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년 지하철 공사장 가스폭발로 43명의 제자를 잃었던 대구 영남중 교사의 천근의 슬픔
그해, 대구의 4월은 잔인했다. 1995년 4월28일 오전 8시가 가까운 무렵, 사람들은 아침을 열기 위해 학교로 직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봄 햇살이 유난히 포근한 아침이었다. 이런 아침, 상인동 네거리 일대가 거대한 지뢰밭인 줄 누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대구시 전 지역에서 들을 수 있을 정도의 강렬한 폭음과 동시에 일대가 공중으로 솟구쳐올랐다. 마치 화면에서 본 핵실험 같은 현상이 일어났던 것이다. 영남중학교 학생들은 교문을 불과 200여m 남겨둔 채 화염과 폭음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몸 속에 그렇게 눈물이 많을 줄이야…`
사진/ 대구 상인동 지하철공사장 가스폭발사고 희생자 가족들이 대구 중앙로역 입구에서 국화꽃을 바치고 있다. (박승화 기자)
그 사고로 영남중학교 교사 1명과 학생 42명이 희생되었다. 한달이 지나 마지막까지 투병하던 학생 1명이 죽어 결국 희생 학생은 43명이었다. 아무리 탁월한 문장가라도 어찌 그날의 비극을 글로 나타낼 수 있겠는가. 다만 그날의 가스폭발로 280kg짜리 철제 복공판 3500여개가 일시에 하늘로 날아오를 정도였으니 그 폭발력과 파괴력은 가히 사람의 상상을 뛰어넘은 것이라 하겠다. 폭발 속에 대구 학생, 시민이 휩싸여 결국 101명의 사망자와 101명의 부상자를 낳은 참으로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그날 이후 학교 생활은 울음으로 시작하였다. 43명의 영결식은 거의 한달에 걸쳐 이루어졌고, 영결식 때마다 교정은 울음바다를 이루었다. 인간의 몸 속에 눈물이 그렇게 많이 고여 있을 줄이야. 이제는 메말랐겠지 하고 영결식장에 들어서면 또다시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교사들은 학생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얼굴을 돌리지만 그럴수록 눈물은 솟구쳐오르는 것이다. 눈물을 참으면 가슴이 멍멍해지고 아파오는 것을 교사들은 그때 비로소 알았다.
나는 개인적으로 추모사와 추모시를 영결식 때마다 써야 했고, 밤늦게까지 그것을 쓰면서 홀로 눈물을 삼켜야 했다. 어떤 죽음이 슬프지 않겠느냐만 어린 학생들의 죽음은 생각할수록 가슴 미어지는 것이다. 한 집안의 꿈이고 미래인 그들이 부모 앞에서 순식간에 사라졌으니 그들의 죽음은 그들 부모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영남중학교의 울음은 그해 봄 내내 이어졌고, 남은 교사와 학생들은 괜히 죄지은 사람처럼 기가 죽어 있었다. 그래도 해가 바뀌자 울음은 잦아드는가 싶었는데 그렇지 않았다. 이듬해 졸업식을 맞아 사망한 학생들에게 명예졸업장이 주어질 때 졸업식은 다시 울음바다가 되었다. 영남중학교의 울음은 결코 잦아질 수 없는 것이었다. 그 뒤 해마다 봄은 다시 오고 그날이 오면 추모식이 열리고 또 울음은 이어졌다. 3년이 지나자 학교의 분위기를 추스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견이 유가족쪽에서 먼저 나오기 시작했다. 이후 추모식도 간소하게 치렀다. 금쪽같은 자식들을 가슴에만 묻어두기에는 아쉬움이 많겠지만 자라는 학생들에게 그늘을 드리울 수 없다는 깊은 배려에서 나온 조치였다.
그래, 비라도 와야지
이제 그 아픔이 잊힐 만한 2003년 2월18일 상인동 가스 폭발 사고가 있은 지 꼭 8년이 지난 오늘, 무심코 바라보는 텔레비전 자막에서 중앙로 지하철역 화재 소식이 떴다. 먼 나라 소식처럼 느껴졌다. 처음 뜬 자막에서 3, 4명 사망, 10여명 부상으로 나타났다. 그것을 본 나는 거기에서 끝난 화재로 알았다. 아마 대구 시민들이라면 그렇게 믿었을 것이리라. 그 정도로 끝나주길 간절히 바랐는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바람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안부를 묻는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했다. 집에 있기가 불안하여 관여하고 있는 <시와 반시> 사무실로 갔다. 봄호, 마지막 교정지를 앞에 놓고 있어도 활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문인들의 대구 안부 묻는 전화가 다문다문 왔다. 그랬다. 대구에 사는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누구에겐가 걱정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하루가 지나자 엄청난 사고가 기정사실이 되었다. 이제는 설마 그렇게까지야 하는 일말의 희망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그날 밤 소설가 김원일 선배로부터 전화가 왔다. “석본아, 대구는 와 그렇노 눈물이 나서 못 견디겠다. 그렇다고 내려갈 형편은 못 되고. 네가 대신 국화 한 송이라도 바쳐다오.” “그래요, 형님. 참 답답해요. 죄송해요.” 맞다. 대구에 살고 있다는 것이 죄송하고 미안한 일이다. 그렇게 멍한 하루가 지났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신문을 읽었다. 희생자들이 휴대폰으로 가족과 친구와 나눈 대화가 눈물샘을 자꾸만 건드렸다. 이들이 못다 한 효도와 못다 나눈 사랑과 우정 또한 지상에 남은 사람들의 부채가 아닌가.
오늘은 토요일, 사고가 난 지 나흘째다. 하루 종일 비가 내리고 있다. 대구의 하늘은 지상쪽으로 내려올 수 있는 데까지 낮게 내려와 시민들의 눈을 보며 같이 울고 있는 것이다. ‘하늘도 무심치 않다’라는 말이 떠오른다. 그래야 한다. 비라도 와야지 그래야만 무심치 않는 하늘을 또 한번 믿으며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 아닌가.
나는 오후 5시께 집을 나서 아내와 같이 합동분향소가 설치되어 있는 시민회관으로 향했다. 시민회관 건물은 고인들의 명복을 비는 현수막으로 덮여 있었다. 1층 유족 대기실을 둘러보았다. 유족들이 삼삼오오 앉아 있었다. 한 옆에는 자원봉사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렸지만 결코 소란스럽지 않다. 천근의 슬픔이 사람들을 누르고 있었다. 오가는 모든 사람들은 눈물을 머금은 얼굴들이다.
분향소로 들어섰다. 국화향이 오히려 슬픔을 북돋웠다. 국화꽃 한 송이를 바치고 영정 앞에 고개를 숙였다. 명복을 빈다. 영정들을 보았다. 국화꽃으로 둘러싸인 영정들 모두 낯익은 얼굴이다. 그래 이웃들이 아닌가. 살아가기 바빠 잠시 잊고 있을 뿐이지 대구에 함께 살아온 정다운 이웃들이다. 영정의 눈길이 일제히 나를 보는 것 같다. ‘그래요 용서해요. 남은 모든 사람들은 그대들 앞에서 죄인인걸요.’ 나도 모르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끊었던 담배를 다시 물고…
분향소를 나와 중앙로역으로 향했다. 많은 사람들이 나처럼 역으로 향하고 있다. 가랑비가 오는 듯 마는 듯 하염없이 내렸다. 나는 우산을 쓰지 않았다. 아내가 우산을 받쳐준다. 싫다고 했다. 비를 맞는 것이 오히려 편했다. 역 입구에 놓인 국화꽃을 누군가 비닐로 감싸놓았다. 아마 꽃이 헝클어질까봐 그랬던 모양이다. 그렇지, 꽃까지 헝클어져서는 안 되겠지.
지하로 들어서자 메케한 내음이 온몸에 다가온다. 입구는 비교적 깨끗했다. 지하로 승강장으로 들어서자 검은 재가 온 사방을 덮고 있다. 검은빛이다. 모두가 검다. 어두운 벽에는 추모의 글로 가득하다. ‘좋은 데 가세요’, ‘사고 없는 좋은 세상에서 편히 쉬세요’, ‘사랑해’, ‘미안해’, ‘죄송해요’. 글들이 검은 벽에 또박또박 쓰여 있다. 그 짧은 글들이 가슴을 울린다. 만남의 광장에는 실종자 가족들이 모여 있었다. 어쩌면 그들은 더 막막할 것이다. 그들은 사고 이후 왜 실종자 가족이라는 모호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는가. 더욱 억울하고 분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실종된 상태지 아직 살아 있을 수 있는 실낱같은 희망도 지금쯤은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닌가. DNA 검사로도 판명되지 않을 정도로 훼손된 시신이 많다니 그들은 오랫동안 실종자 가족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들의 딱함과 억울함이 발걸음을 무겁게 한다.
한 30분가량을 헤매다 지상으로 올라왔다. 아카데미극장 앞에는 실종자를 찾는 가족, 친구들이 안내판을 들고 서 있다. 그들 앞에는 많은 촛불이 밝혀져 있다. 지나는 사람들이 그들이 들고 있는 안내판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다. ‘정남진’, 여대생이다. 생전의 발랄한 사진도 안내판에 있다. 나도 사람들 속에 끼어 안내판을 유심히 보지만 막막할 뿐이다.
하릴없이 집으로 향한다. 가슴이 다시 멍멍해진다. 집에 들어서자 아홉시 뉴스가 시작되었다.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리고 끊었던 담배를 피워물고 이 글을 쓰기 시작한다.
구석본/ 시인·대구 영남중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