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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짧은 만남, 그 서글픈 이별 기약없는 헤어져 눈물을 삼키는 상봉자들… 꿈이라면 깨고 싶지 않았던 감동의 순간들
‘한국의 슈바이처’ 고(故) 장기려 박사의 둘째아들인 장가용 서울대 의대(64·해부학) 교수. 상봉 이틀 뒤인 8월20일 여전히 그는 “내 생애에 이런 꿈이 또 있나 싶다”고 말했다. 아직도 감격적인 그날의 만남에서 헤어나질 못하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어느덧 헤어져버린 이 막막한 망연자실의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일까. 그러나 그는 알고 있다. 꿈같은 나날이었건만, 분명 꿈은 아니란 걸. 지금도 눈에 잡힐 듯한 3박4일간의 바람 같은 나날. 기억하면 기억할수록 감미롭게 젖어오는 그날의 순간. 어찌 꿈인들 이렇게 생생하랴, 어찌 꿈인들 이렇게 감격적일 수 있으랴. 그래서 그는 만남의 행복에 아직도 어쩔 줄 몰라하면서도 어쩌면 만나기 이전보다 지금 더 아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50년의 응어리를 씻어낸 감격이었지만…
더없는 기쁨이었다. 가슴속에 켜켜이 쌓여 온 응어리, 그 이별의 한을 순식간에 녹여내는 감격 그 자체였다. 하지만 만남은 전신을 에는 또 하나의 아픔이기도 했다. 이틀 동안 합해서 단지 3시간30분. 그야말로 짧은 만남, 그리고 긴 이별이었다. 언제 또다시 어머니를 만날 수 있을까. “그나마 이번 만남을 통해 어머니의 맑고 투명한 피부를 보고, 자그마나 위안을 찾았습니다. 그동안 하얗고 까만 흑백사진으로만 어머니를 봤는데, 이번에 어머니의 아직도 고운 얼굴빛을 보고 어머니가 앞으로 몇년은 더, 적어도 올해는 충분히 넘기실 수 있는 것 같아 맘이 놓였습니다.” 그렇지만 의과대학 교수인 그 또한 만남의 후유증에 몸살을 앓고 있는 듯했다. 알레르기라며 코를 훌쩍이는 그의 몸짓 속에는 안타까움이 절절이 배어 있었다. “북에서 돌아오자마자 여기저기 언론에 끌려다니느라 정신없는 나날이었지만 아직도 멍합니다. 시간이 어째 정지해버린 느낌이고요. 가기 전에도 그랬죠. 만남의 설렘에 변비를 겪었는데 혼났습니다.” 장 교수는 “지금은 들뜬 상태라 그렇지만 이렇게 며칠 지나고, 또 한달이 되면 또 자연스레 일상으로 돌아가지 않겠냐”고 담담하게 웃었다. 50년의 기다림, 짧은 만남, 그리고 기약없는 헤어짐…. 그리던 혈육을 만나고 지금 각자의 자리로 되돌아온 8·15이산가족들은 지금 모두 또다른 아픔을 겪고 있다. 50년 만에 만난 피붙이들과 상봉하던 그 날의 감격이 너무나 컸던 탓일까. 많은 상봉 이산가족들은 응어리진 한을 풀었다는 행복감에 젖어든 한편 더 깊은 그리움과 허탈감으로 깊은 후유증을 앓고 있다. “온 가족이 너무 마음고생이 심했다. 힘들고 지쳤다. 당장 어쩌겠냐. 좀 쉬면 모두 나아지지 않겠나 싶어요.” 지난 50년 대전중학교 6학년 때 소리소문 없이 사라진 형 양한상(69)씨를 만난 양한종(63)씨는 길게 말을 잇지 못했다. 노환으로 거동이 불편한 어머니 김애란(88)씨가 끝내 북에서 온 한상씨를 못 보는 것 아닌가 노심초사하며 애를 태우다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가까스로 깜짝 상봉을 했지만 서글픔이 온 가족을 짓누르고 있기 때문이다.
꿈에 그리던 아들을 다시 만날 건가
양씨 부부는 노모를 달래기 위해 대한적십자사에서 건네준 상봉장면을 담은 비디오테이프를 계속 틀어댔다. 병상에 누은 늙은 어머니는 텔레비전 화면에 눈을 고정시킨 채 아무말 없이 그저 눈물만 뚝뚝 떨구었다. 이씨는 “이웃사람들은 ‘시어머니가 꿈에도 그리던 맏아들을 만났으니 얼마나 기쁘냐’고 말하지만 “우린 정말 마음에 상처가 많이 남았다. 어머니와 아주버님을 한번 만나게 하려고 그 고생을 했는데, 또 떨어져 다시 볼 기회가 없으니…”라며 허탈해 했다. “다시 만날 날이 있을 거라고들 말 하지만, 그것은 서로 슬픔을 달래고 위안하자는 것일 뿐 가능성이 없잖아요?” 20일 오전, 서울시 은평구 불광동 정선화(94)씨의 집. 서울법대 2학년 때 학교에 간다며 집을 나선 아들 조진용(69)를 만난 정씨는 집에 없었다. 이산가족 상봉 뒤 어머니의 건강을 걱정하느라 북으로 돌아간 동생 진용씨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을 숨기고 있는 형 조진수(75)씨의 회한만이 섞여나오고 있었다. 어머니 정씨는 지난 8월15일 서울 코엑스 상봉장에서 50년 동안 꿈에 그리던 아들 진용씨의 얼굴을 본 뒤 실신했고, 17일 쉐라톤워커힐 호텔에서도 병상에 누워 그 아들을 맞았기 때문에 “행여 잘못될까” 걱정이 앞서는 것이다. 그는 어머니와 동생과의 상봉 과정에서 겪은 이야기들로 자신의 최근 심경을 드러냈다. “동생 진용이를 다시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어머님께 숨기기 위해 북으로 돌아가는 날에는 아예 어머니를 모시지 않았어요. 형제들끼리 몰래 배웅하고 절대 진용이가 돌아갔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기로 가족끼리 약속까지 했지요. 그런데 어머니가 어디서 들으셨는지 어제부터 ‘진용이를 또다시 만날 수 있겠느냐’고 물으며 계속 우시는 겁니다…. 앞으로가 걱정입니다.” 조진수씨는 자꾸 눈에 밟히는 아우 진용씨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며 안타까운 바람을 내비쳤다. “동생이 아주 담담하게 버스에 올라 타더라고. 전날 워커힐에서 어머님과 식사를 할 때 또 쓰러질지 모르니 모시고 나가지 않겠다고 했거든. 그런데 이 녀석이 자리에 앉자마자 마구 눈물을 떨구는 거야. 버스 창문에 손가락으로 ‘어머니, 어머니’를 쓰면서…. 기회만 준다면 내일이라도 당장 동생을 만나러 북한으로 달려가고 싶어.”
기회만 주어진다면 내일이라도 당장…
지난 70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큰형 진만씨마저 79년에 숨지자 동생 진용씨도 죽은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하고 명절 차례상에 진용씨의 이름을 올리기 시작했다. 꼬박 22년 동안 명복을 빌었던 동생이 살아온 소식을 접하고 몰려든 고향 친구들이 지금 그에게는 무엇보다 큰 위안이 된다고 한다. 50여년간 꿈에도 그리던 남편 김희영(72)씨를 만난 정춘자(72·경기도 이천시 울면)씨는 거의 앓아 누운 상태다. 만나는 순간에는 의외로 담담하고 씩씩했지만 그뒤로는 전화도 안 받아 가족들이 걱정하고 있다. 정씨는 경기도 이천에서 혼자 살고 있다. 외아들 김상교씨 역시 “안 만난 거만 못하다”고 가슴 아파하고 있다. 가족들은 두 사람 모두 너무 가슴에 맺힌 한이 많아서 그런 것 같다고 한다. 8년간 갖은 고생을 하며 외아들을 기르던 정씨는 재가했다. 아들을 데려갈 수 없는 조건이었다. 홀로 있던 어머니마저 재가해 혼자서 갖은 고생을 하며 자란 아들 김씨는 김씨대로, 재가한 시댁 식구들과 전처들의 온갖 구박 속에 살았던 정씨는 정씨대로 가슴에 진 응어리가 많다. 북한의 김희영씨는 해방되던 해 충북 중원군 능암면에서 17살 동갑내기 정춘자씨와 혼례를 올린 뒤 외아들 김상교씨를 낳고 5년간 단란하게 살았다. 그러다 전쟁 직전인 50년 6월 초 일자리를 구한다며 서울로 갔다가 소식이 두절됐다.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는 외아들이 연락이 없자 홧병으로 차례로 숨졌다. 김희영씨는 애초 부모님과 외아들 상교, 누이 김옥동과 조카 명순을 찾는다고 알려왔다. 정씨는 반가움보다는 당혹감이 앞섰고, 남편이 자기를 찾지 않아 차라리 다행이라고 여길 정도였다. 남편 김희영씨는 동갑내기 부인 정씨에게 “나도 재가했다. 당신 고생한 거 안다. 다 이해한다”고 말했다. 또 아들에게는 “네가 이렇게 건강하게 살아 있어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아들은 아버지 앞에서는 애써 울음을 감추다, 집에 돌아와서 부인을 붙잡고 통곡했다. “홀로 너무 고생을 많이 하고 살아와서, 아버지 오면 안 만나려고 했다. 원망이 많았다. 막상 뵙고나니 아버지가 반갑고 좋았다. 잠이라도 같이 자면서 이야기했다면 좋았으련만…. 아버지는 어머니보다 내 걱정이 더 많으셨던 것 같다. 거지처럼 지낼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아서 고맙다고 자꾸 말씀하셨다. 나중에 통일되면 꼭 우리가 모시고 살자, 그때 좋은 진지 지어드리고 좋은 잠자리 봐드리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살자”는 말을 부인에게 반복했다. 아들 상교씨는 아버지와 헤어진 다음날인 19일, 채 감정 정리가 되지 않아 우울한 가슴을 안고 일터가 있는 강원도 홍천으로 떠났다. 죽은 줄만 알았던 오빠 김어후씨가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고 휠체어에 아픈 몸을 기댄 채 의사도 말리는 방북길에 올랐던 김금자(69)씨에게도 방북은 더 큰 시름을 안겨줬다. 오빠가 돌아가셨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고 발길을 돌려야 했기 때문이다. 8월20일 오전 11시20분. 서울 강동구 둔촌동 집에서 만난 그는 쓸쓸하게 “이제 이것으로 (기다림을) 끝맺고 싶다”고 말했다. “이렇게 오빠를 못 만날 줄 알았으면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격하게 울먹였던 지난 나흘 동안의 힘겨운 기억을 이제 그만 털어버리고 싶다는 것이다. “오빠가 살아계시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도 “돌아가셨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마음이 편하다”고 답했다. 그러나 모든 것을 깨끗이 접지는 못했다. 옆에 앉아 있던 맏아들 신중민씨가 “우리가 함께 갈 수 있게 돼도 안 가실 거예요?”라고 묻자 “그럼 가야지”라고 되뇌었다. 마음을 다잡기 위해 “다음에는 안 간다”고 했지만 아직 미련을 모두 잘라 내지는 못한 것이다. 더구나 돌아올 때 누군가 “오빠가 살아 있다”고 귀띔을 했다며 심란스러워했다. 그는 “21일에는 다시 입원할 병원을 서둘러 알아봐야 한다”고 말했다. 20년 전 교통사고로 다친 무릎 탓에 허리까지 불편하고, 오빠를 만나지 못한 슬픔 때문에 마음의 고통도 크기 때문이란다. “지난 밤에도 겨우 약 기운을 빌려 잠들 수 있었다”고 말하는 가족들의 마음도 찹찹하기만 하다. 아들 신씨는 “워낙 몸이 안 좋아 어머니는 원래 안 가시겠다고 했는데…”라며 “이번에 안 가시면 한이 되실 것 같아 저희가 등 떠밀 듯 보냈는데 이렇게 되니 더욱 가슴 아프다”고 말했다.
노구를 이끌고 다시 생업전선에 나서다
그는 묻지도 않는 말을 이어갔다. “북쪽은 55살이 넘으면 연금을 준대요. 식량도 배급해 주고….” 딸에게서 전해 들은 얘기를 통해 고단하고 곤궁하게 이어온 남쪽 생활에 대한 원망을 언뜻 비쳤다. 그리고 이내 북쪽에 남겨둔 부인 김씨와 딸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어김없이 눈가에 슬픔이 번졌다. “그 곱던 마누라 얼굴이 쭈글쭈글해졌어…. 딸이 ‘가지 말고, 같이 살자고’ 그러더라구.” “거기 가서 살고 싶냐”는 질문을 던졌다. 한참 뜸을 들인 그는 “사실 반반이지 뭐. 가족들 때문에 가서 살고 싶기도 하지만 워낙 이쪽 생활에 익숙해져서 여기가 더 편하기도 하고…”라고 답했다. “가서 살고 싶다고 해도 그게 되나…. 평생 못 볼 줄 알았던 가족들이 잘살고 있는 걸 확인했으니 한시름 놓일 뿐이야.” 하지만 모든 이산가족들이 이렇듯 허탈과 상실감으로 어쩔 줄 몰라하고 있는 건 아니다. 되레 가족상봉의 소원을 풀고 나서 가족간의 더욱더 깊은 우애가 생겼거나 혹은 몸과 마음이 매우 상쾌해졌다는 이들도 있다. 50년 만에 북쪽에서 찾아온 아들 임재혁(66)씨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해 이를 지켜보던 국민들을 안타깝게 했던 임휘경(90)씨. 그러나 남쪽에 남은 그의 가족들은 재혁(66)씨가 남겨준 아름다운 흔적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헤어진 가족을 항상 만날 그날을 기다리며…
8·15이산가족 상봉은 왜 남과 북이 화해해야 하는지, 왜 남과 북의 이산가족 문제 해결이 그 무엇보다 중요한지 보여주고도 남음이 있었다. 이번 상봉은 동시에 상봉 그 자체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건 지속적인 상봉과 상시 만남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하는 일이란 것도 보여주었다. 만남이 더 큰 슬픔이란 역설이 더이상 적용되지 않도록.
김소희 기자sohee@hani.co.kr 신윤동욱 기자s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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