의 일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분야에서 일하게 되었지요. 예전보다 일은 많아지고 임금은 더 낮아졌어요.” 수많은 브라질 기업들이 높은 금리와 세금으로 파산하거나 국제자본에 인수됐다. 세계 굴지의 자동차 회사들은 50%의 노동자들을 정리해고했다. 이로 인해 8년 전 약 9%이던 실업률이 20%까지 급상승했다. 그러니 실업자들과 노동자들이 룰라 후보를 지지하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이것이 1700만명이 거주하는 메갈로폴리스 상파울루의 풍경이다. 이 풍경은 오늘날 브라질의 맨얼굴을 잘 보여준다. 뉴욕보다 더 헬리콥터 교통체증이 심하다는 상파울루 하늘 아래로 펼쳐진 마천루들과 대규모 쇼핑몰에선 부유층 자제들이 경호원의 호위를 받으며 쇼핑을 즐긴다. 같은 하늘 아래 사는 빈민가의 흑인 청소년들에게 학교는 아무런 비전을 제시해주지 못한다. 그들은 거리에 나서 ‘번개납치’라 불리는 범죄를 저지른다. 인질을 끌고 다니며 은행에서 돈을 인출한 뒤 잽싸게 사라지는 아마추어들의 범죄행각이다. 아예 코카인 거래로 큰돈을 만지는 범죄조직에 가담해 무기를 들기도 한다. 지난 8년간 무려 640만명이 빈민으로 전락해 이제 브라질의 빈민인구는 5300만명을 헤아린다.

농촌 또한 살풍경이긴 마찬가지다. 1년에 1억t의 곡식을 생산하는 농촌은 오직 농촌인구의 25%에만 일자리를 제공한다. “브라질은 지구 표면적의 14%를 차지하고 있어요. 그러나 이곳에서 생산되는 것은 비참함 그 자체입니다.” 땅 없는 이들의 운동(MST)을 이끄는 주앙 페드로 스테질레는 거침없이 말한다.

룰라는 선거캠페인 내내 이렇게 외쳤다. “여기 저와 함께 있는 민중들이 원하는 것은 일할 수 있는 권리, 주택을 얻을 수 있는 권리, 공부할 수 있는 권리, 문화와 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권리입니다. 브라질에 이 이상을 원하는 민중은 없습니다. 브라질엔 민중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외면하는 정부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면서 사회주의를 포기한다는 좌파의 비판에 대해선 “노동자당은 사회주의를 도입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이들에게 유토피아는 공정하고 평등한 사회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것은 장기적인 전망입니다. 다른 이들에겐 유토피아는 처음 먹어보는 강낭콩 한 접시이며, 처음 갖는 일자리이며, 처음 받아보는 진료이며, 처음으로 가보는 학교입니다”라고 답했다.

그러나 그의 설득과 항변에도 룰라에 대한 젊은이들의 비판은 거침없다. 브라질 최대의 학생조직인 전국학생연합(UNE)의 국립 및 주립학교 위원회를 맡고 있는 안데르손(23)은 “좌파의 단결엔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지만 우파와의 연합은 반대했다“며 자신은 노동자당 내의 좌파라고 말한다. “지금은 선거로 인해 잠시 잠복해 있지만 선거 뒤에 이 문제는 반드시 폭발할 것”이라고 노동자당 내부의 기류를 전한다.

외부의 비판은 더 거침없다. 주류 언론에 맞서는 독립 미디어 건설을 위해 활동하는 파블로(24)는 “노동자당은 우경화됐다”고 진단한다. 지난 9월7일 브라질 전역에서 1천만명의 시민이 참가한 가운데 민중투표가 열렸다. 이 투표는 미주자유무역협정에 대한 의견과 브라질 북부에 자리잡은 알칸타라 지역을 미국의 군기지로 무상 제공하는 것에 대한 의견을 묻는 행사였다. 이 행사의 주최자 가운데 하나인 노동자당은 마지막 순간에 질문이 너무 단순하다는 핑계로 행사에서 철수했다. 파블로는 “노동자당이 미국의 눈치를 보는 것”이라고 강력하게 비판한다. 그는 또한 건강한 사회주의자들이었던 노동자당 내부의 수평적인 문화가 수직적이며 중앙집권적인 형태로 바뀌었다고 비판한다. 또한 그는 상투안드레시의 노동자당 출신 시장이 살해당했는데 이것이 지구당 내의 부패와 관련이 있다는 소문이 무성하다며 청렴하고 윤리적인 사회주의자들의 모습이 변해가고 있다고 전한다. 그런 그이지만 룰라가 당선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다를 바 없었다.

브라질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실업과 빈곤으로 인한 삶의 위기, 국가위험도의 급상승과 헤알화의 급락이 보여주는 경제적 위기 속에서 변화를 염원하는 브라질 민중을 대표하며 드디어 룰라 정부가 출범한다. 기대와 비판, 우려 속에서 최초로 등장한 노동자 출신 사회주의자가 이끌 브라질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아래엔 경제위기로 하루에 100명의 아이들이 죽는 아르헨티나가 있다. 위론 48년간 내전으로 초토화한 콜롬비아와 지금도 시민들이 차베스파와 반차베스파로 극단적으로 나뉘어 충돌하고 있는 베네수엘라가 있다.

선반공 출신 대통령 앞엔 영화 <정복자 펠레>의 마지막 장면처럼 너른 구릉 바다가 가없이 펼쳐져 있다. 오직 한 가지 사실만이 분명하다. 그곳을 가로지르며 전진해갈 새 정부의 미래는 그의 손이 아니라 브라질 민중의 참여에 달려 있다는 사실이다.

상파울루=글·사진 박정훈 전문위원 jhpark2001@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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