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서 “<스트레이츠타임스>,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사스) 취재 기자에게 빗장 걸다”라는 기사를 준비한다는 정보를 사전 입수한 <스트레이츠타임스>가 사실을 강력하게 부인해버린 탓이다.
“회사가 과민반응을 보여 벌어진 일인데, 주책 없는 짓이었다.” 이래저래 기분을 잡친 조이스는 시무룩하게 말했다.
중증호흡곤란증이 처음 보고되면서부터 손바닥만한 땅에 수백만명이 몰려 사는 싱가포르는 난리가 났다. 전염성이 강한 질병이 돌기라도 하면 싱가포르는 그야말로 순식간에 끝장날 수밖에 없다는 걸 정부와 시민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감염환자들을 철저히 격리했고, 곧장 유아원과 학교는 열흘간 휴교에 들어갔다. 당국은 홍콩으로부터 바이러스를 묻혀온 최초 3명과 접촉한 900명이 넘는 사람들 집을 모조리 방역한 뒤 회사 출근을 금지했다. 물론 월급은 정부가 제공한다는 조건을 내걸고.
“웃기는 건, 겁에 질린 회사가 오락가락하는 통에 나도 감염된 게 아닌가라는 고민에 빠졌다는 건데. 혹시 회사와 병원은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 내겐 말해주지 않는 무슨 음모 같은…. 왜 그런 영화들이 하도 많았으니.” 이렇게 말하는 조이스는 영안실을 취재한 다음날부터 갑자기 숨쉬기가 힘들고 열이 나기 시작했다. 물론 지나친 상상으로 얻은 가상증세였다. “10일 이상 잠복한 뒤 발병하니 염려 말게.” 이런 의사 의 말조차 곧이 들을 수 없었다고 조이스는 고백한다. “난 괜찮아! 난 아냐! 영안실 주검이 두겹으로 철저히 싸여 있어서 바이러스가 바깥으로 나돌아다닐 수 없는 상태였잖아!” 공포에 사로잡힌 조이스는 스스로를 이렇게 위로했지만, 그럴수록 영안실에 있던 이들과 병원 관련자들이 뒤집어쓴 마스크, 그 테러리스트들 같은 얼굴들만 더 또렷하게 떠올랐다.
꼭 이번 일이 아니더라도, 내 경험에 비춰보면 그동안 싱가포르 신문들은 기자들에게 ‘위험한’ 병원 영안실 취재를 가급적 자제시켜왔다. 꼭 필요하다면 1㎞쯤 떨어진 곳에서 취재하든지, 아니면 병원당국이 발표하는 자료를 얻는 식으로. 한솥밥 먹던 조이스 기자가 이번 바이러스 건을 놓고 영안실 취재를 했다는 사실 자체가 내겐 더 충격적이었다.
“휴교 기간만큼 방학에서 깐다”
사진/ 초기의 충격과 공포는 “언제 이 바이러스가 끝날 것인가”라는 고통스런 의문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아이들에게만 마스크를 쓰게 한 싱가포르의 나들이 가족.(Joyce)
‘싱가포르판 9·11’로 불리는 이번 사스 건으로 지금까지 6명이 사망했고 의심 가는 환자 101명이 격리됐다. 그러나 시민들은 위기감이 없는 건지, 아니면 정부가 바이러스를 제압해줄 것으로 믿는 건지, 아무튼 별로 큰 동요를 일으키는 것 같지 않다. 위기를 별로 겪어본 적이 없고 따라서 위기대처능력이 별로 없는 시민들은 그저 정부가 시키는 대로 의료용 마스크를 구입하겠다고 가게 앞에 줄을 섰고, 컴퓨터를 통해 의약품을 구입하는 정도였다. 걱정스런 어머니들이 자식들에게 외출금지령을 내린 뒤, 인삼 같은 전통 보약들을 그 전보다 많이 먹인다는 게 또 다른 풍경이라면 풍경이다.
다만 공짜 없는 나라 싱가포르는 지금 아이들로부터 강한 저항을 받고 있다. 학생들이 느닷없는 휴교로 들뜬 것도 잠시, 컴퓨터를 통해 숙제를 받아든 아이들은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게다가 교육당국이 이번 휴교 기간만큼을 정기방학에서 제하겠다고 발표해 학생들 기를 죽여놓았다. 폴리테크닉 학생 콜린 탄(19)의 불만을 들어보자. “어른들이 왜 그렇게 꼴난 호들갑을 떠는지 위기상황에서 아이들에게 휴가를 줬으면 그 뿐이지 그걸 또 깎겠다니. 숙제는 또 무슨 놈의 숙제야!”
바이러스 소식이 들려온 초기에 폭발했던 긴장과 달리, 일주일이 지난 지금 싱가포르는 거의 일상적 분위기를 회복한 듯 보인다. 비즈니스 중심가도 보통 때처럼 활기를 되찾았고, 마스크를 착용한 식당 종업원들도 거의 볼 수 없다. 최악의 상황은 지났다는 게 싱가포르 시민들의 생각이고, 초기에 느꼈던 공포심은 이제 “언제 이 바이러스가 끝날 것인가” 하는 약간의 고통스런 의문으로 바뀌어가는 모양새다. 홍콩과 비교해 싱가포르는 고요하고 안정적인 듯하다.
“이번 일이 매우 심각한 현실임을 부정하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모든 생명이 한순간에 끝나버리는 건 아니잖아. 좀더 실용적인 사고가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어.” 조이스는 이번 일을 겪으면서 성숙해진 모습이다. 조이스의 친구들도 대개 조심들은 하고 있지만 대중적 활동, 예컨대 영화관이나 수영장에 가는 것까지 멈춰버린 경우는 별로 없다. 조이스는 지난주에 본 영화 두편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극장이 보통 때처럼 꽉 차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많은 펑크 소녀들의 재잘거림과 소년들 발냄새로 흥겨웠어. 그런데 갑자기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거야. 생명에 대한 고마움 같은 것이었을까 아니면 우리 아이들에 대한 믿음 같은 것이었을까 하여튼 그랬어.”
조이스는 카메라를 챙겨들고 다시 현장으로 떠났지만, 싱가포르 시민들 사이에는 여전히 심각한 의문이 남아 있다. “왜 같은 날 온 세상이 온통 마스크를 뒤집어쓰게 되었을까”
뉴욕이 화학무기 공포에 질려 마스크를 뒤집어썼다면, 아시아는 정체불명 바이러스로 마스크를 뒤집어썼으니…. 그것도 같은 시점에 말이다. 죽음의 바이러스, 그 정체는 무엇일까 하늘의 뜻, 아니면 사람의 뜻 싱가포르는 답답하기만 하다.
싱가포르=유니스 라오(Eunice Lau)/ 전 <스트레이츠타임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