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12시 룰라 후보의 지지자들은 상파울루 시내 중심가 파울리스타 거리로 쏟아져나왔다. 그들은 룰라의 승리를 자축했다. 브라질 노동자당을 상징하는 붉은 별 깃발을 들고, “멋진 브라질을 원한다!” “룰라 대통령을 원한다”는 슬로건이 새겨진 옷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몇달에 걸친 선거 레이스의 열기에 비하면 거리에 모여든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환호의 열기 사이사이로 근심이 교차했다. 손에 잡힐 듯 했던 라틴아메리카 첫 노동자 출신 사회주의자 대통령의 탄생이 여전히 손에 잡힐 듯 말듯 한 상태가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승부는 다시 원점으로

사진/ 룰라(가운데)와 그의 아내(오른쪽)가 선거 당일 자택에서 승리를 다짐하며 군중들에 손을 흔들고 있다. (AP연합)

룰라 후보는 1차 투표에서 47%를 얻어 예상대로 압도적 1위를 했지만, 당선을 확정짓는 50%에는 미치지 못했다. 브라질 대통령 선거의 승부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단상 위의 룰라는 2차 투표의 승리를 다짐하는 연설을 하고 있었다.

4월 중순부터 시작된 이번 대선에서 시민들은 새로운 정치에 대한 강한 열망을 보여주었다. 룰라 후보는 지지를 바탕으로 세를 불렸다. 그러나 역풍도 강했다. 브라질 안의 보수세력뿐 아니라 밖의 세계화 세력들이 룰라의 반기를 허용하지 않으려 했다. 거리의 지지자들이 깃발을 들고 내달리지 못하는 것은 바로 결선투표로 가는 룰라 후보의 앞길에 만만치 않은 장애가 있음을 이미 지난 경험으로 터득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세계인의 이목을 사로잡은 브라질 대통령 선거가 일요일인 10월6일(현지시각) 치러졌다. 브라질 노동자당(PT)의 룰라 후보에게 표를 던진 47%의 브라질 유권자들은 이날 1차 투표로 승부가 결판나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집권연립여당의 핵심 브라질 사회민주당(PSDB) 조제 세하 후보를 지지한 24%의 유권자들, 브라질 사회당(PSB)의 안토니 가로징요 후보를 지지한 17%, 사회민중당(PPS)의 시로 고메스 후보를 지지한 12%의 시민들은 이를 거부했다.

1차 투표 1위인 룰라 후보와 2위를 차지한 여당 후보 주제 세하 후보는 10월27일 결선투표에서 일대일로 맞붙게 되었다. 개표에 앞서 브라질의 여론조사전문기관인 이보페(IBOPE)는 룰라 49%, 주제 세하 후보 20%로 출구조사를 발표해 1차 투표에서 승부가 결정날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했지만, 개표결과는 룰라 후보가 2% 정도 낮은 득표율을, 조제 세하 후보가 4%가량 높은 득표율을 얻은 것으로 드러났다.

헤알화에 대한 살인적 공격

사진/ 노동자당 지지자들이 투표가 끝난 것을 자축하며 깃발을 흔들고 있다. 출구조사에서 룰라의 예상득표율은 49%였으나 결과는 47%에 그쳤다. (AP연합)

룰라 후보의 선전은 예상된 것이다. 지난 4월 중순 본격적으로 선거 캠페인이 벌어진 이래 룰라 후보는 단 한번도 여론조사에서 1위를 놓친 적이 없었고 40% 이상의 지지율을 유지해왔으며 선거 캠페인 막바지에 45%를 웃도는 지지율을 보이며 성장세가 계속되자 1차 투표에서 당선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 아니냐는 관측을 낳게 했다.

이런 관측은 브라질 의류업계의 대부인 주제 알렌카를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고 브라질군과 국제적인 지원을 약속한 전 대통령 주제 사르네이의 지지를 확보한 것뿐만이 아니라 선거를 일주일가량 앞둔 시점에서 500명의 기업가들이 노동자당 지지를 선언하면서 더욱 설득력을 얻었다. 13년 전 1989년 최초로 대선에 룰라 후보가 출마했을 때, 룰라 후보가 당선되면 “80만명의 브라질 기업가들은 모두 외국으로 빠져나갈 것”이라고 한 상파울루 상공인연합회 회장의 경고와 비교하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지금은 브라질 전기·전자업종 대기업을 이끌고 있는 에우헤니오 스따웁, 4천명이 일하는 여성 언더웨어업계의 선두주자인 이보 로제, 브라질 설탕과 알코올업계의 주제 페소아 등 굵직한 기업의 사주들이 룰라를 지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엘리트주의자 조제 세하 후보는 망명시절 상파울루 공단에서 노조를 조직하고 독재정권에 맞서 싸운 노동운동가 룰라 후보의 무학력을 공격해왔다. 그는 13년간 독재정권한테 쫓겨나 망명하는 동안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의원직과 카르도수 정부 시절의 여러 요직을 거쳤다. 이에 대해 브라질 학술아카데미 소속 16명의 저명인사 가운데 9명의 지식인들이 학술아카데미의 창설자이지만 대학의 학위가 없던 마차도 데 아시스에 경의를 표하면서 룰라 후보 지지를 선언해 브라질 지식인 사회의 관대함을 과시했다.

이와 같은 정계계·재계·학계의 지지가 있었기에 1차 투표에서 당선될 가능성은 더욱 높아져가고 있었다. 룰라 후보는 이런 자신감을 바탕으로 “내가 승리하면 내년 1월1일(대통령 취임) 이후 브라질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기업가에서부터 가장 가난한 빈민까지 이 나라가 겪는 문제들의 해결책을 제시하고 정책들을 실천에 옮기는 데 함께 동참하게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바로 그때 레알화에 대한 투기적 공격은 시장의 발작을 극적으로 드러내주었다. 선거 직전 리우데자네이루의 환율전문가는 “1달러당 4레알로 추락할 수 있다. 그 이상이 될 수도 있다”고 예상할 정도였다. 올 1월 1달러당 2.30헤알이었던 것을 감안하고 현재까지 68%나 통화가치가 급락한 것을 고려하면 그 정도를 상상할 수 있다. 그러니 집권연립여당의 재무장관에서부터 노동자당의 경제자문역까지 “브라질 통화에 대한 공격은 동시대에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살인적인 공격”이라고 의견일치를 본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외국자본에 잠식된 경제

사진/ 이번 브라질 대선에 출마한 후보들. 왼쪽부터 룰라(노동자당), 가로티뉴(브라질사회당), 세하(브라질사회민주당), 고메스(사회민중당). (AFP연합)

브라질 통화에 대한 투기자본의 공격이 좌파후보의 집권 가능성 때문에 극적인 양상을 띤 것은 분명하지만, 기본적으로 브라질 경제는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 특히 천문학적 규모의 외채와 외국자본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브라질 경제의 내우와 이웃 아르헨티나 위기의 여파와 미국 경제의 침체라는 외환은 브라질 경제 위기의 근본적인 배경을 이룬다.

특히 헤알화 가치의 폭락은 브라질 공공채무의 규모를 불려놓았다. 현재 공공채무는 국내총생산의 63%에 이른다. 게다가 정부는 12월 말에 만기가 다가오는 167억달러의 채무를 갚아야 한다. 정부의 경제팀과 브라질 중앙은행은 국제통화기금으로부터 300억달러 지원을 끌어내며 국제금융기구들과 민간금융시장이 브라질에 대한 신뢰를 유지하게 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브라질은 외국자본에 심각하게 잠식된 상태다. 브라질은 매년 300억달러에서 350억달러가 필요하다. 국제자본의 지원 외엔 다른 대안이 없다.

단지 일자리를 늘리겠다는 약속을 지키는 데 다음 대통령 임기 4년 동안 최소한 국내총생산의 5% 성장이 있어야 하지만 낙관적인 전문가들조차 올해 성장률이 1%가 넘을지 자신하지 못하고 있다. 1994년 카르도수 집권 이래 평균성장률이 2.4%에 불과했던 것을 고려해보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경제적인 현실은 룰라 후보가 결선투표까지 가는 데 난관이 만만치 않음을 보여준다. 즉 브라질의 재계 일부는 룰라 후보의 당선을 받아들일 용의가 있지만 국제금융기구와 금융시장은 이를 받아들일 용의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룰라 후보는 국제금융기구가 신뢰하는 현 브라질중앙은행장을 교체하겠다고 분명히 언급했다.

정치적인 난관 또한 만만치 않다. 탈락한 두 후보의 지지율이 30%인 점을 감안하면 이들에게 표를 던진 시민들의 표심이 당락을 결정지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정치적인 동맹관계가 형성될 것이기 때문에 전문가들조차도 미리 결과를 예측할 수 없다고 말한다.

게다가 1989년의 악몽은 룰라 선거본부의 가장 큰 걱정거리이기도 하다. 1994년과 1998년 1차 투표에서 카르도수에게 패배한 것에 비하면 이번 선거 결과는 룰라 후보의 선전임이 분명하지만 1989년 1차 투표에서 승리해놓고도 2차 투표에서 5%포인트 차이로 패배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 과거가 반복된다면 룰라 후보는 50%의 장벽을 넘지 못할 수도 있다. 선거 직전에 현 대통령 카르도수는 브라질 사회민주당을 함께 창립한 조제 세하 후보가 결선투표에 나서지 못할 경우에 룰라를 지원할 수 있다는 암시까지 했다. 그러나 이제 사정이 달라졌다.

새로운 정치적 이합집산이 관건

브라질리아대학의 데이비드 플레셔는 2차 투표 결과에 대해 “미리 얘기하기 어렵다. 비록 지금까지의 예행연습에선 모두 룰라 후보가 승리했다. 그렇지만 지난 선거에서 1차 투표에서 승리한 그는 2차 투표에서 진 적이 있다. 룰라가 세하를 이기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2라운드를 둘러싼 “새로운 정치적 이합집산”이 승부를 가를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 유일하게 미리 예상해볼 수 있는 것은 이전 개신교 선교사 출신인 안토니 가로징요 후보가 룰라 후보를 지지하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물론 이전에 브라질 사회당의 지도부와 상의해야 하는 절차가 남아 있다.

상파울루의 노동자 밀집지역인 상베르나르두 도캄포는 22년 전 룰라가 노동자당을 직접 결성한 곳이다. 10월6일 룰라는 그 지역에 투표소에 투표하러 갔다. 동료 노동자들이 브라질 국기를 건네주자 룰라는 국기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어 동료들의 환호성이 터졌다. 이 환호성은 10월27일 결선투표에까지 이어질 것인가.

상파울루=박정훈 전문위원 jhpark2001@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