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학자들은 흔히 공화당 부시 정권의 외교정책을 가리켜 ‘잭슨주의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말한다. 잭슨주의자들은 국제사회가 무정부주의적이며, 폭력적이고, 앞으로도 그런 상태로 계속 머무를 것으로 믿는다. 그들에 따르면 미국은 언제나 경계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되며 강력히 무장하고 있어야 한다. 평화시 테러를 저지르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배려도 해서는 안 된다. 전쟁의 철칙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이겨야 한다는 점이다. 미국을 반대하는 세력들을 신속하고, 철저하게 그리고 전문적으로 박멸하는 것이 미국 지도자들의 명백한 책무다. 따라서 이들은 북한과 같은 반항적인 정권에게 식량과 에너지를 제공하는 행위조차 혐오 대상으로 여긴다.

평화를 위협하는 ‘악마의 화신’

사진/ GAMMA

공화당 매파들에게 이라크와 함께 북한은 ‘목구멍에 걸린 가시’다. 주민들은 굶주리게 하면서 대량살상무기로 무장해 미국에 정면으로 맞서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악마의 화신’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런 불신과 증오는 최근 북한이 핵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하면서 더욱 깊어졌다. 기독교 원리주의자인 부시가 김 위원장을 겨냥해 침을 튀기면서 극도의 혐오감을 드러내는 게 조금도 이상하게 비칠 리 없다. 언젠가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 대사는 김정일 정권을 바라보는 부시 외교안보팀의 집단적 기억 속에는 ‘뮌헨의 메아리’가 똬리를 틀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1938년 9월 미국과 유럽의 강대국들은 독재자 히틀러를 회유하기 위해 뮌헨협정을 맺어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데텐 지방을 독일에 할양하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이런 유화조처는 히틀러의 정복욕만 부추겨 유럽을 전쟁의 공포로 몰아넣는 촉진제 구실을 했다. 부시 정권은 북한도 마찬가지로 포용정책을 써서 기를 살려주면 언젠가는 미국의 뒤통수를 칠지 모른다는 우려를 하고 있다. 그러면서 부시 정권은 지난 역사를 들먹인다. 이들은 미군 수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한국전쟁을 비롯해 미 해군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 납치, 판문점 미루나무 절단을 둘러싼 충돌, 대한항공 비행기 공중테러, 버마 아웅산 테러사건과 같은 크고작은 정전협정 위반행위들을 용서할 수 없는 범죄행위로 여긴다.

그렇다면 공화당 매파들은 북한을 어떻게 다뤄야 한다고 보는 것일까. ‘대결이냐 화해냐’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게 이들의 생각이다. 이들의 머릿속에는 화해는 물론 ‘제3의 길’도 없다. 이는 곧 부시 정권이 세계를 선과 악의 이분법적 대결구조로 보는 시각과 일치한다. 따라서 악의 세력은 박멸의 대상일 뿐이다. 이 목표를 달성하는 가장 효과적 방법은 군사력 사용이다. 북한 핵문제를 둘러싸고 부시가 천명하는 ‘평화적 해결’ 운운을 끝내 믿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9·11 테러 이후 무참히 무너진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이 잭슨주의의 첫 희생물이고, 이제 이라크의 후세인 정권이 그들의 독 안에 든 쥐꼴이 됐다. 다음은 북한의 김정일 정권 차례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부시 정권의 대북정책 목표가 단순히 핵과 미사일 위협의 제거에 그치지 않을 수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이미 공화당 매파들은 ‘후세인 없는 이라크’와 같이 ‘김정일 없는 북한’을 공공연하게 부르짖는 상황이다.

탈레반·이라크에 이은 희생양 만들기

사진/ 부시와 김정일이 한치도 양보 없는 머리싸움을 벌이고 있다. 한반도에 긴장감이 고조되는 가운데 부시는 ‘김정일 없는 북한’을 노리고 있다. (연합)

매파들의 고민은 대북정책 목표는 간단명료하게 세워놓았으나 이를 달성하는 현실적인 수단과 방법이 영 마땅치가 않다는 점이다. 이라크처럼 당장 군사적 응징을 도모하자니 거치적거리는 게 너무 많다. 인적·물적 손실이 너무 큰데다, 한국을 비롯해 주변국들의 반발이 만만찮다. 그렇다고 대화와 협상을 하자니 잭슨주의 전통에 어긋날 뿐 아니라 뮌헨의 실수라는 악몽이 되살아난다. 더구나 부시는 전임자 클린턴의 대북포용정책을 혐오해온 터다. 북한에 회담 대가를 지불하거나 협박을 보상으로 무마하려 한 클린턴 행정부의 전철을 절대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게 그의 신조다. 부시 정권은 하는 수 없이 잠정적으로 제3의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였다. 그래서 내린 어중간한 선택이 북한을 무시하는 전략이다. 조지타운대학의 안보전문가 빅터 차 교수는 이를 ‘매파적 포용’이라고 정의한다. 이는 대북정책의 최종적인 목표 달성을 위한 하나의 중간단계 전략으로 간주된다. 차 교수는 한 언론의 기고문에서 “부시 정권의 매파들이 평양을 안심시키려고 포용정책을 추진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나중에 북한을 응징하기 위한 ‘국제적인 동맹’을 형성하는 데 포용정책이 가장 실용적인 방법이라고 계산하기 때문에 추진한다”고 설파했다. 공화당 내 기류를 어느 누구보다 잘 읽고 있는 그의 분석은 많은 한국인들을 섬뜩하게 하기에 충분하다.

부시 정권은 지금 북한 핵문제의 다자적 접근을 고집스레 강조하고 있다. 부시는 3월6일 기자회견에서 북한 핵문제를 다루는 최선의 방법은 다자적 접근에 있다고 재천명했다. 한국을 비롯해 일본·중국·러시아 등이 책임을 맡아 북한에 다자적 압력을 넣으면서 김정일에게 핵무기 개발이 그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점을 설득하는 길이 최선이라는 지적이다. 차 교수의 분석대로라면 다자적 접근방식은 북한 핵개발을 저지하기 위한 외교적 노력이 허사로 돌아갈 경우 군사적 응징의 명분을 쌓기 위한 발판으로 돌변할 수 있다. 물론 이런 전략이 부시의 뜻대로 이행될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부시 정권이 갑자기 왜 다자적 접근을 붙잡고 있는지 속셈을 잘 보여준다. 또 이는 북한이 줄기차게 요구하는 양자협상을 거부하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양자협상에의 참여는 곧 북한과의 대화를 뜻한다. 부시 정권을 떠받치는 잭슨주의자들이 이를 지지할 리 없다. 결국 다자적 접근을 통해 우선은 북한을 고립·봉쇄하면서, 언젠가 기회가 포착되면 응징수단으로 삼고자 하는 의도인 셈이다.

다자적 접근의 속셈은 고립·봉쇄

어떤 전문가는 공화당 매파들의 목소리 높이와 군사력의 크기는 비례한다고 말한다. 미국에서 군사주의가 판칠수록 잭슨주의자들인 공화당 매파들의 근육질과 영향력은 날로 비대해질 것이다. 이들은 가장 효과적 외교수단으로 강력한 군사력을 선호한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부시 정권의 핵심 군사전략은 역시 선제공격이다. 이 전략의 특징은 ‘전진 억지’와 ‘불의의 타격’ 개념으로 설명된다. 적대국에게 예상치 못한 기습타격을 가할 수 있는 무기체계를 개발하고, 그런 기습타격을 가할 수 있는 군사력을 배치하겠다는 게 주요 뼈대다. 한마디로 ‘기습적인 대량 정밀타격’을 지향하고 있는 셈이다. 이는 기존의 재래식 전쟁과는 사뭇 다른 생각이다. 새로운 군사전략에 맞춰 부시 정권은 테러와 대량살상무기 공격을 막기 위한 대응책으로 군사정보기술, 사이버전쟁, 공중타격과 우주전쟁 수단 등의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초읽기에 들어간 이라크 전쟁은 미국의 기습적 대량 정밀타격 능력을 보여주는 첫 시험무대가 될 전망이다.

부시 정권의 새 군사전략은 이처럼 도발적이고 호전적이다. 북한 지도부가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이유도 이런 섬뜩한 전략과 무관치 않다. 지금 북한 전역은 일촉즉발의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다. 3월2일 동해안 상공을 날던 미군 정찰기를 향해 이례적으로 전투기를 동원해 위협 비행한 것도 북한의 예민한 정도를 생생히 보여준다. 북한의 맞대응은 사전에 어느 정도 예견된 조처였다. <조선중앙통신>은 3월1일 한·미 연례 연합전시 증원과 독수리 훈련 등을 문제삼아 이들 군사훈련은 핵 선제공격 준비를 최종단계에서 마무리하고 이를 실전에 옮기려는 데 목적이 있다고 비난했다. 그러면서 “미국의 선제공격이 임박했다고 간주될 경우 부득이하게 취하게 될 우리의 자위적 조치는 미국과 대등한 전투수단들이 동원될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최근 북한이 감행한 미군 정찰기에의 근접비행은 북한이 이제 말이 아닌 실제 행동으로 대응할 것임을 강하게 시사하는 대목이다. 북한은 68년 미 해군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 납치와 93년 핵위기 때 강경대응 사실을 끄집어내 강경에는 초강경으로 맞설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북한은 한국전쟁 이후 미국과의 관계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철저하게 상호주의적 대응방식을 취해왔다. 미국이 강경하게 나오면 똑같이 강경책으로, 유화적으로 나오면 똑같이 유화책으로 맞서온 것이다.

부시 정권이 ‘김정일 없는 북한’을 고집한다면 앞으로 북·미 관계의 전망은 매우 비관적일 수밖에 없다. 결국 어느 한쪽의 정권이 교체돼야만 팽팽한 대결국면에서 벗어날 수 있는 셈이다. 잭슨주의자들로 둘러싸인 부시 정권이 지난날의 허물을 벗고 새로 태어날 가능성을 점치는 전문가는 거의 없다. 부시를 비롯한 측근들은 지금의 정책방향을 수정해 중간노선을 취하면 내년 대선에서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고 본다. 아버지 부시처럼 보수와 진보 양쪽으로부터 표를 잃어 또 진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미국 내 대외정책과 관련한 이견들은 늘 있었다. 국민에게 알려지지 않은 경우가 많으나 이런 때 대개 대통령이 직접 나서 가닥을 잡았다. 논쟁에서 진 쪽은 종종 스스로 옷을 벗거나 쫓겨난다. 외교·안보 정책을 둘러싼 견해 차이로 부시 정권에서 중도하차한 인물은 아직 없다. 이는 곧 내부 이견이 거의 없음을 시사한다. 흔히 파월 국무장관을 부시 정권 내 온건파로 꼽는다. 하지만 그도 공화당 정권 내 보수주의의 높은 벽을 뛰어넘지는 못하고 있다. <워싱턴포스트>는 2월24일치에서 파월이 최근 몇주 사이에 강경파로 돌변한 모습을 보여준다고까지 평가하고 있다. 현재 부시 정권 안에는 이라크 전쟁이나 북한 문제와 관련해서 어느 때보다 일치된 견해가 자리잡고 있다. 강경 잭슨주의자들을 제어할 브레이크 장치가 없다는 얘기다.

잭슨주의자들에 브레이크를 걸어라

그렇다면 미-북 사이 긴장을 해소할 방법은 없는 것일까. 지금으로서는 그렇다. 굳이 해법을 제시하면 냉전기 미-소 간 첨예한 군비경쟁과 협상타결 과정을 연구해온 찰스 오스굿이 주장하는 ‘일방적 선도조처’ 또는 ‘양보’다. 그에 따르면 갈등 당사국들이 팽팽한 긴장을 유지할 때, 협상이 난관에 봉착해 도저히 타결될 조짐이 보이지 않을 때, 어느 한쪽이 일방적인 유화적 제스처를 취하거나 상대국이 적절히 수용할 수 있는 타협안을 말로서든, 문서를 통해 비밀리에 주고받음으로써 긴장상태를 서서히 감소시킬 수 있다. 아니면 어느 한쪽에서 국내정치적 위기에 몰려 불가피하게 정책노선을 수정하는 경우도 예상할 수 있다. 마침 북-미 간 핵 전문가들이 2월20일부터 이틀간 베를린 북한 대사관에서 몰래 만나 북한 핵문제를 협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사찰 주체나 방식 등을 둘러싼 견해 차이로 일단 회담은 결렬됐으나 그래도 실낱같은 희망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중국과 러시아는 물론 미 의회 중진들까지 나서 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한 북-미 직접대화를 촉구하고 미국 여론이 호응하는 점도 주목할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