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집 ] 2003년11월12일 제484호 

평준화 무너져라 할렐루야

‘명문고’ 출신 기득권층 · 경제학자 · 보수언론들의 ‘평준화 폐지’ 합창

“시골쥐가 서울쥐 흉내를 내기는….”

11월6일 오전 철제 셔터가 내려진 서울시청 정문 앞에서 항의방문을 온 한 전교조 관계자가 혼자 중얼거렸다. 이명박 시장은 11월3일 “전교조가 교육 평준화 정책을 고집하며 교육부총리에게 압력을 넣고 있다. 문은 세계로 열려 있는데 우리끼리 평준화해서는 안 된다” “부실 교육의 핵심은 교육을 책임진 사람들이 모두 시골 출신이라는 데 있다. 교육부총리는 대구 출신인데 시골 중학교 교사를 하다 대학교수하고 무슨 협회장 거쳐서 부총리까지 올라왔다. 이런 사람들은 서울의 교육 실정을 모른다”는 이야기를 했다.


사진/ 비평준화 시절 명문고의 상징이었던 경기고 정문. 치열한 입시경쟁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평준화 정책에 부정적이다.(류우종 기자)



“평준화로 꼴통학교 됐다”

이명박 시장은 고려대 경영학과를 나와 현대건설 사장 등을 지냈지만 서울 출신은 아니다. 그는 지금은 포항시가 된 경북 영일군 출신으로 포항 동지상업고등학교(야간)를 졸업했다. 전교조 관계자가 이 시장을 ‘서울쥐와 시골쥐’ 동화에 빗대 꼬집은 것이다.

이 시장의 ‘시골 출신’ 소동도 평준화 폐지를 강조하다 나온 돌출 발언이었다. 이 시장은 강남에 비해 처진 강북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고교 평준화를 없애야 한다는 소신을 여러 차례 밝혔다. 이명박 서울시장은 10월30일 한 라디오 인터뷰에서 “강북을 다시 살리려면 10개 정도의 새로운 자립형 사립고나 특목고 정도는 두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했다.

서울과 지방의 이른바 옛 ‘명문고’ 출신 기득권층은 평준화에 대해 대체로 부정적이다. 이명박 시장처럼 지방에서 올라와 서울에서 대기업 간부, 언론인, 법조인 등으로 자리를 잡은 사람들은 평준화가 더욱 마땅찮다.

영남 출신인 이아무개(38)씨가 나온 고등학교는 지방의 ‘신흥명문’ 고교다. 대학 진학 실적만 놓고 보면 서울 8학군의 학교와도 맞먹는다. 그런데 3년 전 평준화가 되면서 선배들은 ‘꼴통학교’가 됐다고 원성이 높다. 11월5일 수능시험 직후에 모인 이씨 고교 선후배 모임에서 자연스럽게 평준화 이야기가 나왔다.

“‘후배들은 전교 10등을 해도 서울대를 못 간다고 한다’ ‘이런 애들을 우리 학교 후배로 인정해야 하느냐’ ‘가진 것 없는 촌놈들을 바보 만들려는 서울놈들의 술책이다’ 등 험한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어요. 그 자리에서 평준화를 옹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죠. 모임 참석자들은 우리 사회에서 여론 주도층으로 꼽히는 사람들인데 평준화에 대한 적개심이 대단했어요.”

이런 식의 이야기는 비평준화 당시 ‘명문고’를 나온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자주 들을 수 있다. 중학교 때부터 치열한 입시 경쟁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자신의 특수한 경험을 일반화하기 쉽다.

김천기 전북대 교수(교육학)는 “사회 보수집단은 인재양성, 교육의 다양화와 국가경쟁력 강화란 명분을 내세워 일류 고등학교 학벌 경쟁을 되살리고자 한다. 이는 학벌주의를 타파하려는 사회개혁적 흐름에 반하여 학벌주의를 더욱 조장하고 강화하려는 시도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애초 고교 평준화 논쟁은 서울 강남 집값 잡기 대책에서 촉발됐다. 평준화 폐지를 주장하는 정부 관료는 경제부처에 몰려 있다. 지난달 최종찬 건설교통부 장관은 “부동산 가격 안정을 위해 고교 비평준화를 할 수는 없지만, 비평준화가 부동산 가격 안정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했다. 박승 한국은행 총재는 강남 아파트값 상승에 대해 “저금리가 하나의 원인일 수도 있지만 천민적 교육제도가 가장 큰 문제”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사진/ 옛 명문고 출신 기득권층 · 경제학자 · 보수언론들의 공격으로 평준화 정책이 흔들리고 있다. 왼쪽부터 이명박 서울시장(이용호 기자), 박승 한국은행 총재(류우종 기자), 정운찬 서울대 총장(한겨레).

시장논리로 교육정책 재단

조순·나웅배·이헌재 전 경제부총리, 사공일 전 재무부 장관, 김종인 전 청와대 경제수석 등 경제 원로 5명은 10월16일 청와대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점심식사를 함께 하면서, “우리 교육에 변화가 있어야 한다. 고교 평준화보다는 개방과 경쟁을 도입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도 “특목고와 자립형 사립고를 늘리고, 중장기적으로는 사립고의 평준화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한국언론재단의 기사 검색사이트인 카인즈(www.kinds.or.kr)에서 고교 평준화 관련 신문기사를 찾아봤다. 고교 평준화를 없애자는 사람들은 대부분 경제학을 전공했거나 ‘경제’ 관련 일을 하고 있었다.

“공교육의 황폐화, 사교육비 급등, 교육의 질 저하, 교육의 빈익빈부익부 현상을 초래한 교육평준화가 서민들의 삶과 자녀 교육에 무슨 도움이 되는 것일까.”(나성린 한양대 교수·경제학, 2003년 10월8일치 <한국일보> ‘한국시론’ 중에서)

“좋은 점보다 나쁜 점이 더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필자는 고교 평준화에 반대한다. 그러나 전면적인 반대는 아니다. 평준화와 비평준화 모두 장단점이 있기 때문에 두 체제가 공존하되,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학교와 학생과 학부모들의 선택을 허용하라는 것이다.”(김정호 자유기업원 원장, 2003년 10월17일치 <국민일보> ‘이렇게 생각한다’ 중에서)

“정부의 편견은 이상한 논리를 횡행시켜 사회를 오랫동안 골병들게 한다. 오늘날 때 아니게 학벌 타파와 서열 파괴가 공론화되는 것이 그것이다.”(김영봉 중앙대 교수·경제학, 2003년 9월30일치 <문화일보> ‘포럼’ 중에서)

“평준화 제도가 필요하다면 공립학교에서 실시하면 될 것이다. 적어도 사립학교에게는 스스로 교육서비스의 내용을 결정지을 권한을 돌려주어야 하지 않을까.”(고광석 한국무역협회 본부장, 2003년 11월7일치 <경향신문> ‘기고’ 중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학자나 관료, 기업인들은 왜 평준화 폐지를 주장할까.

이들은 개인의 선택의 자유 확장은 개인과 사회 전체의 후생을 늘릴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정부는 민간경제 주체들에게 동등한 기회를 주고 결과와 평등에 애쓰지 말고 시장에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정부의 교육시장에 대한 규제인 평준화 정책은 편익보다 비용이 휠씬 더 발생한다는 믿음을 깔고 있다. 이들은 학부모와 학생의 교육선택권을 돌려주기 위해 평준화 틀을 허물어야 한다는 논리를 편다.


사진/ 11월6일 이명박 서울시장의 ‘시골 출신’ 발언에 항의하기 위해 서울시청을 방문한 전교조 관계자들.(류우종 기자)

‘잘난 소수’ 외치는 엘리트주의자들도

평준화 폐지론자 가운데 정운찬 서울대 총장은 특이한 경우다. 정 총장은 10월9일 대한상공회의소 주재 아침 강연회에서 “현재의 심각한 사교육 문제와 강남지역 부동산값 폭등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선 고교 입시를 부활해야 한다. 지방과 서울 각 지역에 비평준화된 명문학교가 있다면 학부모들이 굳이 강남으로 이사하지 않을 것이며, 가능하면 중학 입시까지도 부활하자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라고 말했다. 정운찬 총장의 이 발언은 평준화 폐지 논의에 불을 놓은 구실을 했다.

하지만 정 총장은 평준화 폐지를 주장하는 대다수 시장지상주의자들과는 좀 거리가 있어 보인다. 정운찬 교수는 금융이론을 전공하는 케인지언이다. 케인지언은 정부의 일정한 역할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시장주의자와 구별된다. 정 총장은 10월28일 고교 평준화가 계층 이동을 가로막고 있다며 그 예로 서울대 신입생의 40%가 서울 출신이며, 그 중 60%가 강남 출신이라고 주장했다. 평준화 반대론자 중에는 ‘잘난 소수가 나라를 이끌어간다’는 엘리트주의자도 있다.

이건희 삼성회장은 올 들어 “21세기는 천재 한명이 10만명, 20만명을 먹여 살리고 창조적 인재가 국가의 경쟁력을 좌우한다.… 천재를 조기 발굴해 육성하는 것이 시급한데도 위화감 때문에 시도 한번 못해본다. 하향평준화를 방치하면 국가의 장래가 어둡다”고 부쩍 강조하고 있다. 이에 대해 교육학자들은 고등학교까지는 사실상 의무교육에 가까운 보통교육이기 때문에 엘리트 교육은 적절하지 않으며, 엘리트 양성은 대학에서 맡는 게 타당하다고 반박한다.

시장주의자들의 평준화 폐지 주장은 특정 언론들을 통해 증폭되고 있다. 평준화 폐지 주장이 집중적으로 나오는 신문은 <조선일보> <동아일보> <중앙일보> <문화일보> <매일경제> 등이다. 이는 평소 친자본적인 보도 성향을 보여온 신문들이다. 이 중 <조선일보>가 가장 직설적이다.

<조선일보>도 7월까지는 평준화 문제를 비교적 점잖게 지적했다. “우선 초등학생, 중학생의 조기 유학이 전체 유학생의 10%가 넘고 이 추세는 갈수록 가속화될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평준화 일색인 현재의 한국 교육은 우수한 학생과 평범한 학생 모두에게 좌절만 안겨주고 있다. 정부는 국가 장래를 위해서도 더 이상 이런 현실과 미래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조선일보> 7월31일치 사설 ‘교육 선택권 없으니 해외로 갈 수밖에’ 중에서)

10월 들어 평준화 논란이 불붙기 시작하자 <조선일보>의 공세도 뜨거워졌다. “획일적 평준화에 대한 평가는 끝났다.… 학교와 학생, 학부모에게 자율적인 선택권을 보장해주는 게 강남 집값도 잡고 교육 붕괴도 막는 길이다.”(<조선일보> 10월11일치 사설 ‘교육자율화해야 강남 집값도 잡힌다’ 중에서)

<조선일보>는 10월25일치 ‘평준화는 사이비 종교다’란 사설에서 색깔론까지 끄집어냈다.

상류층의 고품질 교육상품 구매 욕구?

“평준화 교육은 영재를 둔재로 만들고, 학습 의욕을 잃은 뒤처진 아이들을 거리의 부랑자로 내몰아버리고 말았다. 모든 학부모와 학생들에게 너무나 분명한 이런 부작용이 서울시 교육감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평준화가 ‘사이비종교’처럼 그의 눈을 가려버렸기 때문이다.… 학력 경쟁을 ‘일부만 건지고 나머지는 버리는’ 비인간적 제도로 매도하는 ‘교육사회주의적’ 발상이 교육행정 책임자들 사이에 버티고 있는 한 교육의 장래도 없고 나라의 미래도 기하기 어렵다.”

평준화 논란이 강남 아파트값 폭등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이지만, 이를 문제 삼은 세력의 의도는 다른 곳에 있다는 지적도 만만찮다. 다음은 김종엽 한신대 교수(사회학)의 분석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우리 사회에서 대학 진학이 모든 가족들의 계급적 재생산의 핵심 고리라는 사실에 있다. 격화된 교육 경쟁이 시간이 갈수록 심해져 이제는 상류층 자녀조차 이 경쟁으로 인한 고통과 피곤을 피해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상황이 비평준화에 대한 향수와 평준화에 대한 비난을 불러들인다. 왜냐하면 평준화는 상류층이 중등교육기관에서 더 나은 교육상품을 구매할 길을 차단하기 때문이다.”

권혁철 기자 nu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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