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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사섹션 : 특집 | 등록 2002.12.11(수) 제438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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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아름다운 중독, 기부! 기부문화의 새 흐름 만드는 기부서클… 일상적 나눔의 문화를 일군다
말수가 적은 그들은 소리도 나지막했다. “그저 좋아서 하는 일인데….” 지난 11월20일 낮, 서울 마포구 성산동 디딤돌출판사. 김재광(40)씨와 홍연숙(32)씨에게 ‘나누는 사람들’은 일상의 작은 악센트였다. “돈이든 시간이든 에너지든 내 것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 쓴다는 건 삶에 적지 않은 변화입니다. 남한테 눈을 돌리며 사는 게 즐겁고 기쁘다는 걸 새삼 느끼죠.”
월급에서 기부금 떼는 사내 동아리
‘나누는 사람들’은 지난 7월에 생긴 사내 기부서클로, 김씨가 회장을, 홍씨는 총무를 맡았다. 직원들이 하나둘씩 참여하더니 현재 회원 수가 31명으로 늘었다. 회원은 매달 월급 가운데 5천∼2만원 안팎을 각자 약정해 기부금으로 뗀다. 이렇게 쌓인 한달 52만원 정도의 후원금을 결손가정 아이들이 다니는 산돌 방과후교실에 지원하거나 복지단체를 통해 불우아동한테 보낸다. 돈과 함께 시간도 기부한다. 한달에 한번꼴로 쉬는 토요일에 회원끼리 모여, 복지시설인 은평천사원 아이들 손을 잡고 오락실·노래방 등으로 외출 봉사를 나가는 것이다. 출발은 순전히 ‘빚진 마음’ 때문이었다. 불우아동을 돕는 동료 직원이 있었는데, 그가 회사를 떠난 뒤 지원은 끊겼지만 도움을 받아온 아이들이 사진과 편지를 계속 보내왔다. 이것이 “마음에 걸려” 김씨를 비롯한 몇명이 ‘나누는 사람들’이란 이름으로 다시 기부모임을 시작했다. 김씨는 “청년시절에는 개인의 선심과 푼돈으로 거리에서 구걸하는 사람들의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국가와 사회의 몫이라고 본 거죠. 하지만 나누는 사람들을 운영하면서 개인들의 작은 실천이 얼마나 필요한지 알게 됐다”고 말했다. 이날 낮, 나누는 사람들 가운데 13명은 회사 근처 식당에 모였다. 이달에 쓰고 남은 기부금을 어디에 후원할 것인지 서로 의논한 뒤 열흘 뒤에는 은평천사원에 3차 자원봉사를 가기로 의견을 모았다. 나누는 사람들 같은 기부서클이 점차 기부문화의 한 흐름을 형성해 가고 있다. 기부서클은 기부금을 함께 모은 뒤 어떤 자선단체에 기부할 것인지도 회원들이 스스로 결정한다. 그저 돈을 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기부자가 기부금 사용계획과 집행에 적극 참여하는 것이다. 기부정보가이드 정선희씨는 “기부서클은 프로페셔널 조직이 아닌 개인의 모임이다. 기부금을 어디에 쓸 것인지 회원들 스스로 결정한다. 비록 큰돈은 아니지만 사람들끼리 자연스럽게 모이는 기부서클은 우리나라 기부문화의 한계인 일회적이고 충동적 기부를 극복하는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우리 사회가 ‘빈곤 한국’에서 벗어났지만, 기부에서는 여전히 ‘빈곤’이다. 사회 환원에 대한 고민은커녕 전 재산을 그대로 자식한테 물려주는 재력가가 많고, 일부 기업인들은 법망을 교묘히 피해 불법상속을 꾀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경제위기 이후 심화한 빈부격차에 따라 기부의 손길을 기다리는 ‘그늘진 곳’은 더욱 늘었고, 노령인구와 가족 해체의 급속한 증가로 소외계층에 대한 보호가 더욱 절실하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 박경수 본부장은 “신자유주의 물결 속에서 복지국가가 쇠퇴하고 시장 논리가 횡행하고 있다. 개인과 민간에서 소외계층을 지원해야 할 필요성이 점점 많아졌다”고 말했다.
일회성 기부의 한계, 매달 2천원으로 극복
그동안 대규모 모금은, 적십사회비가 보여주듯 정부가 주도하는 준조세 성격을 띠었다. 자연히 자발성 부재 속에서 불우이웃돕기 ‘성금’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는 동원된 이벤트성 모금행사에 참여한 뒤 위안과 면죄부를 얻고, “올 여름에 수재의연금 한번 냈으니까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나는 할 일을 다했다”고 여기는 척박한 기부문화를 낳았다. 최근 다양한 형태로 생겨나는 기부서클의 의미는 여기에 있다. 기부서클을 통해 개인들은 강요나 ‘귀찮은’ 의무감을 넘어 자발적이면서 지속적으로 기부에 참여한다. 이를 통해 기부자의 정서적 삶도 풍부해진다. 큰돈 벌 궁리만 하고 가족 이기주의에 갇혀 있는 삶에서 벗어나 이웃과 세상을 위해 돈 쓰는 법을 배운다. 아름다운재단 이경현씨는 “기부 자체가 즐거운 행위고 스스로 행복해지는 일이다. 한번 지갑을 열기는 어렵지만 일단 열면 다음부터는 쉽게 열 수 있다. 우리는 이를 ‘중독’이라고 한다”고 했다. ‘아름다운 중독’인 셈인데, 개인들의 작은 기부는 공동체를 따뜻하게 할 뿐 아니라 한 사회를 유지하고 생존시키는 힘이 된다. 또 다른 기부서클 ‘2천원의 희망’은, 기부는 많이 가진 소수만의 자선이 결코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평범한 소시민들이 참여하는 이 서클은 한달 2천원 이상은 절대 받지 않는 독특한 원칙이 있다. ‘2천원의 희망’ 운영자인 엄경출(32·벤처회사 직원)씨 주머니에는 자기 명함 외에 ‘2천원의 희망’이라는 또 다른 광고명함이 수북이 들어 있다. 누군가를 만날 때마다 “당신의 기부금 2천원으로 세상의 아름다움이 커집니다”며 ‘2천원의 희망’을 나눠준다. “2천원이면 누구나 소년소녀가장돕기에 선뜻 참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죠. 저희 어머니, 직장 동료, 친구부터 시작한 것이 달마다 늘어 기부자가 194명으로 늘었습니다.” 194명은 의사에서 청소 아주머니까지, 가정주부에서 직장인까지, 아흔살 할머니부터 두살배기 아기까지 두루 걸쳐 있다. 흥미로운 건 기부자 가운데 정작 엄씨를 모르는 사람이 수두룩하다는 점이다. 엄씨한테 권유받은 사람이 다시 가지를 치며 그의 주변 사람들을 2천원의 희망에 참여시키는 식이기 때문이다. “곳곳에서 몰래 활동하며 희망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2천원의 희망을 키우는 거죠.” 엄씨가 사람 좋게 웃어보였다. 2천원의 희망은 부담없는 2천원이란 원칙이 보여주듯 단 한번에 그치지 않고 ‘가늘고 길게 가는’ 기부문화를 표방한다. 기부금 사용명세와 기부자 명단은 ‘2천원의 희망’ 사이트(www.freechal.com/2000won)에 올린다. 11월에는 적립금 38만6천원을 관악사회복지라는 기관을 통해 소년소녀가장들에게 후원했다. 2천원의 희망을 본뜬 아류들도 생겨 최근에는 대학생들이 만든 TTL(Two Thousand Love)이란 기부클럽이 결성되기도 했다.
1%, 그 아름다운 실천을 아는가
대표적 모금단체인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1998년 전체 모금액을 보면 개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33.6%에 그치고, 상당부분을 기업에 의존한다. 반면 미국에서는 폭넓은 개인의 참여가 기부문화의 저변을 이루고 있다. 98년 미국의 자선모금 총액 가운데 개인이 85%를 차지했을 정도로 개인 기부가 두껍게 형성돼 있다. 특히 미국 가구의 가계부 항목 가운데 주거비·교육비 등에 이어 기부가 서너 번째 순위에 들어가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달리 우리나라는 “기독교를 믿는 40대 자영업자가 기부를 주도하고 있다”(순천향대 황창순 교수)는 것 외에 기부금액에 대한 공식통계는 없다. 그 만큼 기부는 그동안 ‘남의 일’이었다. 한 사회의 부와 가치의 총량이 제한돼 있다면, 많이 가질수록 그만큼 더 나누는 게 사회적 책임이란 면에서 당연하다. 그러나 꼭 많은 것을 가져야만 나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름다운재단의 기부회원들(2500여명)은 월급뿐 아니라 유산, 전문성, 끼(춤·노래 등), 용돈, 금연, 절주, 기념 등 무엇이든지 ‘아름다운 1%’를 남에게 내놓는다. 결혼·생일·졸업 축하금 가운데 1%, 담배 끊고 술을 줄여 생긴 1%를 기부하는 식이다. 이런 기부물결은 동심원을 이루며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간다. 종군위안부 출신 김군자 할머니가 전 재산을 기부하자, 이 사연을 전해들은 울산의 노점상 박음전 아주머니가 번 돈의 1%를 꼬박꼬박 냈고, 박씨의 얘기를 전해들은 한 농부가 다시 아름다운재단에 동참했다. 아름다운재단 이경현씨는 “향기가 퍼져나가듯 아름다운 1% 릴레이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연말연시면 그제서야 관심이 있는 일회성 기부를 넘어, 마라톤을 통해 일상적 기부문화운동을 펴는 사람도 있다. 마라톤 동호인 김현우(43·송파구 가락동)씨는 크고 작은 마라톤대회가 열릴 때마다 결식아동돕기 성금을 모은다. 마라톤 대회 속에 또 다른 ‘사랑의 레이스’가 펼쳐지는 셈이다. 서울마라톤클럽 등 주요 마라톤 사이트에 결식아동돕기 사랑의 달리기를 띄운 뒤, 여기에 참가하는 기부자들로부터 후원금으로 1만원 이상씩 받아 사랑의 달리기계좌에 넣는다. 애초 제시한 기록보다 실제 완주기록이 늦으면 1분당 1천원, 빠르면 1분당 2천원씩 벌금명목으로 후원금을 나중에 또 받는다. 김씨는 최근 이렇게 150여명한테 모은 성금 706만원을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전달했다. “마라톤 동호인끼리 각자 완주시간을 내걸고 점심 얻어먹기 경쟁을 벌였는데, 이럴 게 아니라 결식아동을 돕는 게 좋겠다고 누가 제안하더군요. 뉴욕마라톤 같은 외국 스포츠대회를 보면 우승 상금을 비롯해 상당액의 기부금이 쌓이곤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관행이 정착되면 좋을 텐테….”
다양한 방식으로 기부의 기쁨 누려
지난 96년 첫선을 뵌 자동응답서비스(ARS) 모금은 누구나 쉽게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기부문화 확산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모금액 경쟁 속에서 ARS는 사람들을 더 울려 더 많은 성금을 모으기만 할 뿐 기부에 대한 잔잔한 성찰은 빠져 있다. 집안에서 텔레비전을 보다 전화번호 한번 누르고 마는 데 그친다. 이와 달리 기부서클에서는 누구나 ‘아름다운 기부’를 직접 느끼며 일상적이고 지속적으로 참여한다. 그런 점에서 기부서클은 기부문화의 새 흐름을 열어가고 있다.
글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사진 류우종 wjryu@orgi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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