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별기획 ] 2002년03월13일 제400호 

녹슬지 않은 크래커 천적

  • 위폐감별사 서태석 외환은행 외환부 차장
  • 제복을 사랑한 당찬 여장부
  • 머리에 접착제를 발랐나
  • 불꽃놀이는 내게 맡겨라!
  • 여의도 맏형, 신화를 만든다
  • 전쟁을 꿈꾸는 ‘폭파의 제왕’
  • 때묻은 소품, 추억의 실록
  • 녹슬지 않은 크래커 천적

    고수열전 - 사이버보안관 윤정경 사이버테러대응센터 연구관


    사진/ "사이버 세상의 무법자. 게 섰거라!" 원조 사이버캅으로 불리는 윤정경 연구관. (김종수 기자)


    윤정경(66) 연구관의 기억력은 비상했다. “97년 8월4일 경찰청 수사국에 컴퓨터범죄수사대가 창설됐습니다. 외사관리관 아래의 해커수사대가 증편된 것이지요. 98년 12월23일엔 사이버범죄수사대로 이름이 바뀌고 99년 7월10일엔 사이버테러대응센터가 됩니다.” 그가 일하는 경찰청 사이버테러대응센터의 역사만이 아니다. 경찰에 언제 컴퓨터가 도입됐으며, 이를 이용한 조직개편이 어떻게 이뤄졌는지 30년이 넘는 역사를 날짜까지 막힘없이 기억해냈다. “주변에서 보고서 쓰다가 자꾸 역사에 관해 물어옵니다.”

    줄줄 이어지는 기억력의 향연을 지켜보노라니 처음 품었던 의혹이 차츰 풀려간다. ‘저렇게 머리 허연 분이 크래커(악성 해커)를 잡는다고?’

    국내 1호 크래커 검거의 주역

    윤씨는 국내 최초의 사이버보안관이자 경찰 내 크래킹 문제의 손꼽히는 전문가다. 95년 8월 한국통신의 코넷 시스템을 말끔히 지워버린 국내 1호 크래커 검거의 주역이기도 했다. 당시 안기부와 검찰, 한국통신이 함께 참가한 첫 번째 관계기관 대책회의에서 그는 부산에 살던 용의자의 이름과 ID, 주민등록번호 등을 모두 밝혀내 관계자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경찰에 검거된 해커는 알고보니 박사논문 통과를 앞두고 있던 대학강사였다. 윤씨는 “해킹 문제는 처벌보다는 선도와 보호 위주로 가야 한다고 판단해 그 사람의 인적사항을 공개하지 않고 향후 사회활동에 큰 타격이 없도록 노력했다”며 “지금도 그건 우리 원칙”이라고 말했다.

    그가 사이버보안관으로 활동한 지도 8년째다. 94년 6월30일 그는 경위로 경찰을 퇴직했다. 서울대 법대 졸업과 동시에 경찰에 투신한 지 32년 만이었다. 그러나 퇴직한 날 집으로 가는 대신, 촉탁 계약직으로 같은 자리에 앉아 근무를 계속했다. 당시 경찰청 내 해킹 문제 전담부서이던 외사국에서도 그는 컴퓨터에 관한 한 독보적인 존재였다. 외사국이 90년 중앙관서 가운데 처음으로 근거리통신망(LAN)을 도입한 것도 그의 건의를 따른 것이다. 인터폴의 요청을 받아 94년 유럽 암연구센터 해킹과 95년 프랑스 남프랑스대학 수학연구소 해킹사건도 그가 직접 수사했다. 당시 경찰 안에선 “그깟 암센터나 수학연구소 갖고 왜 난리냐”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는 독특한 추리를 제시해 수사 결정을 이끌어냈다. “암센터는 거물급 인사들의 생사 예측이 가능한 곳이고, 수학연구소는 국방암호 개발과 관련된 곳일 것이라고 의견을 냈더니, 그제서야 상부에서 수사에 착수하라고 하더군요. 수사결과 한국이 세계 해커들의 주요 경유지이자 무방비의 놀이터라는 것이 드러나고 경각심이 커졌지요.”

    그도 지난 98년부터는 수사 일선에서 손을 뗐다. 대신 정보통신윤리와 정보보호시스템 연구에 힘을 쏟고 있다. “특히 PC의 복구시스템 개발에 주력하고 있어요. 비자금이나 괴문서 등을 작성했다 지워버린 컴퓨터의 정보를 완전히 복구하는 기술로, 컴퓨터 수사에는 필수적입니다.” 그는 “재작년 언론문건 사건 때 사용됐던 문아무개 기자의 노트북도 내게 가져왔으면 모두 해결했을 것”이라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그 든든한 자부심을 뒷받침하는 것은 요즘도 매일 밤 11시에야 퇴근하는 일중독이다. 경찰 입문 이래 계속돼온 중증이다. 그 때문일까. 그는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다. “온갖 아이디어가 자꾸 떠오릅니다. 그걸 풀어내느라 다른 일은 별로 신경쓸 겨를이 없네요.”

    손원제 기자 won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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