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집 ] 2002년11월07일 제433호 

홍대앞 20년, 그 문화적 실험들

소규모 작업실 모여 작가들 보금자리로… 클럽문화 이끌며 예술인 사랑방 구실도

‘홍대앞’이라고 하면 홍익대 정문부터 지하철 2호선이 있는 큰길까지 200m 남짓한 차도를 중심으로 그 좌우에 펼쳐진 서교동~상수동 일대를 일컫는다. 본래 이곳은 홍대 캠퍼스가 넓게 차지하고 있었는데, 60년대 들어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해 땅을 대규모로 매각하면서 차츰 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홍대앞이 작가들의 보금자리가 된 것은 1984년 여름 대홍수부터였다. 그전까지 화실이 몰려 있던 청기와주유소 주변과 망원동 일대가 온통 물에 잠겨버리자, 작가들은 지대가 더 높은 와우산 주변 홍대앞으로 옮겨올 수밖에 없었다. 이때만 해도 작가나 미대생들은 개인 화실에서 자신의 작업을 하는 동시에 중·고등학생들에게 그림을 가르쳐주며 돈을 벌었다. 지금처럼 홍대~산울림소극장까지 와우산길 양쪽으로 대형 미술학원 거리가 생겨나기 시작한 것은 86년께부터였다. 미술을 전공하지 않았지만 경영 수완이 있는 원장들이 강사들을 고용해 입시생을 지도하는 전문학원이 등장한 것이다. 수업이 끝나는 밤 10시쯤 이 거리에 가보면, 학원에서 와르르 쏟아져나오는 아이들과 이들을 태워가려는 차량들이 북적여 마치 야간자율학습을 끝낸 고등학교 앞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을 하게 한다.

미술학원 거리와 반대편, 홍대~극동방송으로 가는 길은 90년대 초까지 ‘빨간 벽돌 거리’로 불렸다. 지금은 그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예전엔 한 블록 전체가 붉은 벽돌 건물로 가득했다. 빨간 벽돌 거리의 시작은 1977년 건축가 김기석씨가 ‘우리마당’이라는 건물을 설계하면서부터였다. ‘우리마당’이 지어진 뒤 몇년에 걸쳐 이웃한 집주인들이 김씨에게 설계를 맡기면서 ‘누나네’, ‘성채’라고 이름붙인 상가 건물들이 들어섰다. 붉은 벽돌 위에 튀어나온 창, 아치형 문, 마당이 어우러진 이 ‘우리마당’ 연작은 주변 건물들의 모습도 붉은 벽돌로 탈바꿈시켰다.

빨간 벽돌 거리에서 주차장 골목으로 이어지는, 후일 피카소 거리라고 불리는 곳에 88년께 안상수 교수(홍익대 시각디자인과)가 문을 연 전자카페 ‘일렉트릭’은 홍대다운 실험정신이 반짝인 공간이었다. 배윤호(36·영상작가)씨는 “채팅할 수 있는 모뎀 달린 PC가 있었고, 핑크플로이드의 <더 월> <전함 포템킨> 같은 당시엔 접하기 어려운 영상물들을 틀어줬다”고 기억한다. 요일마다 돌아가며 영화·애니메이션·다큐멘터리 모임이 열렸고, 지금은 미술계의 내로라 하는 작가인 최정화·이불씨도 한때 ‘일렉트릭’에 드나들며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92~93년께엔 ‘오렌지족’ 바람이 불었다. 80년대 초·중반에 해외유학을 다녀온 젊은이들이 빨간 벽돌 거리에서 주차장 골목으로 이어지는 피카소 거리로 모여들었다. 차량과 사람이 번잡하지 않은 거리, 첨단 유행으로 실내를 꾸민 모던한 카페·바는 오렌지족을 손짓했다. 이때만 해도 대다수 홍대 학생들은 놀이터앞 ‘계단집’에서 막걸리를 사발로 들이켜고 계란말이 안주를 먹으며 행복해하던 시절이었다. 작가 권오상(29)씨는 “‘홍대앞’과 ‘홍대’의 구분이 생겨난 것이 이때쯤부터”라고 말한다.

술을 마시다 마음 내키면 일어나 춤을 추던 90년대 초반 록카페를 거쳐 오늘날 테크노클럽에 이르기까지 홍대앞 클럽사를 말할 때 ‘발전소’는 결코 빼놓을 수 없다. “92년 말 문을 연 발전소는 철근·콘크리트를 그대로 노출시킨 대담한 인테리어에 외국 영화에서나 보던 끈적끈적한 음악이 흐르고, 5천원만 있으면 내키는 대로 춤출 수 있는 획기적인 공간이었다.”(김작가·음악월간지 기자) ‘발전소’ 이후 우후죽순 생겨난 클럽은 테크노·힙합·록 등 여러 장르로 분화돼가며 ‘클럽 골목’을 이뤘다. 이 가운데 지금은 사라진 ‘언더그라운드’는 미대 학생회장 출신 하성채씨가 운영한 클럽으로 황지우씨 같은 문화·예술계 사람들이 모여 자연스레 어울리던 ‘야간 사랑방’이었다.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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