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미군 재배치 · 감축 문제는 ‘생물’과 같다.” 주한미군 정책을 다루는 한국 정부의 한 핵심 관계자는 최근 ‘결정’은 없는데, 설익은 ‘논의’만 무성한 현실에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까놓고’ 얘기하면 주한미군의 재배치 혹은 감축 문제는 너무나 가변적이고 유동적이라 어느 누구도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다고 말했다. 다만 지금은 원칙이 서 있고, 그 원칙에 대해 어떻게 부작용을 최소화하면서 실천에 옮기느냐가 숙제라는 얘기도 덧붙였다. 한-미 당국이 주한미군의 한강 이남 재배치와 관련해 이해가 일치하고 있는 대목은 이렇다. 미국은 중장기적으로 전국에 배치된 미군을 통폐합함으로써 한강 이북 미군의 안전선 확보와 운영 유지비의 절감을 도모할 수 있고, 한국 입장에서는 국민 불편과 반미감정의 해소, 효율적 국토 이용에 보탬이 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양국의 이해관계는 맞아떨어지고, 주한미군의 재배치 이행도 시간 문제로 보인다.

사진/ 주한미군의 재배치는 미국 내 정치적 지지도 뒷받침돼야 한다. 럼즈펠드 국방장관이 미 상원의원들을 상대로 열심히 설명하고 있다.(GAMMA)

유지비 절감 · 불편 해소, 원칙은 일치

하지만 원칙을 넘어 각론에 들어가면 사정은 달라진다. 우선 양국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충돌하는 장면이 목격된다. 당장 용산기지 이전 문제가 그렇다. 미국은 오래 전부터 대부분의 한강 이북 미군 부대를 이남으로 옮기더라도 용산의 핵심 지휘부는 잔류하기를 강하게 희망해왔다. 문제는 용산기지 81만평 가운데 노른자위 땅 28만평을 계속 사용하게 해달라는 데 있다. 이는 무엇보다 서울 시민의 불편과 반미감정의 해소에 기여할 수 없다는 측면에서 원칙에도 배치된다. 한국 국방부는 애초 한미연합사령부와 유엔군사령부 이전 협상을 연말까지 매듭지을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견을 좁히기가 녹록지 않아 조기 타결은 어려워 보인다.

한국 내 여론이나 정치적 상황도 변수다. 김용갑 한나라당 의원 등 여야를 막론하고 국회의원 147명이 미국쪽 요구대로 28만평을 제공하고, 주한미군사령부 이전을 반대하는 내용의 국회 결의안 채택을 추진하고 있다. 주요 보수언론에서는 사설 등을 통해 주한미군 전체의 한강 이남 배치를 극구 반대하는 논조를 펴고 있다. 일부 보수적 학자들이나 전문가 등은 외곽에서 반대 논리를 제공하고, 워싱턴 정부 관계자나 싱크탱크 관계자들을 만나 한국민의 대다수는 주한미군의 한강 이남 재배치를 반대한다며 ‘재고’를 촉구하고 있다. 워싱턴 부시 행정부가 보기에는 용산 미군기지를 비롯한 주한미군의 재배치를 노무현 정부를 빼고는 다들 반대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한 정황들이다. 이런 국내 정치인이나 여론 동향에 대한 미 정부 관계자들의 반응은 한마디로 “당혹스럽다”였다.

노무현 정부는 주한미군을 한강 이남으로 다 옮겨도 좋다고 분명히 밝혔으나, 정치인이나 여론이 반대하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처함의 일단을 숨기지 않는다. 물론 가장 좋기는 자신들이 요구한 용산 미군기지터 일부를 그대로 사용하고 나머지는 계획대로 옮기는 방안이다. 친미 성향의 사람들을 어느 정도 다독거리면서 자신들의 안보 및 경제적 잇속도 챙길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가 영 호락호락하지가 않다. 그렇다고 모두 옮겨가자니 지휘부 이전에 따른 지휘부의 불편함과 한국 사회에 폭넓게 형성되어 있는 미국 우호세력들의 실망과 이반이 꺼림칙하다. 더구나 지금은 북핵 위기가 가라앉기는커녕 더욱 고조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뒤로 빠지면 오해를 받기 십상이다.

커트 캠벨 전 국방부 차관보는 최근 <포린어페어>에 기고한 글에서 급변하는 주변환경 변화에 따른 주한미군 재배치의 불가피성은 인정하면서도, “북한의 위협이 감소하지 않고, 최근에 와서는 아마도 증대했을 수 있는 상황에서 재배치는 적절한 시점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재배치가 북한의 도발에 대한 군사적 효율을 높일 수도 있지만, 이 지역에서는 설득력이 거의 없다”고 잘라 말했다. 한국에서 미국에 대한 증오의 증가, 일본에서도 미국의 안보공약에 대한 우려의 증가, 그리고 이 지역 전체를 통해서는 미국에 대한 불안의 증가가 될 수 있다는 게 그의 분석이다. 그러면서 그는 “재배치가 실행되더라도 정교하게, 그리고 천천히 실행되어야 하며, 그 지역의 인식과 우려를 면밀히 살피면서 실행에 옮겨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군사전략적 고민만으로 풀리지 않는 사안

사실 부시 행정부가 중장기적으로 주한미군의 감축까지 염두에 두고 있음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하지만 이들은 감축이라는 단어만 나오면 펄쩍 뛴다. ‘지금으로서’는 그럴 계획이 없다고 단호하게 반박한다. 아직까지 병력의 감축은 바로 미국의 대한국이나 대일본 안보공약의 후퇴로 해석되고 있기 때문이다.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 등 미 정부 관계자들이 입만 열면 재배치가 안보공약을 약화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강화하는 조처라고 강조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들은 섣부른 감축이나 재배치가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을 태울지도 모른다’고 우려하는 전문가들의 견해만은 귀담아듣고 있다.

결국 주한미군 재배치는 군사전략적 고려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지극히 정치적인 문제인 셈이다. 설령 한-미간에 재배치와 관련한 주요 결정들이 합의된다 해도 실제 이행 과정에서 무수한 암초를 만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북핵 위기는 접어두고라도 총선, 대선 등 한-미 양국의 국내 정치 일정과 정치적 역학관계의 변화 등도 주한미군 재배치 논의의 방향을 뒤흔들 수 있는 요인으로 꼽힌다.

갈수록 혼미상태에 빠져드는 이라크 전후 처리도 변수다. 일각에서는 이라크 수렁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 미군이 재배치를 더 서두를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지만, 부시 행정부는 해외주둔 미군 재배치가 전 세계적 차원에서 추진하는 일이라 이라크 전후 상황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분명하게 선을 긋고 있다.

당장은 주한미군 재배치를 반대하는 한나라당이 지배하는 한국의 국회에서 용산기지 이전안이 통과될 수 있을지가 회의적이다. 용산기지 이전은 정식으로 정부간 협정을 맺어야 하며, 이는 국회 동의가 뒷받침돼야 한다. 헌법은 국민에 재정적 부담을 지우거나 국가안보에 영향을 미치는 사안은 국회 동의를 받도록 규정하고 있다. 재배치 결정은 물론 이행과정에서도 국내 정치적 이해관계가 적잖은 영향을 미치게 되는 셈이다. 30억달러(3조6천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는 이전 비용의 조달도 만만치 않은 과제다. 한강 이북의 주한미군이 새로 둥지를 틀 새로운 부지의 마련과 현지 주민들의 설득 작업도 넘어야 할 큰 산이다. 이런저런 사정을 고려하면 재배치 원칙의 합의와 실제 이행까지의 거리는 꽤나 먼 셈이다.

미국 내에서도 청문회 등으로 상당한 논쟁이 불거질 것으로 예상된다. 아직은 원칙만 제시된 상태라 잠잠하지만 정부 차원에서 구체적인 주한미군 재배치 혹은 감축 청사진이 제시되면 의회에서 지루한 논란이 벌어질 가능성이 크다. 지난 카터 행정부 시절 주한미군의 철군 결정이 나왔을 때는 군부가 반발했고, 관료들도 냉담했다. 의회는 반기를 들고 나섰으며, 한국이나 일본 등 우방국들은 미국의 방위공약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또한 북한도 혼란에 빠졌다. 미국 여론은 카터의 정책결정과정을 차갑게 지켜보았다. 특정 정권의 의욕이나 결정만으로 주한미군의 재배치나 감축이 쉽지 않음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물론 탈냉전과 9·11 테러 이후의 미 국내 정치 지형은 크게 달라졌다. 미군의 안전과 비용절감을 최우선 과제로 인식하고 있는 이들이 주한미군의 재배치나 감축을 카터 행정부 때처럼 격렬하게 반대하지는 않으리라 예상된다.

이행과정 무수한 암초… 장기 숙원사업 되나

부시 행정부의 재배치 결정에 대해 아직은 모두들 관망하고 있는 분위기다. 하지만 한 가지 원칙은 일치하고 있다. 월리엄 코언 전 국방장관이 지적했듯이 ‘허둥지둥 결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캠벨 전 국방 차관보는 “부시 행정부가 군사적 현상의 거의 모든 측면을 일종의 빅뱅 방식으로 바꾸고자 제안하고 있으나 이는 대담하고 겁 없는 제안”이라고 이미 우려를 표시한 바 있다. 기존 긴밀한 동맹과 안보적 유대를 해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신중하게 추진해야 한다는 조언들이다. 부시 행정부 인사들도 해외미군 재편은 앞으로 몇년이 걸릴 수 있다고 인정한다.

한국도 주한미군의 재배치 및 감축을 대세로 인정하면서, 실제 이행과정에서 불거질 수 있는 무수한 변수들을 염두에 넣고 장기전에 대비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임을출 기자 chu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