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집 ] 2003년01월02일 제441호 

새로운 도전을 시작할 때

이민 100주년, 지난 역사의 한계를 딛고 한인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살펴본다


사진/ 1992년 LA폭동 이후 평화행진을 벌이는 한인들. (GAMMA)


세계의 열강들이 식민지 개척을 위해 미지의 세계로 항해하던 15~16세기 서구 강대국들에 비하면 당시 아시아인들은 국제무대의 유치원생에 지나지 않았다. 그나마 일찍이 해외 무역항로를 개척한 필리핀과 중국은 1600년대에 필리핀 마닐라와 멕시코 아카풀코항을 오가며 국제무대의 발판을 마련했다. 1830년대에 흑인 노예들의 일손 부족과 백인들의 노동 기피로 경제적 어려움에 놓인 하와이의 사탕수수 농장 경영자들은 미국 정부의 도움으로 저임금의 해외 취업 노동력을 받아들였다. 이때 다수의 중국인들이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 전문인력으로 취업했고, 이를 계기로 일부 중국인 선원들과 행상인들이 아시아인으로는 최초로 뉴욕에 정착해 상업활동을 하게 되었다.

1세대는 착취당하는 이주노동자

1852년에 2만명이 넘는 중국인 노동자들이 캘리포니아 사탕수수 농장과 광산 등지에 취업하게 되면서 하루에 10시간에서 12시간을 일하는 노동착취와 인종차별을 당한다. 이런 부작용을 자체적으로 막기 위해 하와이에서 최초로 중국인연합회가 조직됐으나 인종차별의 벽은 갈수록 심화되었다. 캘리포니아주에서는 모든 중국 이민자들에게 달마다 치안유지세를 $2.50씩 부과했다. 워싱턴주에서는 아예 중국인들의 투표권을 법적으로 막았으며, 백인과의 법정투쟁이 있을 때는 중국인들이 법정에서 진술하는 것을 박탈했다. 일부 주에서는 중국인 자녀들의 공립학교 입학을 법적으로 금지하기도 했다. 1870년에는 미 대륙횡단 철도건설 노동 이민자들의 상당수가 임금을 제대로 받지 못해 법정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1870~80년대에는 미국의 노동 이민정책의 모순을 알게 된 10만 중국 이민자들과 백인들 간 갈등이 최고조에 달하기도 했다.

최초의 일본 이민 노동자들은 1885년부터 1894년까지 26차에 걸쳐 2만9천여명이 하와이에 도착했다. 1898년 7월, 하와이가 미국 주로 합병될 때까지 일본 이민자 수는 4만명이 넘었으며 여러 직종의 노동력에 투입된 이들 역시 중국 노동 이민자들처럼 노동착취와 인종차별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중국 이민자들과 백인들 간 심각한 갈등문제를 알게 된 일본 이민자들은 자신들의 노동권리를 쉽게 주장할 수 있었다. 아울러 문제를 혼자 해결하려는 중국 이민자들과는 달리 캘리포니아 사탕수수 농장 일본 노동 이민자들은 1903년에 멕시코 노동자들과 연합동맹을 조직해 대항하며 자신들의 권리를 찾기도 했다.

당시 백인 사업주와 이민 브로커들 사이에 오고간 편지를 보면 한인들은 중국인 이민자들이나 일본인 이민자들과는 달리 “국제적인 경험이 없는 순진한 어린이들”과 같고 “가난한 한국에서 너무 힘들게 살다 보니 값싼 임금에도 만족하고 좋아하는 사람들”이었다.

경제적인 꿈을 이루기 위해 이민온 초기 한국 노동자들은 육체적인 고통과 언어와 문화적 차이 외에도 백인들로부터 수많은 인종차별을 당해야 했다. 캘리포니아를 비롯한 몇몇 주에서는 한국인 자녀들에 대한 공립학교 입학을 법적으로 금지하고 캘리포니아주에서는 미국 백인들이 아시안과의 결혼을 금지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당시 백인 고용주들의 표현에 의하면 한국 노동자들은 일하고 나면 자신들끼리 모여 “담배를 피우며 잡담을 하는 것”이 일상적인 생활이었다. 그나마 1905년에 하와이와 캘리포니아에 설립된 한인교회에 나가서 예배를 드리고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이었다.

70년대 이민자들의 상권 장악


사진/ 뉴욕의 한인상가. 70년대에 이민온 한인들은 흑인 지역에서 쉽게 상권을 장악했다. (강재훈 기자)


이민 초기 미국이 온갖 문화적이고 정치적인 인종차별 정책을 펼쳤음에도 한국 노동자들은 묵묵히 일을 하면서 자녀교육에 온 정성을 다했다. 서서히 경제적 기반을 다지며 한인들은 종교·정치 지도자들과 뜻을 모아 한인사회의 기틀을 만들기 시작했다. 1903년 샌프란시스코에 정착한 안창호 선생과 함께 한인들은 ‘친목회’를 조직했고 1913에는 ‘흥사단’을 설립했다. 1904년에 이승만 대통령이 유학차 미국에 도착해 워싱턴과 뉴욕에 거주하며 한인들과 독립활동을 했다. 1919년 3·1운동 때는 하와이를 비롯한 전 미국 교포들이 1만달러를 모금해 보내기도 했다. 1921년에는 뉴욕의 한인 유학생들이 ‘스마일 신문’을 발행해 한국 정치에 기여하기도 했다. 1936년에는 안익태 선생이 필라델피아에 거주하며 <애국가>를 작곡했다. 1948년에는 한인 새미 리(Sammy Lee)가 런던올림픽에서 다이빙 부문 금메달을 땄으며, 1952년 헬싱키올림픽에서도 신기록을 기록하며 금메달을 따냈다. 이들 외에도 많은 한인들이 경제·과학·문학·종교 등의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나 아시아 이민자들이 미국의 정치적 주류사회에 진출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중국은 미국이민 110년 만에 히람 퐁(Hiram Fong)이 1952년에 하와이주 의원에, 일본은 미국 이민 74년 만에 대니얼 이노우에(Daniel Inouye)가 같은 해에 하와이주 의원에 당선됐다. 한국은 미국 이민 89년 만인 1992년에 제이 김(Jay Kim)이 캘리포니아주 의원에 당선됐다.

한국인들의 제2의 집단 미국 이민은 한국전쟁 기간인 1950년에서 1953년 사이에 시작된다. 이들 대부분은 미국인들이 입양한 전쟁고아들이다. 제3의 집단이민은 1964년 마틴 루터 킹 목사와 말콤 엑스 등 흑인 인권운동가들의 순교적 노력에 의해 미국에 사는 거주민이면 법 앞에 인종차별 없이 평등한 권리와 투표권을 부여하는 인권법안이 통과되면서, 그리고 1965년에 외국인들도 합법적 절차를 통해 미국에 입국할 수 있는 이민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된 뒤부터 시작해 1970년대에 가장 많이 늘어났다.

가난한 시기인 초기 이민과 제2의 집단이민자들과는 달리 제3의 이민자들은 다수가 정치·경제적으로 안정된 중산층이였다. 이들 대부분은 한국의 독재정치 아래 정치적 망명, 유학, 경제적 드림을 갖고 이민을 선택했다. 이들이 부딪치는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언어와 문화의 충격에서 오는 오지생활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한국에서 경험해보지 못한 사회적 고립과 경제적 압박 속에 상류사회로 진출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했다. 결국 이들이 쉽게 선택할 수 있는 일은 가난하고 위험한 흑인거리에서 하는 장사였다. 위험부담을 빼고는 현금만을 거래하는 하는 세탁소·가게·식당·슈퍼마켓 등은 한인들의 수익사업으로는 가장 적합했다. 기본적인 사업자금을 갖춘데다 부지런한 한인들은 게으르고 가난한 흑인지역에서 쉽게 상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한인사회와 관련한 3대 갈등


사진/ LA의 한인 타운. 한인사회와 관련된 3대 갈등은 한-흑 갈등, 한-백 갈등, 한-히스패닉 갈등으로 구분된다. (강재훈 기자)


그러나 다른 인종에게 빼앗긴 상권, 가난한 자신들의 지역에 살지는 않고 돈만 버는 인상을 주는 한인들, 웃음이 없고 말이 없는 한인들의 굳은 표정, 한인들끼리만 뭉치려는 응집력, 가난한 지역사회에 대한 무관심 등은 자연적으로 흑인들에게 강한 불만이 되고 말았다. 게다가 현금을 노리는 흑인 갱들에게는 범죄와 강도의 표적이 돼 한인들은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게 됐다.

한-흑 간 갈등이 미국 사회에 가시적으로 표출된 사건이 1992년 4월29일에 발생한 로스앤젤레스(LA)흑인폭동이다. 당시 폭동으로 한인 1명이 숨졌으며 약 46명의 사상자, 그리고 방화와 약탈 등으로 약 2280개의 한인 업소가 피해를 입어 수백억원의 손실을 가져다주었다. 1965년 8월에 발생한 와츠 흑인 폭동 이후 최대 사건이라 볼 수 있다. LA폭동이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은 당시 27살의 흑인 음주 운전자 로드니 킹을 백인 경관들이 무차별 구타했고, 백인들로 구성된 배심원들이 구타 경관들을 무죄로 판결한 것이 화근이 되었기 때문이다. 폭동의 원인만으로 보면 한-흑 갈등이 아니라 흑-백 갈등이었다. 단지 흑인들의 분노대상이 한인 상인들이 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흑인 인권단체들은 자신들의 인권을 옹호하기 위해 우리 한인들이 생각도 못할 시간과 인력을 동원해 폭력과 인권유린에 저항해왔다. 우리 한인들이 일터에서 돈을 벌고 있는 동안, 많은 흑인들은 자신들이 경제적 손해를 보면서까지 가게문을 닫고 직장과 학교를 빠지고 멀리 다른 주에서 차를 타고 수도 워싱턴DC로 모여 대규모 집회에 참여해왔다. 과연 우리 한인들은 이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 의심도 해본다. 흑인들의 이러한 인권집회의 승리로 많은 경우에 다소 소극적인 우리 소수민족들의 의견까지 저절로 관철되는 혜택을 누리게 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워싱턴DC의 경우 흑인들에게 혜택을 줄 때마다 다른 소수민족들을 의식해 그들에게도 다양한 복지 혜택, 직업의 확대, 기회의 균등을 부여해오고 있다.

한인사회와 관련된 3대 갈등은 한-흑 갈등, 한-백 갈등, 그리고 한-히스패닉 갈등으로 구분된다. 2000년에 들어서면서 한-히스패닉 갈등이 심각해졌다. 주된 이유는 최근 들어 남미의 히스패닉 이민자들의 수가 급격히 늘어나고 아울러 저들의 정치경제적 신장도 눈에 띄게 높아졌기 때문이다. 많은 히스패닉 이민자들이 한국인들이 경영하는 세탁소·식당·슈퍼마켓 등 비즈니스 현장에서 보조업무를 맡아 일을 한다. 영어도 잘 못하는 히스패닉 이민자들을 고용주인 한국인들이 쉽게 무시하고 노동착취를 하게 된다. 최근 들어 사회 참여와 다양한 언론매체를 갖춘 히스패닉 사회단체들이 한인 고용주로부터 받는 노동착취를 공개적으로 고발하고 있다. 몇 개월 전에도 뉴욕과 워싱턴DC에서 한인 고용주가 부당한 야근을 시키고 돈을 주지 않아 법정에 선 일이 있었다.

북미 관계 허리 구실 기대

이민 100주년을 향한 새로운 도전이 일어나고 있다. 먼저 이민 2세 교육을 향한 도전이다. 돈버는 일과 자녀교육에 지나치게 관심이 많은 우리 한인 1세대들은 자신들의 2세들이 대학을 졸업하면 미국 상류사회에 자리잡기를 바란다. 그러나 대학을 졸업하고 자녀들이 부딪치는 사회의 첫 관문은 그렇게 순탄하지만은 않다. 어느 사회학자의 말처럼 “흑인이 백인이 될 수 없듯 한국인이 백인이 될 수 없다”는 말도 일리가 있다. 자녀들에게 무조건 미국문화에 흡수돼 상류사회로의 진출을 강요하기보다는 한국인의 문화와 긍지를 살려 우리 것을 모자이크식 포용력에 기초한 상류문화 상류사회가 되게 가르쳐야 한다. 둘째는 미국 사회학자들이 비판하는 ‘제2의 유대인’이라는 한인 사회단체에 붙은 꼬리표를 떼버려야 한다. 한인들끼리만 어울려 실속을 차리려는 생각을 버리고 다인종·다문화된 미국의 국제사회에서 이웃과 더불어 사는 모범적인 한인사회의 참모습을 보여주고 소수민족들과 힘을 모아 정치적 영향력을 키워야 한다.

셋째는 이민 초기의 정신적인 한인 사회의 지주역할을 해온 교회들의 모습이 다시 회복돼야 한다. 미국의 한 종교기관의 분석에 따르면 미국 내 한인교회 수가 증가한 가장 큰 원인이 전도보다는 교회의 분열에서 비롯했다고 한다.

끝으로 2억8천의 미국 인구 가운데 200만명에 지나지 않는 한인들이지만 미국을 향한 의무와 책임을 다하고 정지, 정판, 정행의 자세로 국가를 향한 아낌없는 조언을 해야 한다. 미국 행정부가 약소국들을 향해 평화적 해결보다는 무모한 무력을 행사할 때, 다른 인종에 대한 인권의 존엄성을 무시할 때, 그리고 자국의 이익을 위해 국제경제의 질서를 파괴할 때 한인들의 목소리를 모아 전달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아울러 북한을 쉽게 오고 갈 수 있는 지정학 위치에서 한-미 관계는 물론 남북통일과 북-미 관계 중간자로서의 허리 역할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출 때, 이민 100주년을 맞는 감회가 더 의미 있으리라 확신한다.

최상진/ 목사·워싱턴 평화나눔공동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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