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사탕수수를 나르다 잠시 쉬고 있는 1920년대 한인 노동자들. 새벽부터 저녁까지 일해도 일당은 1달러가 안 됐다.

미국이라는 거대한 인종의 용광로에 처음 발을 디딘 세대는 어느 나라건 사회의 최하층이었다. 자신의 뿌리를 떠나온 사람에게는 떠날 만한 아픈 이유가 있게 마련이다. 그것은 주로 굶주림이나 차별이었다. 1903년 1월13일 고된 항해에 지친 모습으로 호놀룰루항에 처음 나타난 한인들도 마찬가지로 ‘돈 없고 힘 없는’ 손가락 마디마다 굳은살이 박인 촌부들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다 불쌍해…”

“돈 벌면 고향으로 돌아간다.” 하와이 땅을 밟은 한인들은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면서 일본이 이민을 중지하도록 압력을 넣기 전까지 이런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사탕수수밭에서 일당 69센트에 새벽부터 저녁까지 말 그대로 ‘뼈가 으스러지도록’ 일했고, 백인 농장주들은 이런 싸고 우수한 노동력을 두 팔 들어 환영했다. 그러나 사탕수수밭 한인 노동자들은 이내 유일한 삶의 목표인 귀향의 꿈을 접어야 했다. 조국이 대일본제국의 한 귀퉁이로 편입돼버린 것이다. 700여명 한인들의 삶은 태평양 한가운데 자리잡은 화산섬에 내동댕이쳐졌다.

2003년 1월13일은 미국 이민 100주년 기념일이다. 조국에게 버림받은 100년 전 초기 이민 세대와 그들의 2·3세대, 50년대 이후 들어온 이민 세대 사이에는 어떤 간극이 놓여 있을까.

“맨 밑층에 모여 있었는데 배 안은 정말 냄새나고 더러웠어. 이불을 둘둘 말아서 침상으로 섰는데 아픈 사람도 많았지. 며칠이 지났는지도 몰랐어. 나와 보니까 해 지는 게 보이데. 해가 물 속으로 들어가는 거야. 물이 부글부글 끓어. 난 ‘엄마! 물이 부글부글해!’라고 소리쳤어. 그때부터 항상 해가 물 속으로 들어가서 끓는 줄만 알았어. 나중에 학교에 들어가서 지구가 돈다는 걸 알았지.”

올해로 100살이 된 마거릿 림 할머니를 호놀룰루 근교 양로원에서 만났다. 그의 어머니는 경상남도 가난한 양반가의 딸이었다. 돈 많은 장사꾼 집안에 시집 가 림 할머니를 낳았으나 말할 수 없는 사정으로 인해 시댁에서 쫓겨났다. 친정에서도 집안 망신이라며 괄시받던 어머니는 우연히 하와이에 다녀온 외삼촌의 소개로 새 남편의 사진 한장 달랑 들고 림 할머니와 함께 배를 탔다. 1910년부터 1924년까지 하와이 현지에서 배우자를 구하기 어려운 한인 남성들이 고국에 사진을 보내 신붓감을 데려오던 ‘사진신부’ 이야기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림 할머니가 하와이에 도착한 것은 1914년, 그가 10살이 되던 해였다. 도착하자마자 림 할머니도 가족을 따라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했다. 1달러도 채 안 되는 돈을 벌기 위해 감독관의 채찍을 맞으며 쉴 새 없이 손을 놀렸다. “그땐 기계도 없고 모두 손으로 일했어. 여자들도 불 지펴놓고 사탕수수 같은 걸 넣고 일하면 얼굴이 다 까매져. …지금 생각하면 다 불쌍해….” 림 할머니는 울먹이며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14살 되던 해, 그는 “너무 공부가 하고 싶어” 이승만 박사가 세운 한인여자성경학원에 들어갔다. 그는 하와이에서 처음으로 한글을 배웠다. 낮에는 학교에 다니고 저녁에는 백인 가정의 식모 노릇을 했다. 배고픈 나날이었다. 주인은 임금 외에 빵 한조각 주는 법이 없었다. 어느 날 밤, 옆에서 같이 자던 식모가 “대임(림 할머니의 본명)아 부엌으로 통하는 유리창으로 가서 빵좀 가져와라”고 부탁했다. 여러차례 고민하다 결국 주인 집 부엌에서 빵을 훔쳐먹었다. “그래도 다행이야. 다음날 들키지 않았어.” 림 할머니는 당시의 일을 오늘처럼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게 힘들게 공부했지만 결국 학비문제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18살에 재봉틀을 팔던 남자와 결혼했다. 그러나 결혼생활은 공부하던 시절보다 더 힘들었다. 남편의 외도로 고민해야 했고 아이들을 거의 혼자 힘으로 키워나갔다. 결국 15년 뒤 남편과 이혼하고 ‘미스터 림’이라는 남자와 재혼했다. 림 할머니의 현재 성은 결혼하면 남편의 성으로 바꾸는 미국관습에 따른 것이다.

사탕수수밭에서 태어난 아이

사진/ 2002년 호놀룰루 그리스도 연합감리교회에서 율동을 배우는 아이들. 한인사회의 미래가 그들의 어깨위에 있다.

할머니는 지금도 별명이 ‘소셜 워커’다. 지금까지 이민자들의 일자리, 학교, 주택, 의료보험, 통역, 서류작성 등 각종 일을 도와왔다. 그는 또 억척스럽게 모은 100 달러를 본국의 친아버지에게 보내 밭을 사주기도 했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 수립 뒤 아버지가 병에 걸렸을 때 가족 중 이승만 반대파인 국민회 사람이 있다는 이유는 입국을 거부당했다. 당시는 친이승만파인 동지회와 반이승만파인 국민회가 대립하고 있었다. “이승만 그이는 자꾸 우리를 갈라놨어. 무슨 일이 있어도 싸우지 말고 힘을 합쳐야 해” 목발을 짚고 문 앞까지 취재진을 마중나온 할머니는 이런 말을 남겼다.

사진/ 10살 때 사진 신부 어머니와 함께 하와이로 온 마거릿 림 할머니.

사진신부, 사탕수수 농장 노동, 한인성경학교, 독립운동, 국민회와 동지회의 분열 등 림 할머니의 100년 인생에는 초기 이민의 역사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이민 1세대의 자취는 존경스럽다기 보다는 차라리 눈물겹다. 조국이 그들에게 해 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은 밑바닥 인생, 한글조차 깨우치지 못한 하층민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한인신문을 만들고 단체들을 조직하면서 그들은 잃어버린 조국을 되찾기 위해 맹렬히 싸웠다. 얼마 안되는 수입을 독립자금에 쓰는 바람에 돈을 제대로 축적하지 못한 사람들도 많다. <백범일지>에는 하와이 친구들의 재정적인 도움이 없었으면 윤봉걸·이봉창이 일을 도모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와이알루아 사탕수수 노동자 캠프에서 태어난 이민 2세 정남영 수의학 박사(84)는 당시의 풍경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지금도 남아있는 거대한 설탕공장 주변엔 너른 사탕수수밭이 펼쳐져 있었다. 그 곳에는 일본인, 중국인, 한인 등 다양한 인종들의 캠프가 있었다. “와이알루아 초등학교에 처음 들어 갔을 때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해. 첫번째 종이 울리면 맨발의 아이들이 교실 문 앞에 쭉 줄 섰지. 일본애, 필리핀애, 한국애 다 섞여 있었어. 두번째 종이 울리면 우르르 교실로 밀려들어갔어.” 서로 자기나라 말을 쓰고 거리에서 배운 영어밖에 몰랐지만 금방 서로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방학 때면 그도 농장에서 일해야 했다. 7시부터 9시간 정도 일하면 15센트를 받을 수 있었다. 농장의 피라미드형 계급구조에서 최고위층은 백인 농장주들이었고 그 다음이 주로 감독관을 맡은 포르투갈인이었다. 그 다음이 하와이 원주민들이었으나 정 박사는 “그 사람들은 일하기 싫어하고 보스가 되고 싶어 했다”고 기억한다. 밑바닥 노동자층을 형성하고 있던 한인들은 그러나 빠르게 상승했다.

이민 2·3세의 커밍아웃

사진/ 한인 3세로 하와이 최대서점 보더스에 한인 이민 100주년 기념 코너를 만든 다이앤 드콩트.

정 박사의 아버지는 경북 포항의 몰락한 양반가 후손이었다. 열여섯 살에 부모와 함께 하와이로 온 그는 상대적으로 교육수준이 높았다. 플란테이션 안에 있던 가게 종업원으로 일하다 야심을 가지고 재봉 학교에 다녔다. 정 박사가 여섯 살 때 가족은 와이알루아 농장 집을 버리고 트윈 브리지에 있는 테일러 숍으로 옮겨갔다. “그때도 우리집은 사탕수수 농장 한인들이 모이는 장소였어요. 금주령이 내렸을 때인데 어른들이 희고 걸쭉한 것을 먹고 있었어요. 나중에 몰래 지하실에서 막걸리 만드는 도구를 봤죠.”

이민 1세대는 자식의 교육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2차대전이 나면서 미군의 주문이 늘어나 가계도 활짝 폈다. 아버지는 의사나 변호사가 아니라 수의사가 되려는 자신을 탐탁치 않게 생각했으나 그는 결국 수의사로 성공했다. 그의 집은 하와이에서도 가장 상류층이 사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정 박사는 고등교육을 받으면서 한국어를 거의 잊어버렸다.

그는 이차대전 당시 미군으로 참전해서 1945년에 한국땅을 밟았다. “비행기가 착륙했을 때 조종사에게 여기가 김포냐고 물었죠. 비행기 문을 열자 붉은 먼지로 가득한 땅이 보이더군요. 김치냄새, 마늘 냄새도 났어요. 아, 여기가 내 나라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상처받은 나라, 너무나 가난한 나라였어요.” 아버지가 그렇게 애타게 그리워한 조국은 황량함으로 기억된다.

정 박사는 특이한 경우이지만, 초기 이민 2·3세대들은 부모를 이해할 수도 없었고, 이해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백인·일본인·중국인의 피와 섞이며 하와이 사회로 흘러들었다. 수십년간 그들은 자신에게 한국인의 유전자가 있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숨겼다. 식민지, 전쟁, 독재정권과 최루탄 자욱한 거리로 상징되는 가난한 나라는 ‘조국’이라는 호칭을 받을 자격이 없었다. 그러나 이민 100주년을 맞는 하와이 한인사회는 다시 초기이민자들의 삶을 망각에서 끄집어내고 있다.

초기 이민의 후손들이 스스로를 한인이라 ‘커밍아웃’한 것은 88올림픽 때부터였다. 한국의 발전상이 알려지자 이들은 조금씩 자기 안에 있는 한국인의 정체성을 드러냈다. 이민 100주년 기념 행사들이 치러지면서 초기 이민 2·3세대 중 행사를 적극 지원하는 사람들이 늘고, 60년대 후반 미국이 이민법을 개정한 뒤부터 들어온 후기 이민 세대들과도 대화의 길이 열렸다.

한인으로서의 내 모습은

‘보더스’는 하와이에서 가장 큰 도서 체인점이다. 그 중에서도 호놀룰루 모아나에 있는 보더스 서점은 가장 많은 고객을 자랑한다. 최근 이 서점에는 한인 이민100주년 기념 코너가 설치돼 눈길을 끈다. 서점 한켠에 한국 이민 역사와 문화에 대한 한글·영문 서적이 빼곡이 들어차 있다. 이 서점의 제너럴 매니저로 일하고 있는 초기 이민 3세 다이앤 드콩트(34)가 코너를 만든 당사자다. 이름에서도, 외모에서도 한인의 체취는 맡을 수 없지만, 그의 외할머니는 사진신부였다. 그는 “100주년 기념 코너는 모두를 위한 책코너”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뿐만 아니라 1월에 ‘호랑이의 세기’(Centry of tiger)라는 사진전을 열어 초기 이민자와 사진신부의 사진 등을 전시하고 큰 행사를 열 계획이다. 2월에는 한인작가 초청 사인회도 예정돼 있다.

그는 어머니에게 들은 초기 이민 외할아버지의 삶을 어슴프레 기억하고 있다. 외할아버지는 두번째 배를 타고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왔다가 나중에 가구공장에 취직했다. 어머니는 할아버지가 농장노동부터 가구공장 일까지 “정말 힘들게 살았다”고 말하곤 했다. 어머니는 본토에서 좋은 학교를 다녔으나 2차대전이 나서 교육을 포기하고 다시 하와이로 건너와 시청비서가 됐다.

드콩트가 다시 어머니의 나라를 떠올린 것은 기념사업회를 통해 100주년 기념행사와 한국문화를 알게 되면서부터다. “It is very exciting!(그건 정말 흥미로웠다!)” 일본이나 중국 문화와는 완전히 다른 체험이었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는 항상 한국인임을 자랑스러워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어머니와의 결혼을 반대했던 미국인 아버지의 가족들은 아직도 어머니를 인정하지 않는다.

“한인으로서 내 첫 번째 모습은 음식에서 찾을 수 있다. 내 아이들도 음식을 먹을 때나 한국에서 만든 텔레비전 드라마를 볼 때, 때로는 옷을 입을 때 한인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는 100주년 기념일에 즈음해서 열리는 코리안 페스티벌에도 반드시 참가할 생각이다.

“열린 한인사회를 원한다”

사진/ 코리안 페스티벌을 준비하는 후기 이민 1.5세대 안드레 리와 일본계 부인. "하와이는 모두를 위해 열려 있다"고 말한다.

코리안 페스티벌 준비위원회 공동의장인 안드레 리(34)는 1970년대 이민자유화의 물결을 타고 다섯살 때 하와이에 이민온 후기이민 ‘1.5세대’다. 70년대만 해도 학교 다닐 때 한인 친구를 거의 만날 수 없었고, 미 본토에서 대학을 마쳤기 때문에 한국어도 전혀 하지 못한다. 건축 엔지니어로 일하며 부인은 일본계다.

“아버지는 하와이에서 정말 힘들게 살았다. 그에 비하면 나는 행운아다. 그래서 어떻게든 한인사회를 돕고 싶었다.” 그는 코리안 페스티벌에 참가하게 된 계기를 이렇게 설명한다. 그러나 코리안 페스티벌은 한인들만이 아니라 하와이 모든 인종들의 축제라고 강조한다. 다인종으로 소문난 하와이 주민들이 한국문화를 배우고 즐길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이 없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일본·중국의 페스티벌도 그렇게 진행돼야 한다. “하와이는 모두를 위해 열려 있다. 모든 사람을 위해 페스티벌을 한다.” 그는 아이를 낳으면 미국과 일본과 한국을 똑같이 교육시킬 생각이다.

초기이민이든 후기이민이든 한인 2·3세대는 뼛속까지 한국인이었던 이민 1세대와 다르다. 그들은 모두를 위해 열려 있는 한인사회를 원한다. 안드레 리는 로스앤젤레스 한인들이 코리아타운 안에 너무 많이 있고 미국사회에 편입되지 않으려 한다고 비판한다. 즉, 한인사회는 미국인뿐 아니라 다양한 인종들의 커뮤니티와 협력해야 하고, 그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미국이민의 역사는 그들에 의해 새로 쓰여지고 있다.

호놀룰루=글 유현산 기자 bretolt@hani.co.kr·사진 김종수 기자 jongso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