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집 ] 2002년10월10일 제429호 

남미 좌파의 힘겨운 전진

미국의 발톱과 맞서며 좌파가 걸어간 세 가지 갈랫길… 아옌데 모델은 다시 실험되고 있다

스페인의 오랜 식민 통치로부터 19세기 초 독립한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나라들은 20세기 초까지 국민국가를 형성하지 못한 채 지방 토호나 군벌세력의 영향 아래 놓여 있었다. 사회주의를 비롯한 급진사상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유럽계 이주민들과 함께 유입되었다. 광산지대를 중심으로 등장한 라틴아메리카의 노동대중은 농업뿐만 아니라 도시의 제조업과 운송업에도 집중되었다.

쿠바혁명, 남미 무장투쟁의 본보기


사진/ 피델 카스트로(가운데)가 주도한 쿠바혁명은 라틴아메리카에 가장 큰 파급효과를 불러일으킨 무장투쟁의 본보기였다. (SYGMMA)


1920년대 말 브라질과 엘살바도르에서 처음으로 사회주의적 변혁 전망을 드러낸 노동계급 정당이 출현했다. 그러나 1930년대까지 많은 노동자들은 선거에 참여하지 못했고 사회주의 세력도 미약했다. 라틴아메리카에서 노동계급의 규모가 뚜렷하게 증대하는 것은 1950년대 이후의 ‘산업혁명기’지만, 이때도 정부의 노동정책이 더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정부와 노조 지도부는 노동협약을 통해 담합적인 밀월관계를 유지하며 노동운동 내부의 좌파를 고립시키기도 했다.

이렇듯 제2차 세계대전 뒤 좌파의 성장이 전반적으로 지지부진한 가운데 1950년대 중엽 라틴아메리카 좌파운동의 큰 획을 긋는 쿠바혁명이 일어났다. 쿠바혁명은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큰 영감과 파급효과를 불러일으킨 무장투쟁의 본보기였다. 게릴라 세력의 거점을 중심으로 한 유격전술 및 농민과 중간계급 포섭의 전형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1953년 산티아고의 몬카다 병영을 습격한 ‘7월26일 운동’의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는 당국에 체포된 뒤 “역사는 나를 무죄로 선언하리라”는 유명한 최후 진술을 남겼다. 11개월 뒤 석방된 카스트로는 망명지 멕시코에서 아르헨티나 출신 체 게바라와의 운명적 만남을 통해 라틴아메리카 좌파운동의 새로운 장을 연다. 1956년 쿠바 해안에 상륙한 혁명세력은 동부 산악지대로 숨어들어 거점을 형성한 뒤 정부군과 맞섰다. 억압적 풀헨시오 바티스타 정권에 대항한 길고 위험한 게릴라전은 1959년 1월혁명 세력의 아바나 입성으로 끝을 맺었다.

사실 카스트로를 비롯한 혁명세력이 처음부터 사회주의를 전면에 내세우진 않은 만큼 쿠바혁명의 성격에 대해 사회주의혁명인지 아니면 민족독립과 사회개혁운동인지 논란이 일기도 했다. 카스트로 정부가 첫 6개월 동안 재판을 통해 약 550명의 ‘반혁명분자’를 처형했지만, 처음부터 미국과 적대적 대립관계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1959년 4월 카스트로는 미국을 방문해 아이젠하워·닉슨 같은 고위 지도자를 만났고, 하버드 대학에서는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하지만 냉전시대의 국제관계로 인해 1960년부터 점차 반미적 성격이 강해졌다. 미국인 소유의 전기·전화회사를 비롯한 여러 기업을 국유화했고, 소련의 영향을 받아 중앙계획기구를 설치했다. 쿠바는 1961년 1월 미국과의 단교하고, 다음해 10월 미사일 위기 등 숨막히는 사건이 이어지면서 동서 대결의 중심지가 되었고 카스트로는 쿠바가 사회주의혁명 국가임을 천명했다.

페루, 군부에 의한 사회주의혁명

쿠바는 반제국주의혁명을 수출하는 본거지가 되었다. 쿠바혁명은 1960년 과테말라 장교들이 친미정권에 저항해 36년간 길고 긴 내전을 시작하는 데 도화선을 제공했고,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해방전선(FSLN, 1961)과 엘살바도르의 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FMLN, 1979)의 결성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혁명수출의 선봉에 선 이는 혁명 영웅 체 게바라였다. 쿠바의 중앙은행 총재와 산업부 장관으로서 경제계획을 주도한 체 게바라는 1965년 소련의 패권적 태도를 비난하고 공직과 시민권을 반납한 뒤 아프리카 콩고와 남아메리카 볼리비아의 혁명투쟁에 가담했다.

좌파운동의 두 번째 유형으론 페루 사례를 들 수 있다. 1968년 10월 군사쿠데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60년대 페루는 빈곤한 원주민 비율이 무척 높고 성인 50% 이상이 문맹이며 대토지 집중의 폐해를 겪고 있는 대표적 저개발국가였다. 쿠데타를 주도한 후안 벨라스코 알바라도 장군과 군사위원회는 ‘잉카 계획’을 통해 전면적 사회개혁에 착수하면서 “국부의 대부분이 소수 특권층에게 장악된 불공정한 사회를 바로잡기 위해 자본주의도 아니고 공산주의도 아닌” 새로운 경제질서를 지향하고자 했다. 페루 군부는 혁명적 민족주의를 표방하며 석유산업과 국제 전신·전화회사(ITT), 체이스 맨해튼 은행 등 외국기업을 국유화했다. 페루 군부는 오랫동안 억압상태에 있던 농민들의 곤경을 절감했다. 그래서 해안지대의 대농장을 접수하고 전국농업동맹을 설치했다. 페루의 군사혁명위원회는 칠레·브라질·아르헨티나의 군사정권처럼 이미 조직된 노동계급을 배제하거나 억압하지 않았다. 벨라스코가 카스트로처럼 사회주의 건설을 지향했는지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도시와 농촌의 대중을 혁명 체제로 끌어들여 산업화와 자율적인 발전의 토대를 구축하려 한 것임에는 틀림없다. 1975년까지 군사혁명위원회를 중심으로 ‘군부의 혁명’을 주도한 벨라스코는 ‘군인 혁명가’인 셈이었다. 피델 카스트로의 표현을 빌리면 페루는 “마치 불이 소방서에서 시작된” 것 같은 매우 독특한 사례라 할 수 있다.


사진/ 선거를 통해 집권했으나 미국의 사주를 받은 군사정권에 살해당한 아옌데(왼쪽 두번째). 라틴아메리카는 그의 비극을 되풀이할까. (GAMMA)


마지막 유형으론 1970년 살바도르 아옌데가 이끈 칠레 인민연합의 집권을 들 수 있다. 이는 제3세계에서 보기 드문 선거를 통한 좌파의 집권 사례인 동시에 선거 승리보다 정권의 유지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었다. 19세기 말 이래 칠레는 대체로 안정적인 민주주의의 모범사례로 꼽혀왔다. 칠레 좌파는 이미 1957년 ‘민중행동전선’을 조직했고, 1970년 아옌데는 결국 36.3%를 득표해 나머지 두 후보를 제쳤다.

아옌데의 초기 경제정책은 1959년 카스트로의 정책과 매우 비슷했다. 단기간의 소득 재분배를 염두에 둔 물가 동결과 임금 인상이 핵심을 이뤘다. 또한 구리·석탄·강철 부문과 민간은행의 약 60%, 그리고 ITT나 포드 등의 외국회사를 국유화했다. 이는 당연히 미국과의 갈등을 촉발시켰다. 1973년까지의 짧은 아옌데 집권기 동안 민간부문의 불만이 고조되었고, 미국의 보이지 않는 봉쇄로 경제 사정이 점차 악화했다. 쿠바와는 달리 의회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나라, 특히 반대파가 의회를 장악한 상황에서 아옌데의 비극은 이미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ITT와 미 중앙정보부의 조직적 지원을 받은 칠레 군부는 1973년 9월 대통령궁에 십자포화를 퍼부었고, 아옌데는 이 과정에서 장렬히 전사했다고 알려졌다. 그 뒤 칠레는 민주주의 전통을 뒤로 하고,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장군을 정점으로 한 군부의 철권통치와 ‘시카고 아이들’로 알려진 미국 유학파의 대외개방 정책이 어우러지는 새로운 압제의 시대에 돌입하게 되었다.

아옌데, 선택의 여지 없는 대안

아옌데는 라틴아메리카 최초로 선거를 통해 마르크스주의자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진기록을 남김으로써 라틴아메리카 좌파에게 또 다른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민주주의 전통이 어느 정도 유지되는 사회에서 합법적 방식을 통해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성취하려던 아옌데의 꿈은 미국의 지원을 업은 군부 강경파의 쿠데타로 무너졌지만,그렇다고 해서 라틴아메리카 좌파의 희망이 완전히 꺾인 것은 아니다. 현재 브라질의 노동당뿐만 아니라 1990년 10년에 걸친 혁명의 성과를 ‘빼앗긴’ 이래 선거를 통한 재집권을 꿈꾸며 도전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는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정당이나 오랜 내전 끝에 1992년 제도권에 진입한 엘살바도르의 파라분도 마르티 해방전선 세력은 아옌데 모델을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유일한 대안으로 여길 것이다. 물론 집권 청사진을 어떻게 제시할 것인지와 함께 아옌데의 경우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듯 국내 기득권 세력의 반발을 어떻게 진정시킬 것인가, 더욱이 미국이란 ‘독수리의 발톱’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가 더 중요한 문제일지 모르지만.

박구병/ 서울대 서양사학과 강사







.




↑Back to the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