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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 곁에서 왕족처럼 산다 풍수·명당 내세운 서울 강북의 궁궐 마케팅… 역사의 흔적 지우고 왕궁의 생활 즐긴 건가
“궁궐이 마당처럼 내려다보이는 곳” “땅의 기운이 넘쳐 대대로 번영을 꿈꾸던 곳” 조선시대 ‘명당’은 수백년의 세월을 넘어 21세기 사람들에게도 강력한 상품이다. 경복궁·광화문을 중심으로 경희궁~창덕궁으로 이어지는 강북 옛 도심에 들어설 아파트·오피스텔들이 ‘궁궐’과 ‘터’를 키워드로 내세워 눈길을 사로잡는다.
강북 개발의 키워드로 자리잡아
서울 종로구 경운동 종로경찰서 옆에 자리잡은 한 오피스텔 모델하우스. ‘운현궁 SK 허브’라고 이름 붙인 모델하우스에 들어서면 분양 컨설턴트들 뒤로 커다란 스크린이 눈에 들어온다. 길 건너편 운현궁을 마치 내 집 안마당처럼 내려다보며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오피스텔 모습을 시뮬레이션해놓은 것이다. 지붕끼리 어깨를 마주하고 옹기종기 모여앉은 한옥들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모형 앞에 서서 설명을 하던 컨설턴트는 “실제로 3층 건물 뒤에 자리잡은 방은 3층 이상만 되면 운현궁이 잘 보인다. 운현궁이 보이는 쪽이 인기가 높아 남은 게 거의 없다”고 말했다. 지상 14층·8층 2개의 동에 모두 13~29평 규모의 430실을 갖춘 이 오피스텔은 분양 일주일 만에 80%가 빠질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 층수와 조망에 따라 평당 분양가를 차별화해서 운현궁이 가장 잘 보이는 방향의 꼭대기층은 평당 최고 860만원이고, 전혀 보이지 않는 쪽 1층은 790만원이다. 애초 오피스텔 이름을 정할 때 시행사인 개천사업은 운현궁과 함께 인사동·안국역을 놓고 한동안 저울질을 했다. 개천산업 김용현 상무는 “시민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10명 가운데 6~7명 정도는 운현궁 위치를 잘 몰라 운현궁 대신 인지도가 높은 인사동 또는 지하철 안국역을 내세울 것인지를 놓고 고심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이 오피스텔이 운현궁이란 이름을 붙인 것은 “궁궐에 둘러싸인 옛 도심이라는 이미지를 광고하는 게 더 낫다는 판단”에서였다. 데코라인컨설팅 김민철 상무는 “업무용보다는 주거용 오피스텔 성격이 강해 전통 고품격이란 이미지를 내기 위해선 궁궐 주변이란 점을 내세우는 게 효과적”이라고 말했다. 특히 이 주변 임대 수요자들은 세종로 일대에 근무하는 외국인이 많아 한국적 맛을 느낄 수 있는 환경이라는 점을 강조해야 했다는 것이다. 강북 옛 도심에 ‘궁궐바람’이 분 것은 지난해 주상복합 아파트와 오피스텔을 결합한 ‘경희궁의 아침’이 대박을 터뜨리면서부터다. 문틈 사이로 보이는 왕궁의 뜰이나 연못에 비친 경희궁의 아침을 표현한 광고는 아름다운 궁궐을 내 집 정원처럼 즐길 수 있다는 발상을 심어줬다. 이와 함께 땅의 정기가 모인 조선시대 왕궁터이자 왕실의 자금을 관리한 내수사가 있던 곳이라며 명당임을 적극적으로 선전했다. 아파트 조경을 옛 전통정원으로 꾸미고, 꽃담과 같은 옛 궁궐의 건축적 요소를 끌어들이기로 했다. 시끄럽고 매연이 심한 도심이 주거지로 인기가 있겠느냐는 세간의 통념을 깨고 ‘경희궁의 아침’은 폭발적 인기를 끌었다. 외국인 임대자들이 주소지를 쉽게 알릴 수 있도록 ‘킹스 가든’이라는 별칭을 달고 있는 ‘경희궁의 아침’은 재미동포들을 상대로 로스앤젤레스서 주최한 사업설명회에선 옛 궁궐로 둘러싸인 곳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궁중의상 패션쇼를 여는 등 치밀한 이미지 마케팅을 펼쳤다.
“고급스러움 상징하는 최고의 이미지”
쌍용건설의 ‘경희궁의 아침’ 이후 건설업계에선 궁궐과 왕족을 내세운 주거군락이 속속 등장했다. 금호건설은 맞은편에 오피스텔 용비어천가(龍飛御千家)를 분양했다. 세종 때 선대의 왕업을 찬양해 지은 노래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서 뒤 두 글자 한자어만 바꿔 ‘집 1천 가구’의 뜻을 살린 것이다. 덕수궁과 이웃한 신문로에 들어설 주상복합 아파트 킹덤타워나 한국일보 옆에 들어설 주상복합 아파트 로열팰리스 스위트 또한 왕국·왕궁의 이미지를 표현하려고 했다. 23층에 이르는 신문로 광화문오피시아는 이름에서는 직접 드러나지 않지만 광고의 한축을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에 둘러싸인 천혜의 명당”으로 잡았다. 브랜드메이저 서상희 이사는 “전국 어디서나 똑같은 이름을 달고 짓는 패밀리브랜드와 달리 용비어천가나 킹덤타워 같은 개별 브랜드는 장소성을 강조하게 마련인데 강북 도심에선 왕궁이 고급스러움을 담보하는 최고의 이미지”라고 말했다. 대부분 테헤란로를 중심으로 강남쪽에 쏠려 있는 도심권 오피스텔이 강북 도심으로 활발히 번지는 것은 도심 재개발사업과 맞물려 독신자 가구가 꾸준히 증가하고 세종로·광화문 일대 외국인 임대수요가 늘었기 때문이다. 한화개발 김인성 차장은 다양한 주거형태의 확산을 이유로 든다. “이전엔 주거공간 하면 패밀리형태만 생각했는데 이젠 돈 많은 젊은이도 있고 다른 생활양식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들은 대규모 쇼핑몰이나 학교, 어린이 놀이터 같은 조경시설이 필요 없다. 대신 1~2인용 공간에 월풀욕조를 넣는 등 고급스러운 인테리어를 선호한다. 외국도 도심 한가운데 주상복합 아파트 같은 형태의 콘도미니엄들이 많다.” 천편일률적인 남향 아파트 선호에서 벗어나 조망권을 중시하는 추세는 점차 강화되고 있다. “문화유산이자 그 자체가 하나의 공원인 궁궐 조망권 역시 현재는 분양가에서 10% 안팎을 벗어나지 않았지만 앞으로 실거래될 때는 프리미엄이 얼마 붙을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렇게 궁궐이나 명당을 내세우며 도심이 새로운 주거타운으로 변신하는 모습을 놓고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먼저 문화재와 인접한 지역이기 때문에 유적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은 경우엔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문화개혁시민연대는 ‘경희궁의 아침’ 공사가 시작되기 전 답사를 통해 공사현장에 경희궁 옛 담이 일부 남아 있음을 밝혀냈다. ‘경희궁의 아침’은 현재 정해진 경희궁 영역에서 평균 160m가량 떨어져 있다. 하지만 담의 존재로 인해 본래 경희궁 영역이 재개발지역에까지 미쳤음이 확인됐다. 이렇게 아파트 현장에서 궁궐담이 발견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은 경희궁터 영역이 워낙 폭력적으로 파괴된 뒤 제대로 복원절차를 밟지 못했기 때문이다.
문화재터에 아파트 허가 내주다니…
1910년 일제에 합병되기 한해 전부터 이곳에 일본인 자녀들이 다닐 중학교(조선총독부립중학교)를 지었다. 이 바람에 경희궁 전각들은 대부분 헐려 없어지고 몇개 남아 있는 건물도 일제시기에 이리저리 팔려나가는 수난을 당했다. 한때 서대문에까지 이르른 영역은 학교 주변에 사는 일본인을 위한 주택지로 불하됐다. 1988년 경희궁 복원작업이 시작됐지만 현재 ‘경희궁터’로 알려진 영역은 예전에 광대한 궁궐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문화연대는 “‘경희궁의 아침’은 현재 문화재법상으론 문제가 없지만, 실제로 경희궁터 경계가 어디까지였는지를 근본적으로 짚어보면 문화재터에 아파트 허가를 내준 셈이 된다”는 입장이다. 급조해서 만든 도시 강남과 달리 누대의 시간이 켜켜이 쌓인 강북의 도심은 개발방식이 달라야 한다는 지적이 높다. 건축가 정기용(기용건축 대표)씨는 “길이야말로 도시의 역사를 확증하는 실핏줄이다. 옛 도심에 남아 있는 길들은 누군가의 머릿속에서 인위적으로 조작된 것이 아니라, 물길의 흐름을 따라 자연스럽게 이뤄진 길이며 필지의 모양 역시 그 길들을 따라 나뉜 것이다. 옛길을 없애고 필지를 합쳐 거대한 건물을 지어올리는 것은 역사적 흔적을 없애는 폭력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제까지 서울이란 도시의 역사는 도심 공동화와 역사 파괴라는 두 가지 방향으로 진행돼왔다고 말한다. “이제 도심 공동화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도심에 주거군락을 만들면서 기존과 같은 방식으로 개발하면, 궁궐·왕족 이름을 붙인다고 해서 역사가 돌아오겠는가. 이는 단순한 이미지의 귀환일 수밖에 없다.”
명당의 장점 지워지고 이미지만 나부껴
“좋은 터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라는 건설회사의 홍보문구는, 되레 좋은 터에 새겨진 도시의 조직, 세월의 나이테를 하루아침에 걷어내는 일에 물음표를 찍게 한다. 경희궁이 권력을 지속적으로 잡기 위한 공간의 전략이었다면, 오늘날 궁궐 일대에 들어서는 주거타워들은 역사와 문화라는 상징을 효과적으로 팔아내려는 단수 높은 자본의 전략일 것이다.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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