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집 ] 2003년01월23일 제444호 

노(勞)는 노(盧)에게 노(努)하나

배달호씨의 분신사망 사건에 정치권 뒤숭숭…책임 떠넘기기 급급해 진상조사마저 소홀


사진/ “열사의 죽음을 헛되이 말라!”두산중공업 노동자들은 재벌의 혹독한 노동탄압에 분노하고 있다. (박승화 기자)


배달호씨 분신사망 사건이 두산중공업과 노조, 분신사망대책위의 주장이 날카롭게 맞서면서 장기화 조짐을 보이고 있다. 민주노총은 이 과정에서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노무현 정권 초반 노-정 관계는 많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민주노총 관계자는 “새 정부가 출범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실권은 노무현 당선자에게 넘어가 있다. 노무현 당선자쪽이 이번 일을 재벌개혁의 계기로 삼고, 노동계와의 관계도 원만하게 헤쳐가는 기회로 삼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선택은 노무현 당선자쪽 몫이다”고 말했다.

정부·인수위, 재벌 눈치보며 무대책

하지만 이 관계자는 “인수위원회쪽이 권력을 인수한 게 아니고 정책을 인수한 것이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 한마디로 ‘아무 생각이 없다’는 태도다. 공기업 한국중공업 인수 특혜 의혹, 편법 재산상속, 노동탄압말고도 재벌개혁에 정면으로 저항하고 나온 박용성 회장의 언행 그 자체가 재벌개혁 대상 1호인데, 정치권은 모두 행여 재벌 앞에서 찍힐까 몸을 사리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런 와중에 한나라당이 1월17일 배달호씨 사건과 관련한 성명서를 내놓아 눈길을 끌었다. 지난 9일 분신 사건 이후 민주노동당·사회당과 사회단체 등에서 줄이어 성명을 낸 적은 있지만, 보수정당으로서는 한나라당이 여드레 만에 처음으로 ‘정부와 당선자측은 두산중공업 문제 해결을 위해 나서라’는 성명을 냈다. 평소 서민과 중산층의 정당임을 내세워온 민주당이 모르쇠로 버티는 사이 한나라당이 한발 앞선 것이다.

일부 노동자들은 ‘노무현은 다르지 않을까’라는 한가닥 기대를 버리지 않고 있다. 하지만 노무현 당선자쪽 처지에서는 부담스러운 이 문제를 아직 임기가 약 1달 남아 있는 김대중 정부 몫으로 넘기고 싶어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틈을 놓치지 않고 한나라당은 무대책과 떠넘기기로 버티는 정부와 노 당선자를 모두 질책하고 나섰다.

한나라당의 성명은 “두산중공업 노동자 분신사망 사건이 당국의 무관심과 방치 속에 노사분쟁의 새로운 불씨로 악화되고 있다”며 정확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있다. 또 “노동계가 대규모 집회·시위를 통한 사회적 쟁점화를 예고하고 있어서, 사태 전개에 따라서는 춘투로까지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가뜩이나 경기전망이 어둡고 국가신인도 하락이 우려되는 상황에서 개별 사업장의 문제가 전국적인 분규로 비화되는 것은 걱정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고 걱정했다. 여기까지는 꽤 설득력 있는 내용이다.

그런데 원내 다수당인 한나라당은 이 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하기 위해 뭘 할 것인지에 대해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한나라당은 “이번과 같은 사태가 발생하면 대통령이 분규 현장에 뛰어들어서 직접 문제를 해결해내겠다고 하던 노무현 당선자의 호기는 어디로 갔는가”라며 노무현 당선자를 겨냥한 정치 공세로 성명을 마무리했다.

“노무현 당선자의 호기는 어디로 갔는가”

이에 대해 민주노총은 “한나라당 성명에는 분신을 부른 재벌의 혹독한 노동탄압에 대한 단 한마디 언급도 없다. 원내 제1당이며 책임 있는 야당인 한나라당은 왜 지금까지 아무런 일을 하고 있지 않았으며, 앞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말 한마디 없다. 국회 차원에서 진상조사단을 꾸리고 관련 상임위를 열어서 노동부 장관과 박용성 두산 회장, 노조 관계자들을 불러 사태 진상도 알아보고 해결책도 세우고 하는 게 원내 제1당의 책임 아닌가”라고 되물었다.

손낙구 민주노총 교육선전실장은 “민주당, 한나라당, 김대중 정부, 노무현 당선자 쪽은 아무리 보수세력이라도 최소한의 수준과 격조는 있어야 한다. 정치권은 두산중공업 분신 사태와 관련해 △진상조사단 파견 △재벌개혁 차원에서 두산재벌 비리 전면 조사 △손배가압류 문제 대책 마련에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권혁철 기자 nu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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