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 의장의 죽음이 빈사 상태에 빠져 있는 남북경협의 불씨를 살릴 수 있을지 주목되고 있다. 정 의장은 떠났지만 남은 사람들은 대북사업을 놓고 모처럼 진지한 고민들을 하고 있다. 정치권을 비롯해 경제단체, 시민사회단체 등이 앞다퉈 갖가지 대안을 제시하느라 분주하다. 핵문제에 끼여 현상유지에만 급급하던 정부도 뒤늦게 근본적인 대안 마련에 나선 듯하다.

투자 환경의 근본적 개선만이 살 길

사진/ 정몽헌 의장의 죽음은 꺼져가는 남북경협의 불씨를 살릴 것인가. 지난 6월30일 북한 개성시 봉동리에서 개성공단 1단계 착공식이 열렸다.(사진공동취재단)

하지만 정작 남북경협 현장에 뛰어들어야 할 기업인들은 몸을 바짝 사리고 있다. 정 의장의 죽음이 남의 일 같지 않아서다. ㅅ그룹의 한 관계자는 “지금과 같은 경협 환경이 유지되면 앞으로 몇년간은 북한에 투자하겠다고 나서는 민간기업은 없을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김삼식 코트라 북한실 과장은 “지금은 남북경협 제도화에 힘을 쏟을 때”라면서 “적어도 투자보장과 관련한 4대 경협 합의서가 발효되고, 인프라 정비와 통행과 통신 등이 어느 정도 자유롭게 이뤄져야 기업들이 움직일 것”이라고 진단했다. 지난 1998년 외환위기를 겪은 이후 기업들은 철저히 수익성을 따져 대북사업 참여 여부를 결정하기 때문에 정치권이나 정부가 뭐라 말해도 투자환경이 근본적으로 개선되지 않는 한, 남북경협의 활성화는 기대하기 어렵다는 평가였다.

지금까지 정부로부터 대북 투자를 승인받은 기업은 모두 54개다. 이 가운데 북한에서 공장 문을 닫지 않고 제대로 운영하고 있는 기업은 다섯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다. 지금 남포에서 자동차 조립생산을 하고 있는 평화자동차 등 몇개 기업을 빼고는 사실 현대아산의 사업들이 남북경협의 대부분을 차지해왔다. 금강산관광, 개성공단, 철도도로 연결 등은 사실상 정부 정책사업의 성격을 내포하고 있어 그나마 명맥이 이어져온 점을 감안하면 기업 독자적인 힘으로 북한 내 사업을 유지하고 수익을 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호기심에서 혹은 남다른 민족애와 개척정신으로, 혹은 드물게 큰돈을 벌 욕심으로 대북사업에 뛰어들었다가 빈털털이가 된 기업인들 가운데는 전업하거나, 투자자들의 고소로 감옥에 있거나 도피하면서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런 와중에 불거진 정 의장의 안타까운 죽음은 대북사업은 ‘블랙홀’이라는 기존 인식을 더욱 강화시킨다. 기업인들은 정 의장의 자살은 ‘남북한 위정자들이 저지른 타살’이라고 규정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역대 정권의 위정자들은 예외없이 뭔가 굵직한 대북사업을 하면 그냥 내버려두지 않는다. 어떻게든 기업을 이용해 자신들의 정치적 잇속을 챙기려 들었다. 실컷 이용해먹다가 문제가 생기면 ‘나 몰라라’ 하고 도망가거나 아예 모른 체한다. 결국 돈 날리고, 망가지는 건 기업인뿐이다.” 수년간 대북사업을 벌이다 지난해 그만둔 한 중견기업 대북사업 담당자의 고발성 발언이다.

대북사업은 속성상 각종 규제와 승인권을 가진 정부 관련기관과 어느 정도 협력이 불가피하다. 즉, 다른 외국에서의 투자와 달리 복잡한 규제망 안에 갇혀 있는 셈이다. 따라서 정부 역할에 대해 고마워하는 대북사업 기업인들은 거의 없다. 지금도 투자를 하기도 전에 국내의 복잡한 절차 밟느라 지쳐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고 하소연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한마디로 남북교류협력 관련 법규는 남북관계의 특수성에 근거해 각종 규제를 하면서도, 정작 사업은 시장경제 논리로 투명하게 진행하라는 게 말이 안 된다는 항변이다.

남북경협인들이 믿을 데는 없다. 이들은 대북사업에서 불거지는 온갖 위험들을 대개 홀로 감당한다. 정부는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경제협력의 당위성과 중요성을 강조한다. 하지만 번듯한 성과들은 정치적 치적으로 삼기 위해 나눠가지려 들면서 실패에 따른 부담은 공유하려 하지 않는다. 이런 정부의 기회주의적 자세도 남북경협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강화시키고 있음은 물론이다. 세상을 떠난 정 의장의 형제그룹들인 현대자동차나 현대중공업 등도 대북사업 참여 여부에 대한 질문에 손사래를 치며 강하게 불참 의사를 밝히는 것도 하등 이상할 게 없는 셈이다.

“북한이 달라져야 경협이 살아난다”

사진/ 지금까지 남한 기업들의 대북 투자는 대부분 수익을 내지 못했다. 북한 남포에서 자동차를 조립생산하는 평화자동차는 성공리에 뿌리를 내린 것으로 평가받는다.(세계일보)

남북경협이 블랙홀 이미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북한이 담당할 몫도 적지 않다. 북한은 오랜 세월 적대적 환경에 둘러싸여 있다보니 경협 문제를 늘 체제안보 문제와 함께 고려해왔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매사에 너무 신중했고, 체제 생존을 위한 좋은 기회들을 번번이 놓쳤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런 이유로 1조5천억원가량을 쏟아부은 현대아산 대북사업의 위기는 상당 부분 북한쪽이 약속을 제때 이행하지 않는 등 부적절한 대응에서 비롯됐다는 목소리까지 나오는 것이다. 김윤규 사장도 8월8일 정 의장 영결식을 치룬 뒤 “앞으로 적법한 절차를 밟아서 대북사업을 하겠다”면서 “북한도 고쳐야 할 점이 많다”고 밝힌 것은 북한도 새겨들어야 할 대목이다. 그간 대북사업을 진행하면서 품어왔던 북쪽의 답답한 행태에 대한 불만과 서운함을 드러낸 것으로 해석된다.

그간 북한에게 남쪽과의 교역이나 경제협력이 생명수 구실을 해왔다는 점을 감안해 북한은 체제생존뿐 아니라 실리를 위해서도 구태에서 과감히 벗어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다행히 북한은 여전히 더디지만 급변하는 국제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변신의 몸부림을 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내부적으로 젊은 세대 중심의 시장경제와 자본주의에 대한 학습 열기가 여느 때보다 뜨겁게 달궈져 가고 있으며, 대남경제 관계에서도 4대 경협 합의서 발효를 서두르며, 남쪽을 연결하는 도로철도 닦기에 여념이 없고, 적절하지 못한 거래 관행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다는 게 통일부 관계자와 방북 기업인들의 조심스런 평가다.

문제는 시간이다. 북핵 문제가 풀리고 남한 기업들이 안심하고 대북 투자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점이다. 당장 금강산 관광사업은 벼랑 끝에 몰려 있다. 대북사업은 속성상 한번 중단되면 복구하는 데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어간다는 게 기업인들의 대체적인 견해다. 더구나 핵문제 등으로 인한 안보 불안감에 경협 공백까지 겹쳐지면 한반도 평화관리에 적신호가 켜질 수 있다. 기업인들은 남북관계의 이런 특수성을 고려해 정부의 선택적 개입이 불가피하다고 입을 모은다. 남북경협은 물과 전기와 같은 공공재적인 성격이 강한 만큼 민간기업들의 힘만으로 긴급 보수가 안될 때는 정부가 나서야 한다는 논리다.

노무현 정부는 언제까지 눈치만 볼 건가

과도기 상태에서 대북 투자에 나서는 기업들에 대해서는 국민들의 동의를 구해 금융상 혜택을 제공하거나, 남북한 국내 정치적 외풍에서 기업인들을 우선적으로 보호해주는 제도 장치의 마련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있다. 특히 노무현 정부가 금강산 관광사업처럼 ‘중단해서는 안된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된 대북사업이라면 야당의 눈치만 살피면서 책임을 미루는 데 급급할 게 아니라 날밤을 새는 토론을 벌여서라도 설득해서 협조를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가 한 지붕 아래 사는 동료들도 설득하지 못하면서 기업이나 북한 탓으로만 돌리고 이래라 저래라 요구하는 것도 왠지 볼썽사납다는 얘기다. 이제 남북경협이라는 공은 남북한 모두가 함께 구르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가기 힘들 게 되었다. “북한의 안정 없이 남한의 번영은 모래성에 지나지 않는다”는 박상권 평화자동차 사장의 말은 새겨들을 만하다.

임을출 기자 chu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