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함부르크의 한 전철역 구내 잡지 가판대. 수많은 잡지들 속에서 <슈피겔>의 이름은 독일을 넘어 유럽을 대표하는 지적 상징으로 자리잡아왔다.

“나는 <슈피겔>(Der Spiegel)을 본다.”

벽면 중앙에 걸린 유리액자는 그렇게 암시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은근한 과시’처럼 보였다. 베를린 중심가에 위치한 어느 중견 변호사의 사무실. 55년 전 태어난 <슈피겔> 창간호 표지가 액자에 끼워진 채 잔뜩 폼을 잡고 있었다. 이제 고객들은 이 변호사의 성향과 지적 수준을 가늠할 하나의 잣대를 발견했다고 판단할 것이다. 변호사 역시 그 점을 노린 것은 물론이다.

독일사회 비판적 지성의 상징

사진/ 함부르크 브란트슈티비테 거리의 슈피겔 그룹 본부. 오른쪽 건물엔 편집국이 들어서 있고 맨 왼쪽 건물엔 광고·영업부서가 있다.

독일에서 <슈피겔>을 본다는 것은 단순히 시사주간지 하나를 읽는다는 것 이상을 넘어선다. 독일사회에서 <슈피겔>은 비판적 지성의 상징이자, 그 본래의 뜻처럼 독일 민주주의를 비쳐온 ‘거울’로 인식돼왔다. 그러나 단지 ‘비판정신’만으로 독자들의 각별한 자부심을 설명할 수는 없다. 독일 시사주간지 시장에서 <슈피겔>의 평균 판매량은 103만1721부로 109만4673부인 <슈테른>(Stern)에 조금 뒤진다(94∼2000년, IVW 통계). 그럼에도 독일은 물론이고 유럽 전체에서 <타임>이나 <뉴스위크>에 대적할 만한 정보력과 영향력을 가진 시사주간지가 <슈피겔>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 매체 파워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독일 제2의 도시 함부르크에 있는 ‘슈피겔 그룹’ 본부를 찾아가 보았다.

먼저 독일의 시사주간지 시장을 한국과 단순 비교하는 건 여러모로 곤란하다는 걸 밝히고 시작하자. 가령 이런 것이다. <슈피겔> 정치부의 신참 여기자 율리아 코흐(Julia Koch·29)에게 “한주에 얼마나 기사를 쓰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조용히 웃기만 했다. 그리고 “그런 질문이 어디 있느냐”며 의아해했다. 늘 1∼2주 안에 해치우듯 기사를 써야 한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 매주 발행되는 270쪽(2000년 기준 본문 142쪽, 광고 118쪽)의 잡지를 위해 국내외에 배치된 기자 수만 해도 270명, 전체 직원은 1천여명에 이른다. 브란트슈티비테 거리에 위치한 여러 채의 사옥은 어림잡아 한겨레신문사의 세배는 돼 보였다. <슈피겔>은 ‘거인’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기자는 ‘슈피겔 사람들’과 만나면서 궁금증을 풀어보았다.

만프레드 에르텔(Manfred Ertel·51). 20년 경력의 외신부 유럽담당 팀장. 한국인 남자아이를 입양해 키우고 있어서인지 한국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특별했다. 그의 방엔 남한 지도도 붙어 있었다. 생면부지의 한국인 기자에게 “아침식사를 함께 하고 싶다”고 청한 것도 그런 친밀감과 무관해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직접 본 것만 쓴다”

사진/ <슈피겔>의 사람들. 최고령 기자 프리초프 마이어와 외신부 팀장 만프레드 에르텔, 자료팀장인 하우케 얀센, 정치부 기자 카렌 안드레젠, 레이아웃팀장 라이너 젠네발트(왼쪽부터)

“우리는 직접 본 것 또는 직접 들은 것만 쓴다.” 그는 해외 사무소 이야기부터 꺼냈다. <슈피겔>은 현재 뉴욕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까지 23개국에 특파원 사무소를 두고 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모든 특파원들이 주재 국가의 언어를 능숙하게 구사하지만 절대로 그 나라 신문기사만을 인용해서 쓰는 것은 용납하지 않는다. 외국 신문은 단순히 참고자료일 뿐이다. 외국통신사가 제공하는 이른바 ‘와이어 서비스’(Wire Service)도 무시한다. “우리가 가장 많이 쓰는 돈은 해외 취재비다. 여기에 대해선 추호의 망설임도 없다. 해당 국가의 영향력 있는 인사를 직접 접촉해 취재해야 한다는 것은 제1의 계명이다.”

이런 원칙은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전쟁 때도 지켜졌다. <슈피겔>은 당시 12명의 기자를 현장에 파견했다. 한 팀은 파키스탄을 통해, 또 한 팀은 우즈베키스탄을 통해, 마지막 한 팀은 이란을 통해 아프가니스탄으로의 돌파를 시도했다. 4주 동안 기자 한 사람에게 들어간 비용이 4만달러. 그는 “당시 라바니 대통령 인터뷰 등 다수의 특종이 <슈피겔>에서 나왔다”고 말했다.

프리초프 마이어(Fritjof Meyer·69). 슈피겔에서만 36년간 일한 최고의 베테랑이자 최고령 기자로서 현재 외신부 팀장 중 한명이다. 공산주의와 동유럽의 전문가로서 그동안 1200개의 기사를 썼고 120개의 커버스토리를 쓴 그의 이력은 <슈피겔> 안에서도 전설로 통한다. 76년 중국 마오쩌둥이 죽었을 때 덩샤오핑의 복권을 예견했고, 88년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가 한창일 때 고르바초프를 단독 인터뷰했다. 지금도 고르바초프와 안부를 주고받는 친구 사이다. 그런 그가 요즘 또 하나의 특집기사를 준비하고 있다. 3월 중순 기사화될 이 기사의 제목은 ‘누가 히틀러를 쏘았는가’. 정설처럼 굳어진 자살설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근거는 그가 찾아낸 스탈린 시대의 소련 문서. 히틀러의 최측근 심복이 쏘았다는 주장을 제기할 작정이다.

외신부 기자 16명 중 9명이 고졸

사진/ 자료팀의 원고 검증. 사실관계와 기본 통계는 물론, 취재원의 신뢰성, 분석의 타당성등이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꼼꼼하게 체크돼 있다.

그는 마치 손자들에게 옛날 이야기를 해주는 할아버지 같았다. “뭐든지 물어보라”면서 <슈피겔>의 다양한 면모에 관해 자상히 들려주었다. 그 중에서 인상적인 것은 ‘기자들의 학력’에 관한 것이었다. “난 대학을 4곳이나 나왔다. 아마 <슈피겔> 안에서는 가장 가방끈이 길 것이다. 그러나 36년 동안 아무도 나의 학력을 물어보지 않았다.” <슈피겔>을 포함한 독일 언론사회에서 ‘대졸’은 결코 기자의 필수조건이 아니었다. 발행인인 루돌프 아우구슈타인(Rudolf Augstein·78)도 대학을 안 나왔다. 편집국장인 슈테판 아우스트(Stefan Aust·55)도 고졸이다. “외신부 기자 16명 중 대졸은 7명뿐”이라고 했다. 한국과 같은 ‘수습공채’ 제도도 없다. 기사 잘 쓰는 경력기자를 스카우트하는 것, 또는 그런 기자의 자발적인 입사요청을 검증하는 일이 인력을 충원하는 주요한 시스템이다. 그는 “사건의 배경을 깊이있고 끈질기게 추적할 수 있는 열정과 글솜씨가 기자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면서 “여기에 학력은 아무런 참고사항이 안 된다”고 덧붙였다(물론 독일 고교의 졸업시험인 ‘아비투어’를 한국의 고교졸업과 단순 비교하기는 힘든 면이 있다).

하우케 얀센(Hauke Janssen·43). 10년 경력에 경제학 박사 출신의 자료팀장. 그야말로 이번 취재과정에서 가장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인물이다. 앞서 만난 만프레드 에르텔과 프리초프 마이어가 <슈피겔>의 가장 큰 장점으로 ‘자료팀’을 꼽았기 때문이다. 하우케 얀센 역시 “우리 자료팀이야말로 세계언론사에서 유례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120명이 일하고 있지만, 인력의 규모는 별로 의미있는 대목이 아니다. 2500만개의 기사자료를 데이터베이스화하고 있다거나 400만개의 사진자료와 40만명의 인물파일을 갖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를 통해 기사작성을 위한 방대한 조사자료가 지원되고 있다는 것도 결정적인 사항은 아니다.

<슈피겔>엔 두개의 기사마감이 있다. 목요일 밤에 끝나는 취재기사의 마감, 그리고 금요일 밤에 끝나는 ‘기사검증’의 마감. 목요일의 주역이 편집국 기자들이라면, 금요일 밤의 주인공은 자료팀의 ‘검증 전문가’들이다. 상당수가 박사학위 출신인 70여명의 ‘검증 전문가’들은 편집국의 정치·경제·외신부처럼 영역이 전문화돼 있다. 이들은 기자들이 쓴 기사의 팩트(Fact)가 올바른지, 통계는 정확한지, 취재원은 믿을 만한 인물인지, 분석은 타당한지 등을 단어 하나하나부터 현미경을 들이대듯 철두철미하게 검증한다. 50년대부터 가동된 시스템이다.

87년에 일어난 불미스럽고 드라마틱했던 사건은 자료팀의 위상을 더욱 공고하게 만들었다. 한 주지사의 독직사건 폭로기사에 대해 자료팀의 ‘검증 전문가’들은 정보제공자가 신뢰성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기사화하지 말 것을 제안한다. 하지만 이는 묵살되었고 결국 사건의 당사자는 결백을 주장하며 호텔에서 자살하는 파국을 맞는다. “독일 정치인들은 <슈피겔>이 발행되는 월요일 아침을 두려워한다. 자신의 나쁜 짓이 들통날까봐서다. <슈피겔>에 났다 하면 그것은 사실이 돼버리는 경향이 있다. 거짓말조차 믿어버린다. 어떻게 거기에 책임이 안 따를 수 있겠는가.” 하우케 얀센의 말이다.

<슈피겔> 최고의 자랑, 자료팀

편집국 기자와 자료팀의 의견이 부딪칠 경우 최종결정권은 편집국에 있다. 그러나 자료팀의 제안은 모두 기록으로 남는다. 때문에 잘못된 보도에 대해서는 기자가 책임을 져야 한다. <슈테른>에서 9년 동안 일하다 89년 이곳으로 옮겨왔다는 정치부의 노장 여기자 카렌 안데르젠(Karen Andresen·56)은 “처음엔 자료팀의 기사검증 작업이 번거롭고 불편하게 느껴진 적도 있었다”면서 “지금은 그들이 있기에 참으로 든든하다”고 말했다. 자료팀은 정말 <슈피겔> 구성원 모두의 자랑처럼 보였다.

물론 든든한 건 또 있다. 레이아웃 팀장 라이너 젠네발트(Rainer Sennewald·49)는 5명의 별도 인원으로 독립된 표지 디자인팀(편집장 1명, 그래픽 3명, 사진 1명)의 위력을 강조했다. 독자전략팀의 마티아스 슈몰츠(Matthias Schmolz·38)는 “독자를 위해서라면, 그가 단 한명의 독자라 하여도 자료집까지 만들어준다”며 열성적인 독자서비스의 내용들을 들려주었다.

하지만 내부의 비판도 없지 않다. “너무 비대한 권력이 됐다. 행정부와 입법부, 사법부, 언론의 힘이 균형을 이뤄야 하는데 지금은 언론이 제일 힘이 세다. 이것은 정상이 아니다.”(프리초프 마이어) “9·11 사건 이후 세계경제가 침체하면서 광고가 격감하고 책이 얇아지고 있다. 이런 상황을 벗어나려는 듯 <슈피겔>도 차츰 흥미 위주로 가고 있는 듯하다.”(카렌 안드레젠)

여기에 더해, 예전보다 사회민주주의적인 내용의 기사가 덜해지고 우경화되고 있다거나, 한반도 문제에 관한 한 일본의 시각에 경도돼 있다는 외부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슈피겔>의 정체성이 흔들리는 게 아니냐는 의심인 것이다. 때문에 지난해 아프가니스탄 전쟁 때도 ‘미국’에 대한 입장 정리가 수월하지 않았다고 한다. <슈피겔>의 신화가 21세기에도 이어질 것인지 계속 지켜볼 일이다.

함부르크=글·사진 고경태 기자 k21@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