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집 ] 2003년01월23일 제444호 

그의 호각소리를 어찌 잊으랴!

두산중공업 분신노동자 배달호씨의 빼앗긴 희망… 언제까지 일하는 사람의 권리를 짓밟을 건가

“배달호 피고인은 왜 안 나왔습니까”

“배 피고인은 지난 9일 분신 사망했습니다.”

1월16일 오전 10시 창원지법 제315호 대법정, 파업과 관련해 업무방해 혐의 등으로 기소돼 1심에서 유죄가 선고된 두산중공업(옛 한국중공업) 전 노조간부들에 대한 항소심 첫 공판이 열렸다. 이날 재판부는 인정신문에서 배달호 피고인의 불출석 사유를 물었고, 피고인쪽 변호인은 1심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배 피고인이 사망했다고 설명했다.

22년 경력의 보일러 공장 숙련 노동자


사진/ 배달호씨는 ‘피고인’의 멍에를 지우지 못하고 죽음을 선택했다. 그의 동료들은 고인의 호각소리가 귓전에 맴돈다고 말한다.


비슷한 시각, 배씨가 숨진 경남 창원시 귀곡동 두산중공업 안 노동자광장에서는 경찰과 국립과학수사연구소 관계자들이 부검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지난 9일 오전 이 회사 노동자 배달호(50)씨가 불에 탄 주검으로 발견된 뒤 ‘자살’이 분명하므로 부검을 할 수 없다는 유족 등의 주장과 ‘변사’이므로 부검을 해야 한다는 수사기관의 의견이 맞섰다. 양쪽은 서로의 주장을 절충해 14일 주검이 발견된 곳에서 부검을 하기로 했다. 그런데 날씨가 추워지자 주검이 시멘트 바닥에 얼어붙는 일이 벌어졌다. 주검을 떼내기 위해 조심스럽게 시멘트 바닥을 녹였으며, 14일에는 주검을 냉동탑차로 옮겨 백열전구 빛을 쪼였다. 주검이 녹자 16일 오전 11시께 부검이 시작됐다. 노동자들이 비통하고 착잡한 표정으로 부검 현장 근처를 서성거렸다.

배달호씨가 일했던 보일러 공장은 분신 장소에서 50m가량 떨어져 있다. 그는 22년 동안 보일러 공장에서 일했다. 보일러 공장 들머리에는 ‘휘익~ 어이, 빨리 안 모이고 뭐하노!-고인의 호각소리가 귓전에 맴돕니다’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산 자가 죽은 이를 기리는 현수막이 공장 부두쪽에서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보일러 공장 조합원들은 그를 ‘호루라기 사나이’로 기억한다. 대의원 조회 때고 점심시간 집회 때고 늘 호루라기를 불며 조합원들의 참여를 독려했기 때문이다. 배씨의 부인 황길영(42)씨는 “빨래할 때 남편 옷 주머니에서 호루라기가 자주 나왔다”고 말한다.

동료 김극일(45)씨는 “동료들은 형님을 ‘배 중사’라고 불렀다”고 말했다. 군복무를 마친 사람들은 현역 시절 부대 살림을 꼼꼼하게 챙기고 원리원칙에 충실한 깐깐한 ‘선임하사’에 대한 기억이 있을 것이다. 배달호씨는 직장 일과 조합활동에서 마치 선임하사처럼 묵묵히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했다고 한다.

회사쪽은 이런 그를 두고 노조 활동‘만’ 열심히 했다는 인색한 평가를 하기도 했다. 회사의 한 관계자는 “고인에게 매우 조심스러운 말이지만 평범한 노동자로 보긴 힘들다”고 말했다. 하지만 노조 조합원들의 주장은 다르다. 배씨는 보일러 패널을 가공하는 스카핑 머신을 다뤘는데, 같은 반에서 일했던 조합원들은 그를 ‘스카핑의 1인자’로 불렀다고 한다. 노조 관계자는 “그가 한국중공업 시절부터 노조활동에 앞장섰는데도 해고와 같은 중징계를 당하지 않았던 것은 뛰어난 기술자였기 때문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노동자의 권리 찾기 위한 고난의 여정


사진/ 누가 자상한 남편을 죽음으로 내몰았는가. 배달호씨의 부인 황길영씨가 흐느끼고 있다.


그는 경남 김해에서 공고를 졸업한 뒤 부산에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81년 1월에 한국중공업에 입사했다. 5공화국 때인 당시 한국중공업에는 노조가 없었다. 한 50대 노동자는 “당시 노동자는 사람 취급을 못 받았다. 하루 걸러 철야를 했고, 일이 밀리면 아침부터 그 다음날 저녁까지 30시간이 넘게 일할 적도 있었다”고 말했다.

1987년 한국중공업에 노조가 만들어진 뒤 그는 노조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단조공장 최호경 대의원은 “그가 80년대 말 단조공장에 파견되어 함께 일할 때 노동자의 권리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으며, 노동자 스스로가 나서서 자기 권리를 찾아야 한다는 말을 늘 강조했다”고 말했다.

원두희 조합원은 배씨가 1989년께 전태일 평전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을 건네주며 조심해서 읽어보라고 했던 일을 떠올렸다. 부인 황길영씨는 “남편과 함께 공연이나 영화를 보러 가는 일이 거의 없는데, 어느 날은 영화를 보여주겠다며 극장에서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을 함께 봤다”고 말했다.

배달호씨는 1991년 대의원을 맡으면서 활동가로 나섰다. 조합원들의 권익이 침해당하면 관리자들에게 앞장서 항의했다. 노조 노사대책부장(쟁의부장 구실)을 맡은 1995~96년과 2000년을 빼고는 계속 대의원을 맡으며 현장을 지켰다.

공장 안에 마련된 빈소를 지키고 있던 상복 차림의 김건형(46)씨는 배달호씨와 인연이 깊다. 배씨와 같이 81년에 입사해 20년 넘게 함께 일했으며, 98년부터 고인의 권유로 대의원을 맡으며 노조활동에 나섰다. “나는 노조가 필요하다는 생각은 했지만 노조활동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노조활동을 하는 사람 가운데 회사와 뒷거래를 해서 인사 때 혜택을 보는 경우를 자주 보면서 거부감이 컸다. 그런데 달호 형님은 10년 넘게 노조활동을 하면서도 그런 일과는 거리가 멀어 믿음이 갔다. 달호 형님은 ‘어렵고 약한 사람, 힘없는 사람을 위해 조합을 같이 하자’고 나를 설득했다.”

김건형씨는 지난해 11월18일 조합원들의 파업 찬반투표 참여가 낮아 조합원들의 참여를 독려하다가 휘발유를 온몸에 끼얹고 분신자살을 하려 했다. 김씨는 “그 일이 있은 지 얼마 안 되어 달호 형님이 찾아와 ‘왜 쓸데없는 생각을 하느냐. 자살할 정신이면 싸워 꼭 이겨야지. 살아서 싸우자’고 꾸짖었다. 나한테는 그렇게 말해놓고 형님이 저렇게 될 줄 몰랐다”고 고개를 숙였다.

살아서 싸우자고 외치던 넉넉한 형님


사진/ 배달호(앞줄 가운데)씨는 22년 동안 보일러 공장에서 스카핑 머신을 다룬 숙련 노동자였다. 배씨는 노조 대의원으로서 조합원의 권익을 챙기려고 노력했다. (두산중공업노조제공)


원두희 조합원은 “형님이 보일러 공장 조합원들이 출퇴근할 때 늘 다니는 길을 분신 장소로 택한 것도 그렇고, 또 주위에서 확인해보니 분신하기 전에 만날 사람을 다 만나고 다니며 마음의 준비를 했던 것 같다. 항상 밝게 웃고 다녀서 눈치도 못 챘는데…”라고 말했다. 배씨 동료나 가족 가운데서 그의 분신 결심을 눈치챈 사람은 없었다. 공장 동료들에 따르면 그는 분신하기 전 집 근처 ‘마트’에서 경품 추첨에 응모해 김치냉장고가 당첨되자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불과 며칠 전 “형님, 운수대통해 올해는 잘 풀리겠네요”란 덕담을 하던 동료들은 그의 뜻밖의 분신 소식에 충격을 받았다.

두 딸의 아버지이자 50대 가장인 배달호씨가 왜 분신이란 극단적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을까.

부인 황길영씨는 “처음 소식을 듣고 달려오면서 믿기지 않았다. 가족을 버렸다는 생각에 속도 많이 상했다”고 한다. 하지만 유서를 읽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황씨는 “유서를 읽어보니 가족을 뒤로 하면서까지 노조와 조합원들을 위해 분신할 수밖에 없었던 남편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항상 평범하게 살자고 고집했지만 지금은 유서에 남긴 남편의 뜻을 따르겠다. 억울하게 죽어간 남편의 한을 풀어달라”고 호소했다(유서 전문은 antidoosan.or.kr에서 볼 수 있다).

배씨는 지난해 7월 업무방해로 구속된 뒤 두달 뒤 집행유예로 나왔다. 그는 3개월 정직 징계를 받고 지난해 12월26일 복직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지난해 임단협 교섭위원인 그는 해고자와 징계자가 나오고 조합원 개인의 재산과 급여에 대한 가압류 등 현안문제를 풀지 못하고 복귀한 것에 대해 큰 부담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집이 가압류되고 월급도 50%가 가압류됐다. 생계비 마련을 위해 회사 복지기금에 대출 요구를 했으나 ‘가압류자는 대출 불가’란 냉담한 답을 들었다. 노조 회비도 가압류되어 노조 차원의 생계비 지원도 기대할 수 없었다. 그는 아내와 두 딸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하지만 가장인 그는 지난해 7월 이후 수입이 전혀 없었다. 이 바람에 고등학생 딸 2명은 다니던 학원과 과외를 그만뒀다.


사진/ 두산중공업은 조합원의 재산을 가압류하면서 배씨의 목을 조였다. 배씨처럼 월급의 50%가 가압류된 한 조합원의 급여 명세서


그는 지난해 연말 회사에 복귀한 뒤 출근한 10여일 동안 마음고생이 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분신하기 며칠 전 동료와 이런 대화를 나눴다.

“오전 내 붙잡아놓고 쓰라 한다.” “뭐라 쓰라 하는데요” “앞으로 불법활동 않겠다. 생산활동에 매진하겠다는 뭐 이런 내용이 들어가면 된다 하는데….”

그는 회사가 조합활동 그만두면 가압류를 풀어주겠다며 회유한다며 몹시 괴로워했다고 한다. 그는 분신 이틀 전인 7일 밤 11시 넘어 술에 취한 채 과자 봉지를 들고 귀가했다. 그날 밤 배씨는 돈이 없어 과외를 그만둔 작은딸을 안고 “속상해서 어떻하느냐”, “해준 것이 없어 미안하다”고 울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부인은 평소 아빠로서 아이들에게 못해준 것이 미안해서 그런 줄 알았다.

세상은 끝내 그를 버렸을지라도…

다음날 그는 월차를 냈다. 그는 이날 가족과 지상에서의 마지막 휴가를 보냈다. 그는 세상에 남게 될 가족을 위해 집 수리를 꼼꼼히 했다. 추위에 얼어터진 집안 수도배관을 고치며 수도꼭지도 새로 갈았다. 집안일을 마친 그는 부인과 저녁을 먹었다. 그가 숨진 뒤 부인은 “내일 죽을 사람이 수도꼭지는 왜 갈았느냐”며 가슴을 쳤다.

다음날인 1월9일 새벽 5시, 배달호씨는 평상시보다 1시간 일찍 집을 나서 차를 몰고 출근했다. 그는 오전 6시께 일터인 보일러 공장 근처에 차를 세웠다. 20년 동안 매일 아침 일터로 가던 길인 ‘노동자광장’에서 그는 자신의 몸에 불을 댕겼다. “내가 없더라도 우리 가족 보살펴주기 바란다. 미안합니다.” 그가 남긴 유서의 마지막 문장이다.

그는 왜 마지막 순간까지 세상에게 대고 미안하다고 했을까. 정작 미안해해야 것은 그를 막다른 길로 내몬 세상일터인데….

창원=권혁철 기자 nura@hani.co.kr·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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