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구영아

‘익스큐즈 미’를 연발하며 발을 디뎌야 했다. 천장에서 쏟아지는 조명발 아래 푸르스름한 담배연기가 자욱하다. 강한 비트의 가락이 스피커에서 폭발할 듯 터져나오고 몸은 이를 따라 저절로 출렁인다. 20평 남짓한 홀이 이날은 200명도 넘는 사람들이 뿜어대는 숨결로 가득 찼다.

10월25일 밤 11시. 서울 홍익대 앞 클럽들은 이날로 18번째를 맞는 ‘클럽데이’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1만원으로 티켓 한장 끊으면 클럽 10곳을 맘대로 드나드는 날. 밖에선 늦가을로 접어드는 제법 굵은 빗방울이 내리고 있었지만 이 클럽에서 저 클럽으로 순례를 계속하는 ‘메뚜기 클러버’(클럽을 찾는 사람)들의 행렬은 멈추지 않았다. 춤추느라 정신이 없는 무리들 가운데 벽에 붙어 조용히 맥주를 홀짝이는 푸른 눈과 마주쳤다.

미군 ‘봉쇄정책’이 나오기까지

“주한미군으로 온 지는 1주일밖에 안 됐다. 이태원 클럽도 가봤지만 그곳은 미군들만 있다. ‘진짜 한국인’들을 만나고 싶어 이곳에 왔다.” 동료와 함께 놀러온 G·I 데이비드(가명·26)는 사실 클럽의 ‘불청객’이다. 클럽데이를 주최하는 업주들끼리 이날부터 미군을 출입시키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다. 클럽 입구엔 ‘싸움·성희롱 등을 하면 쫓아낸다’고 완곡하게 표현했던 빨간 종이에 더해 ‘미군 출입금지’를 알리는 노란 종이가 새로 붙었다. 손님을 들여보낼 때도 예전보다 꼼꼼하게 신분증을 확인한다.

데이비드는 요행히 이날 입구에서 걸리지 않은 경우였다. 한국에 오기 전 일본 오키나와에서 근무했다는 그는 클럽들의 이런 조처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다. “좋은 미군도 있지만, 어리석은 짓을 하는 미군도 있다. 오키나와에선 이미 여러 클럽들이 미군을 안 받고 있다. 그런 곳에 출입하다 걸리면 바로 끌려간다.” 수갑 채우는 시늉을 해보이며 그는 “앞으로 이 클럽에서 받아주지 않는다면 다른 클럽들을 찾아 놀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데이비드와 달리 단골클럽에서 문전박대를 당한 러스(22)는 몹시 기분이 상해 있었다. 클럽 바로 옆에 자리잡은 바에서 혼자 술을 마시고 있던 그는 늘 가던 클럽 두 군데서 퇴짜를 맞았다. “주말마다 홍대앞에 와서 놀았는데 이렇게 거부당할 줄은 몰랐다. 나쁜 짓 하는 사람만 제한하면 되지, 미군 전체를 막는 건 차별이라고 생각한다.”

홍대앞 클럽들이 이처럼 미군들에게 ‘봉쇄정책’까지 펴게 된 것은 지난해 9·11 테러 이후 미군들이 폭증했기 때문이다. 이슬람 사원을 중심으로 아랍계가 밀집한 이태원 일대에 ‘근신령’이 내려지자 홍대앞 클럽이 부상했다. 가까이는 이태원, 멀리는 동두천·의정부·송탄에서부터 택시를 대절해가면서 떼지어 몰려든 것이다. 여기에 ‘가이드’ 역할로 미군과 동행한 기지촌 유흥업소 여성들이 동참하면서 이태원과 흡사한 밤풍경이 연출됐다.

폭력사건도 잦아지자 한달 전부터는 주말 밤이면 전경 수십명이 거리에 깔려 경비를 서고 있다. 클럽 ‘흐지부지’ 채희준 사장은 “미군들의 경우 클럽에서 행패를 부려 경찰에 신고하더라도 군에서 나와 데려가면 그만”이라며 ”한국 경찰력도 미치지 않고, 기물이 파손돼도 보상받을 방법이 사실상 없다”고 말했다. 미군이 늘어나자 홍대 학생회 등이 우려를 표시하기 시작했고, 미군 장갑차에 의한 여중생 사망사건으로 반미감정이 불붙자 업주들은 ‘결단’을 내렸다. 주요 클럽 10곳은 ‘출입금지’를 결정했다.

대부분 외국인 클러버들은 이런 조처에 만족스러워했다. 인도네시아에서 유학온 아디트(22)는 “한달 전쯤 한국인 여자친구와 춤추고 있는데 미군이 여자친구에게 무례하게 추근대 몹시 불쾌했다”며 출입금지를 환영했다. 베를린 출신인 카야(25)는 “나는 외국인 여성이라 미군들이 함부로 대하지 못하지만, 이들을 별로 안 좋아하기 때문에 클럽에서 마주치지 않아도 된다니 기쁘다”고 말했다.

공동 창작 기지 vs 고수익 보장 상가

사진/ '걷고 싶은 거리' 사업이 끝난 길. 옛 거리 흔적은 말끔하게 지워지고, 깨끗하게 정비된 길은 주변 땅값 상승을 부른다.

하지만 클럽들이 ‘미군의 점령’으로부터 벗어나느냐의 문제는 요즘 홍대앞이 안고 있는 많은 숙제거리 중 한 부분에 불과하다. ‘놀기 좋은 곳’을 넘어서 문화적 생산기지로서 홍대가 독특한 동력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출판사를 운영하는 조윤석(전 황신혜밴드 멤버)씨는 작가들의 창작공동체가 사라지는 것을 가장 염려스러워한다. “건축과를 다닌 저는 학교에서보다도 친구들의 작업실에서 더 많은 것을 배웠어요. 작업실에 놀러가서 화집을 돌려보고, 음악 듣고, 토론하면서. 작가들이 혼자서 작업한다는 것은 한계가 많아요. 함께 놀고 이야기하고 공부하면서 창조적인 아이디어도 생겨나는 거죠.” 그는 홍대앞이라고 바스키아 같은 예술가가 나오지 말란 법 있느냐고 반문했다. ”뉴욕이나 서울이나 작가들 다 마찬가지로 클럽에서 놀고 벽화 그리는데, 미국에서만 그래피티 해야 세계적 예술가가 되나요 홍대앞도 그런 예술가를 배출할 수 있는 공동체적 역량이 쌓여 있다면 가능한 일이에요.”

예전부터 이곳에 화실·작업실이 몰려 있는 것은 멕시코미술대학 다음으로 세계에서 제일 규모가 크다는 홍대 미대라는 배경이 있기도 했지만 싼 임대료 때문에 가능했다. 홍대 미대 87학번인 최금수(이미올로지 연구소장)씨는 “대학 다닐 때만 해도 108작업실(보증금 100만원에 월세 8만원이어서)이나 208화실(200만원에 8만원) 같은 저렴한 공간이 있었다”고 기억했다. 하지만 최근 임대료가 껑충 오르면서 홍대앞 생활을 견딜 수 없는 작가들은 경기도 등으로 많이 빠져나갔다. 땅값 상승과 함께 수익을 더 많이 내기 위해 주택들이 상가로 바뀌고 원룸식으로 바뀌면서 작업실로 많이 쓰이던 차고·지하실 같은 공간도 사라졌다. 지난 2월부터 8평자리 차고를 개조해 디자인기획사 사무실로 쓰는 최씨는 가격대·위치·규모가 적당한 공간을 찾는 데 1년이 걸렸다.

사진/ "한국, 맞아?" 주말 밤 홍대앞은 외국인이 태반이다.

작업공간뿐 아니다. 막걸리집부터 고급 카페까지 겹겹이 다양한 층위가 존재해 주머니 사정 닿는 대로 선택할 수 있었던 홍대앞 상권도 변해가고 있다. 이 때문에 지갑이 얇은 젊은 작가·뮤지션들의 동선도 대폭 축소됐다. 인디밴드 ‘지누집레이블’ 보컬인 ‘으흠’은 “돈을 적게 들이고도 오랜 시간 친구들과 모임을 가질 수 있는 장소가 대부분 사라졌다”고 말한다. “군, 한뮤직, 밥딜런… 모두 최근 1년새 없어졌어요. 안주 안 시키고 한잔에 1500원 하는 맥주 마시며 세 시간 동안 떠들어도 눈치 안 주던 호프집들이었죠. ‘군’ 사장님을 얼마 전 우연히 만나 물어봤더니 임대료가 올라 도저히 수지를 맞출 수 없어 문을 닫았다고 하더군요. 빵 하나씩 사들고 우르르 모여앉아 몇 시간씩 세미나했던 올리브베이커리도 다른 매장으로 바꾸려고 공사 중이죠. 이젠 형편 안 되는 날엔 편의점에서 먹을 것을 사들고 놀이터에 주저앉아 이야기할 수밖에 없어요.”

‘클럽데이’ 같은 날엔 홍대앞을 찾는 클럽족이 대략 5천명이 넘지만, 클럽 운영주들도 ‘돈’의 압력으로부터 예외일 수 없다. “올해 임대료가 50~100% 뛰었어요. 월세 150만원에서 하루아침에 350만원 달라고 하면, 아무리 음악의 질을 따지는 사장이라도 결국엔 돈과 음악 사이에서 타협하게 되죠.” ‘마트마타’ 문종호 사장은 “그 결과 클럽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DJ들의 수명이 짧아졌다”고 말한다.

그 많던 라이브클럽은 어디로 갔나

사진/ 홍대앞 주변 합주실에서 연습하고 있는 인디밴드. 최근 이런 합주실이 많이 사라졌다.

테크노전문 클럽인 ‘마트마타’의 경우 평일엔 손님을 고려해 춤추기 쉬운 ‘디스코하우스’를 주로 틀도록 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박봉에도 자신만의 음악을 하고 싶어 DJ를 택한 이들과 ‘음악적 불화’가 생겨나기 쉽다. 예전엔 한 클럽에 몸붙이면 최소한 1년은 가던 DJ들이 요즘엔 5~6개월마다 바뀌는 추세다. 문 사장은 또 요즘 클러버에 대해 ‘모래알 손님’이라 표현을 쓴다. “클럽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는 창조적인 젊은이들은 드물어요. 춤만 추러 오는 거예요. 예전엔 원하는 음악을 틀어주면 안개꽃을 한아름 사들고 와서 바닥에 뿌려놓고 누워 ‘행위예술’을 하는 손님도 있었죠.”

98년쯤부터 생겨나 ‘언더그라운드의 산실’, ‘인디밴드의 전당’으로 불렸던 라이브클럽 무대도 2년 전부터 수가 대폭 줄었다. ‘라이브클럽’이라는 유행이 피어나던 90년대 말엔 10곳이 넘던 라이브무대가 지금은 5~6곳 정도다. 음악전문 잡지 기자인 ‘김작가’(월간 )는 “문닫는 가게는 늘어도 새로 여는 곳은 없다”며 “현존하는 클럽도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심하다”고 지적했다. 간판급 밴드를 보유한 클럽엔 이 ‘스타’를 보기 위한 고정관객이 여전하고, 연주를 원하는 밴드가 줄섰지만, 나머지는 바를 겸업하며 적자를 메우는 식이다. “혹 ‘스타밴드’를 배출하더라도 일단 이들이 지명도를 얻어 대형기획사와 계약을 맺고 나면 더 이상 클럽 무대에 서지 않죠. ‘언더’에서 ‘오버’로 쳐오르는 흐름이 끊임없이 이어져야 하는데, 우리는 그렇지 못한 상황이죠. 홍대앞 클럽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델리스파이스’, ‘크라잉넛’, ‘자우림’이 가능하겠어요 ‘언더’에서 계속 물갈이를 해줘야 라디오나 텔레비전에서 ‘괜찮은 음악’도 들을 수 있는데….”

홍대앞이 ‘인디’의 보금자리에서 벗어나 전면적인 상업화의 길로 들어선 징후는 이미 곳곳에서 발견된다. 당인리화력발전소로 석탄을 나르던 철길이 있던 ‘주차장골목’. ‘걷고 싶은 거리 조성사업’이 진행 중인 이곳을 두고 신촌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높다. 청년문화가 사라지고 특색 없는 ‘먹자골목’, ‘유흥가’로 전락한 신촌처럼 변해갈지 모른다는 걱정이다. 용산~수색으로 가는 철로가 인접한 서교동쪽 주차장 골목은 한 블록 전체가 삼겹살·통돼지·갈비 등의 간판으로 뒤덮였다. 5~6년 전부터 신촌 일대 몰려 있던 고깃집들이 차츰 옮겨오는가 싶더니, 지난해 ‘걷고 싶은 거리 사업’을 시작하며 길 정비가 시작되자 기존 상인들에 더해 새로 들어온 업주가 잇따라 개업했다. 본격적인 ‘돼지마을’로 둔갑한 것이다. ‘걷고 싶은 길’이 본의 아니게 ‘굽고 싶은 길’이 돼버렸다.

홍대앞의 자유분방함을 즐기고 싶다

사진/ 홍대앞 클럽에서는 매달 마시막 금요일마다 '클럽데이'가 열린다. 이날은 춤을 추려는 국내의 젊은이들로 가득 찬다.

‘걷고 싶은 길’ 사업으로 환경이 정비되자 주변 가게 권리금도 많게는 1억원씩 올라 고수익을 올릴 수 있는 새로운 가게의 개업을 부채질한다. 상업화가 급물살을 탄다는 증거는 최근 2년간 서교동 일대에 들어선 가게 수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새로 문을 연 식당·술집·카페 등은 215곳이나 되는 반면 구청에 폐업신고를 낸 곳은 34곳밖에 안 된다. 최정한 공간문화센터 대표는 “홍대 입구 지하철 역세권 고층건물 군락으로부터 비롯된 개발 바람이 그 이면도로를 넘어 급속히 퍼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최 대표는 “지금 시작된 변화들이 전체 모습을 훼손하기 전에 지구단위계획 지정을 서두르고, 특히 문화벨트로 기능이 살아 있는 홍대 건너편 놀이터에서 클럽골목 일대를 문화지구로 묶어 가꿔야 한다”고 제안했다.

대학시절부터 홍대앞을 즐겨 찾았다는 회사원 김아무개(31)씨는 “가끔 여고생처럼 머리를 양갈래로 묶고 외출하고 싶을 때는 홍대밖에 갈 곳이 없다”고 말한다. 명품다운 세련됨을 강요하는 청담동이나 유행하는 스타일로 옷을 차려입고 나서야 면이 서는 신촌이나 대학로와 달리, 홍대앞에서는 제멋대로 입고 먹고 놀 수 있다는 것이다. 그만큼 홍대앞은 ‘자유분방함’을 소비하려는 이들에게 경쟁력이 있는 거리였다. 닭갈비가 인기 있으면 닭갈비집이 우르르 들어서고, 찜닭이 뜨면 너도나도 찜닭집 간판을 다는 식의 상업 마인드는 이곳의 고유한 밑천을 갉아먹는다. 유행을 타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거리. 개성이 곧 유행인 거리. 홍대앞에 거는 기대다. 그래서 이곳을 사랑하는 이들은 부동산 개발 바람에서 비롯된 변화의 소용돌이를 염려한다.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