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4 재·보선 며칠 전 열린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유인태 정무수석은 “선거 전망이 암울하다”고 보고했다. 그러자 노무현 대통령은 “뭘 그렇게 걱정하십니까. 재·보선 좀 진다고 뭐 큰일이 벌어집니까”라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곧이어 노 대통령은 “한대도 안 맞고 때리려는 사람은 정말 나쁜 사람입니다”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었다. 듣기에 따라서는 재·보선 패배라는 ‘잔매’를 맞더라도 정국을 반전시킬 ‘결정타’를 따로 준비하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되는 말이다. 한 회의 참석자는 이 말을 듣고 “몇수 앞을 내다보고 뭔가 큰 구상을 하고 있구나”라고 짐작했다고 한다.

노 대통령은 4월 중순 민주당 신주류의 한 핵심인사를 만나서도 ‘도저히 함께할 수 없는 사람들’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열거하며 “앞장서서 먼저 ‘사고’를 쳐주십시오”라고 당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정분리 원칙 때문에 대통령이 직접 나설 수 없으니, 신주류 핵심인사들이 앞장서서 신당의 기치를 들어달라는 부탁이다.

민주당 떠난 ‘노심’… 유시민 승리에 고무

사진/ 민주당이 재보선 후폭풍에 흔들리고 있다. 지난 4월25일 정대철 대표가 재보선 패배 관련 긴급최고위원회의를 주재하고 있다.(이용호 기자)

두 사례 모두 노 대통령의 마음이 민주당을 떠나 신당쪽으로 기울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청와대 관계자들은 “대통령은 그동안 북핵 문제 등에 신경을 쓰느라 신당 문제는 완전한 백지상태”라면서도 “이제 재·보선 결과가 나왔으니 본격적으로 신당의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할 때”라고 말하고 있다. 청와대쪽은 이를 위해 재·보선 당일 한 선거구에서 지역별·세대별·계층의식별 투표성향을 알아볼 수 있는 출구조사를 실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동안 잠복하던 민주당 신당논의가 재점화된 것은 민주당의 패배와 더불어 개혁국민정당 유시민씨의 승리에서부터 비롯됐다. 유씨의 승리에 대해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티엔소프레스의 김헌태 이사는 “애초 이번 선거는 민주당이나 개혁당이 이길 선거가 아니었다. 투표율을 보면 40대 이상이 차지하는 비율이 80%에 육박하는 선거였고, 보수성향 유권자의 대통령과 여당에 대한 비우호적 정서가 확산됐으며, 호남소외론 등으로 호남출신들의 충성도가 약화됐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유씨가 당선된 것은 우리 사회가 변화의 방향, 그 중에서도 개혁·진보적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추론을 가능하게 한다”고 말했다.

굳이 이런 의미를 붙이지 않더라도 민주당 개혁성향 의원들 사이에서는 신당논의가 급물살을 타고 있어 되돌리기 어려운 국면으로 나아가고 있다. 4월25일 하루에만 당내 최대 의원모임(62명)인 열린정치개혁포럼, 재야출신 의원모임, 바른정치실천연구회 등이 잇따라 열려 신당 창당의 공감대가 확산됐다.

열린정치개혁포럼에서는 임종석 의원이 “민주당은 이번 선거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고 단정짓자 이재정 의원이 “국회의원 3곳에서만 진 것이 아니라 재·보선 전체 32곳에서 민주당 간판을 달고 나간 사람은 아무도 당선되지 못했다. 사형선고가 아니라 이미 사형이 집행됐다”고 강도를 높였다. 매주 월요일 여의도의 한 한정식집에서 정기적으로 모이는 재야출신 의원모임에서는 김근태 의원이 신당의 불가피성을 역설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동안 신당논의에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여온 김 의원은 기자와 만나 “재·보선 현장을 다녀보니 표심이 흩어져 있다. 민주당의 효용성은 이제 다했다. 당 안팎의 평화개혁세력을 모두 아우르는 개혁적 국민정당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신당에 따른 호남표 향배에 촉각

사진/ 개혁국민정당 유시민 후보의 승리는 민주당 신당논의를 재점화했다. 유 후보가 당선이 확정되자 환호하고 있다.(이용호 기자)

민주당 신·구주류 간 갈등의 완충역할을 해온 당권파들의 균형추도 신당쪽으로 기우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상수 사무총장은 “민주당 리모델링, 환골탈태, 일정한 물갈이, 이런 것들이 제대로 안 되고 총선 전망이 보이지 않는다면 총선 승리를 위해 더 복잡한 것도 생각해볼 수 있다”고 진전된 모습을 보였다. 정대철 대표는 아직 신중론을 펴고 있으나, 한 측근은 “재·보선 이후 나타난 변화와 개혁의 요구에 적극 대응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민주당을 어떻게 환골탈태시킬 것이냐는 ‘로드맵’을 놓고는 다들 생각이 흩어져 있다. 한편으로는 지금의 민주당 틀로는 내년 총선에서 승리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걱정을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과연 민주당을 버리고 신당으로 갈 경우 호남표를 계속 확보할 수 있겠느냐는 불확실성 사이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더 노골적으로는 민주당 개혁에 완강히 저항하는 구주류를 어떻게 ‘대접’할 것인지 판단의 문제이기도 하다.

현재 민주당 내에서 신당론을 둘러싸고는 대략 세 가지 정도의 경로가 얘기되고 있다.

첫 번째는 ‘리모델링’이다. 이는 구주류와의 협상과 타협에 절대적 무게를 싣는 방안으로, 정대철 대표와 이상수 사무총장이 이 논의를 대변해왔다. 당무회의 구성분포상 구주류의 입김이 강력하게 미치는 만큼 민주당 개혁특위가 이미 마련해놓은 개혁안을 통과시키기 위해서는 절충이 불가피하다는 현실론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당 개혁안을 놓고 신·구주류 간 첨예한 대립을 보이는 쟁점은 임시지도부 구성과 전당대회 시기 두 가지다.

박상천 최고위원은 임시지도부를 신·구 동수로 하는 조정안을 마련해 양쪽에 의사를 타진하고 있으며, 정대철 대표도 이에 동조해 김원기 임시대표에 신주류 2명, 구주류 2명으로 임시지도부를 구성하는 방안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임시지도부는 전당대회 때까지 비상대권을 쥐는 최고의 권력기관으로, 현재 64개에 이르는 사고 지구당 위원장에 누구를 앉힐지, 그밖에도 어느 지구당을 사고 지구당으로 처리할지를 결정하기 때문에 전당대회 대의원 판도에 결정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이런 조정안에 대해 신주류쪽은 난색을 표시하고 있다. 임시지도부에 구주류가 한명이라도 낄 경우 당의 환골탈태 작업에 사사건건 제동을 걸어 현재 난맥상을 보이는 최고위원회와 비슷한 양상을 띨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구주류쪽도 “신주류가 임시지도부를 독식하려는 것을 보니 결국 전면 물갈이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라며 아예 임시지도부 대신 중앙당 선관위와 조직강화특위를 만들어 곧바로 전당대회를 치르자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부담 더는 리모델링, 개혁은 물건너가나

사진/ 민주당 신·구주류는 갈라설 것인가. 신주류 인사들은 당 개혁안 마련을 주도하고 있다.(한겨레 이정우 기자)

전당대회 시기를 놓고서도 신주류쪽은 10~11월을, 구주류쪽은 7~8월을 주장하며 맞서고 있다. 신주류는 현재 호남출신 당원과 대의원이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당의 근간을 완전히 바꾼 뒤 전당대회를 치르려는 데 반해, 구주류쪽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당원·대의원 구조를 그대로 유지한 채 전당대회에서 일전을 겨뤄보자는 생각이다.

이렇듯 상반되는 이해관계를 산술적 평균을 통해 타협안을 이끌어내보자는 것이 리모델링안이나, 그럴 경우 당의 장벽을 높이 쳐서 당 밖의 개혁적 인사들을 끌어들이지 못하고 결국 다시 호남지역당이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 신주류쪽의 다수 의견으로 굳어지고 있다.

두 번째는 ‘재창당론’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방안이다. 이는 신주류 핵심들이 당 개혁안 마련을 주도하고 있어 구주류들로 하여금 불필요한 긴장을 유발시키는 만큼, 온건한 인물들을 내세워 당내 중도세력을 최대한 끌어모은 뒤 다수의 힘으로 개혁안을 원안에 가깝게 통과시키자는 안이다. 이를 위해 임종석 의원 등은 김상현·김근태·이해찬 의원 등은 물론 한화갑 계열의 조성준·배기선 의원 등과도 긴밀히 접촉하며 논의를 진행시키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단 당 개혁안만 통과된다면 임시지도부를 신당추진기구 성격으로 바꿔 당 밖에 제3신당을 만든 뒤, 민주당 다수를 이끌고 들어간다는 복안도 지니고 있다. 일종의 민주당 발전적 해체론으로 ‘총선에서 기호 2번을 차지하는 신당을 만들어야 하며, 최대다수의 최대신당을 만들어야 한다’는 정신을 담고 있다. 이 방안에 대해서는 최근 청와대 정무라인에서도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세 번째는 일종의 ‘물꼬론’으로, 당 개혁안이 사실상 물건너간 만큼 더 이상 미련을 갖지 말고, 일부 의원들이나마 선도적으로 당을 뛰쳐나가 신당을 만든 뒤 순차적으로 민주당 다수를 끌어들이자는 생각이다. 천정배·신기남 의원 등이 이 논의를 주도하고 있으나, 당내 소수의견인 만큼 노 대통령이 힘을 실어주어야 실현될 수 있다는 한계가 있다.

다수 동의하는 주도세력 형성에 달렸다

민주당 내 신당논의가 어느 쪽으로 가닥을 잡든 성패를 결정짓는 것은 주도세력의 형성이다. 지금까지는 신주류 안에서도 생각의 편차가 워낙 크고, 이해관계도 서로 달라 구심점을 형성해내지 못했다. 이 때문에 지난 대선 직후 당의 발전적 해체를 촉구하는 서명에 참여했던 조순형 의원 등 23명이 4월28일 저녁 모임을 갖는 등 여러 갈래의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 이들 모임에서 당내 다수가 동의하는 주도세력이 형성될 경우 신당논의가 급물살을 타고 5월 중 그 윤곽이 드러나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당내 진통만 거듭할 것으로 보인다.

김의겸 기자 kyummy@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