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표하기 전에 생각해보라. 당신은 사장인가, 노동자인가? 대통령 후보 가운데 누가 사장이고 누가 노동자인가?”

‘룰라’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루이스 이나시오 다 실바가 브라질 노동자당(PT·Partido dos Trabalhadores) 후보로 나선 지난 1989년 대통령 선거에서 군부독재 시절 민주화 운동에 앞장선 레기날 두 벨로수 신부가 던진 질문이다. 오랜 침묵 끝에 들려온 브라질 국민의 우렁찬 대답은 아직도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창당 22년, 네 차례의 도전 끝에 룰라는 집권에 어느 때보다 가까이 다가서 있다.

“솔직히 룰라가 당선돼도 문제”

사진/ 10월30일 열린 대선 후보 TV토론회. 맨 오른쪽이 노동자당의 룰라 후보다. (AFP연합)

노동자당의 창당을 촉발한 것은 78년부터 3년간 휘몰아친 파업열기였다. 군사정권이 약속한 ‘브라질의 기적’(Brazilian Miracle)이라는 경제부흥계획이 임금착취와 노조탄압으로 이어지자 78년 상베르나르두에 있는 자동차 회사인 사브(SAAB)에서 파업이 시작돼 브라질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룰라 등 당시 파업을 이끈 노조 지도자들은 노동자 정당의 필요성에 공감하며 79년부터 우리나라의 울산지역에 해당하는 ABC지역 금속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창당작업에 착수한다. 2년여에 걸친 추진 끝에 80년 2월10일, 노동자당은 상파울루 시온학교에서 750여명의 발기인이 참가한 가운데 결성대회를 가지며 깃발을 올렸다.

노동자당은 자기 정당의 색깔을 ‘사회주의’라고 표방하고 있다. 노동자당은 지난 81년 9월에 열린 전국대회에서 사회주의를 목표로 설정했으며, 이를 ‘남미 최악의 경제적 불평등 극복과 착취 없는 사회건설’로 요약했다. 그러나 이들이 사회주의적 이념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지에 대한 대답을 분명하게 내놓은 것은 아니다. 일각에서는 노동자당이 브라질 자본주의를 민주적 사회주의로 전환하기 위한 완성된 전략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평가도 있다. 이러다 보니 노동자당의 이념과 지향을 엿보는 것은 선거시기 내놓은 주요 정책대안을 살펴보는 수밖에 없다.

룰라가 처음 대통령 후보로 나선 89년 선거에서 노동자당은 △외채 이자지불 중지 △민영화 반대 △사회보장 지출 증대 △무토지 농민을 위한 농지개혁 등을 주요 공약으로 내걸었다. 즉 투기자본 중심의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에 반대하고, 국내 무산층을 위한 재원·소득 재분배를 핵심으로 한 것이었다.

94년까지 이어진 노동자당의 대선강령은 98년 선거 들어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 해의 대선에서 노동자당은 국가경쟁력 강화와 수출증진을 브라질 경제위기의 타개책으로 제시하며 민족주의적 접근 양태를 보였다.

노동자당은 집권 가능성이 가장 높아진 올해 선거에서 또 다른 모습을 보였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좌파통합, 우파분열, 대선승리” 전략으로 일컬어지는 ‘좌우연합 전술’이다. 대통령 선거대책본부에서 미디어를 담당한 지안카를로 슘마는 브라질의 표심을 좌파 30%, 우파 30%, 중도 40%로 3등분해 설명했다. 룰라는 이번 대선에서 중도 40%를 끌어들이기 위해 자유당(PL)을 포섭해 공동대응에 나섰다. 부통령으로 나선 섬유기업 사장 ‘조세 알렌카’가 속한 자유당은 여당에서 분리돼 나온 이른바 우파정당이다. 슘마는 “10년 전이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연합이 당선을 위해 펼쳐지고 있다”고 고백했다. 함께 선거를 치른 브라질공산당(PCdoB) 관계자는 “솔직히 룰라가 당선돼도 문제”라고 덧붙인다. 노동자당과 룰라가 오른쪽으로 눈을 너무 많이 돌리고 있다는 것이다.

IMF 협약 준수 밝혀

사진/ 룰라 후보가 투표를 마치고 지지자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그는 IMF 협약 준수와 소득재분배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을까. (AP연합)

이에 대해 룰라를 공식 지지하고 나선 브라질 사용자단체 가운데 하나인 CIVES(중소기업가들 중심, 회원 150여명 규모)는 “노동자당이 사회주의 정당인 것은 알지만 당장의 경제부흥이 중요하다”고 해석한다. 쉽게 이해되지 않는 이 같은 입장의 배경에는 브라질의 특수한 경제상황이 놓여 있다. 현재 브라질 중소기업의 은행금리는 무려 60%대로, 대규모 외국기업과 투자기업의 은행금리 20%의 3배에 이른다. 레알 화폐가치 역시 급락하기 시작한 지 오래다. 국내 중소 생산자본들로서는 국제통화기금(IMF)과 외국 투기자본의 이익만을 보장하는 현 정부보다는 ‘노동자 정당’이 더 유리하다는 것이다. ‘노동 대 자본’의 전선이 아닌 ‘투기자본 대 반(反)투기자본’의 전선이 형성된 셈이다.

룰라는 이번 대선에서 △조세·토지개혁 △4년 내 실업률 반감 △고용창출 △빈곤층 구제를 위한 주택건립과 기초생활보조제도(Food stamp program) △공공의료·공교육·사회교육 강화 등의 공약을 내걸었다. 국민의 75%가 정책전환을 원하는 차에 룰라의 약속은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약속에 허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선거대책본부에서 경제담당 조정관(executive coordinator)을 맡고 있는 프라도는 “룰라가 당선되더라도 IMF와의 협약은 존중할 것”이라고 밝혔다. 즉, ‘IMF 협약 준수’와 ‘빈곤퇴치·소득재분배’의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겠다는 것이다. 이 희대의 난제를 위해 룰라가 내놓은 해법은 한 가지다. ‘지속적인 경제성장, 고용창출, 소득증가’. 하지만 현재 브라질의 경제상황에서 IMF와의 협상내용을 모조리 유지하면서 획기적인 경제성장을 이뤄내기란 만만치 않은 일이다. 룰라와 프라도는 사실상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인 셈이다.

현재 200레알(약 8만원) 수준의 최저임금을 오는 2006년까지 2배로 인상하겠다는 계획도 발표했다. 하지만 각종 사회보장기금의 기준이 최저임금으로 설정된 상황에서, 그러잖아도 사회보장 확충을 주요 공약으로 내건 룰라가 이를 계획대로 추진할 수 있는지는 모두가 갖는 의문이다. 프라도 경제담당 조정관은 이에 대해 “2004년까지는 ‘고난의 행군’을 계속해야겠지만 어렵더라도 추진하겠다”는 ‘결의’만을 내놓았을 뿐이다.

다른 공약들 역시 ‘재정확보가 우선’이라는 원칙에 바탕을 두고 있다. 따라서 현실적으로는 높은 경제성장률을 유지하더라도 IMF와 투기자본이 요구하는 내용들을 충족시킨 뒤에야 이 같은 약속들이 지켜질 가능성이 크다. 이 밖에도 프라도 경제담당 조정관은 “IMF와의 재협상 계획이 있느냐”는 질문에 “지금 이야기할 수 없다”고 밝혔으며, 공기업 재국유화에 대해서도 “계획이 없다”고 털어놨다.

공무원 노조의 반발도 문제

노동자당의 가장 든든한 지원군인 브라질노동자단일동맹(CUT)과의 관계도 변수다. 특히 공무원연금 문제는 뜨거운 감자 중 하나. 프라도 경제담당 조정관은 “현 브라질의 공무원 연금제도가 너무 많은 예산을 깎아먹고 있다. 소득재분배의 고른 해택을 위해 이를 재조정해야 한다”고 밝혔다. 공무원노조의 반발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리고 공무원노조는 브라질노동자단일동맹 안에서 만만치 않은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독일과 영국 등 노동조합을 기반으로 출범한 좌파정권들이 결국에는 노조와의 충돌로 홍역을 겪은 역사가 브라질에서 되풀이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한 것이다.

다시 벨로수 신부의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벨로수 신부는 “사장과 노동자 가운데 누구에게 투표할 것이냐”고 물었다. 노동자 대통령과 사장 부통령이 나란히 나선 이번 브라질 대선에서 노동자들은 과연 벨로수 신부에게 어떤 대답을 할 것인가? ‘브라질의 실험’이 과연 어떤 모습으로 귀결될지는 더 두고 볼 일이다. 당선에는 어느때보다 가까이 다가서 있지만, 당선 이후 브라질노동자당이 우경화라는 비판을 훌훌 털어내며 사회주의 좌파정당으로서의 집권 프로그램을 내놓을지, 아니면 국제투기자본과 IMF가 쳐놓은 그물을 걷어내지 못한 채 또 하나의 실패한 모델로 귀결될 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이승철/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편집차장 keeprun@nodong.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