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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변화는 대세다” 최근 평양 방문한 박재규 전 통일부 장관이 전하는 북한 내부의 변화상
북한의 변신은 30년 넘게 그곳 연구에 한 우물을 파온 박재규 전 통일부 장관의 눈까지 의심케 한다. 북한의 겉모습 변화뿐 아니라 북한의 엘리트와 주민들의 적응도 놀랄 정도로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는 게 그의 평가다. 9월16일 KBS교향악단 합동연주회 고문 자격으로 평양땅을 다시 밟은 그는 김정일 위원장만을 뺀 고위인사들을 두루 만나고 9월22일 돌아왔다. “2000년부터 북쪽 인사들과 많은 회담을 해봤지만 이번처럼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한 적이 없었다”는 그의 발언 내용 가운데는 주목할 대목이 적지 않았다. 먼저 초미의 관심사인 북·미 관계와 관련해 북쪽 지도부의 속내가 어땠는지 물어보았다.
북, 미국과 어떤 '충돌'도 원치 않아
북·미 관계가 풀려야 북한의 개혁·개방 조처들이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이라는 지적이 많다. 북한이 이번에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위해 전향적인 카드를 내놓을 가능성은. 북한 고위층이 가장 신경을 곤두세우는 대목이다. 먼저 부시 정부가 우려하는 핵문제와 관련해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조기 핵사찰 요구를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다는 느낌을 받았다. 미사일 시험발사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은 이미 일본의 고이즈미 총리한테 한 것이고, 미국이 10월3일 특사 방북 때 성의 있게 나오면 북한도 더 양보할 준비가 돼 있는 것 같았다. 김정일-고이즈미 정상회담 때도 고이즈미 총리가 과거사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나왔기 때문에 김 위원장도 전향적으로 나온 것이다. 하지만 부시 정부가 여전히 밀어붙이기식으로 나오면 큰 성과를 기대할 수 없다. 북한은 분명히 미국과 어떤 종류의 충돌이든 바라지 않는다. 미국은 무엇보다 한꺼번에 모든 문제를 다 풀어야 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추가 경제특구 지정이나, 개혁조처들이 나올 가능성은. 7·1 경제관리 개선조처 및 9·12 신의주 특별행정구 경영 등이 성과를 거두면 더 획기적인 조처가 나올 가능성이 높다.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 때, 김 위원장이 베이징의 대표적인 정보기술(IT) 단지 시찰 뒤 신의주공단 개발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얘기를 처음 들었다. 신의주특구는 나진·선봉 무역특구의 문제점들을 획기적으로 보완해 나온 구상이다. 신의주특구 지정은 북한이 경제개혁 의지가 확고하며, 대외개방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조처다. 특히 초대 행정장관으로 중국계 네덜란드인 최고경영자(CEO)를 임명한 것은 북한의 개방의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보기다. 북한의 이런 변화는 심각한 경제난을 타개하기 위한 승부수로 평가된다. 과거의 나진·선봉 자유무역특구 계획 등 다양한 내부적 노력이 실패한 이후 근본적인 변화가 없으면 경제난 해결은 어렵다는 북한 지도부의 위기의식이 작용한 듯하다. 신의주특구에는 남쪽 기업의 진출도 중요한 만큼 북한 당국은 이미 합의한 투자보장, 이중과세방지, 상사분쟁조정절차, 청산결제 4개 경협합의서를 가급적 빠른 시일 안에 발효시키는 것이 투자분위기 조성에 매우 중요하다. 장관급 회담 파트너인 전금진 내각 책임참사를 비롯해 고위층을 두루 만나고 온 것으로 알고 있다. 이들은 최근 북한의 변화 조처들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고위층들은 한결같이 경제관련 조처들에 대해 상세히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오랜 연구 끝에 내놓은 옥동자라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몇몇 인사들은 경제개선 조처 뒤 석탄을 비롯한 각 산업분야, 농어촌까지 생산량이 늘었다고 뿌듯해했다. 즉 지금까지는 매우 성공적이라는 자평들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일본으로부터 사죄와 배상금을 받을 것이고, 곧 국제무대에 당당하게 나설 수 있다는 자신감을 내비치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일본과는 당국 차원뿐 아니라 무역·투자, 관광 등 민간차원의 교류와 협력도 활성화될 것으로 기대한다. 재일조총련의 지위 향상과 총련의 대북사업 활성화에도 관심을 쏟고 있었다.
성과에 따라 정치적 변화 가능성도
과연 이번에는 북한의 대외 개방 조처가 일시적인 제스처가 아니고, 지속적으로 이어질 것으로 보는가. 일각에서는 북한이 문호를 개방하면 체제가 흔들리는 것 아니냐는 분석들을 내놓는데 이는 모르는 소리다. 김 위원장의 리더십은 이전보다 더욱 확고하게 뿌리를 내렸다는 느낌을 받았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 고이즈미 총리 등과의 활발한 정상 외교활동과 경제개선 조처를 통한 주민들의 생활 향상에 신경을 쏟으면서 그의 인기는 더욱 올라간 것으로 알고 있다. 북한 지도층은 미국과의 관계 개선 없이는 남·북, 북·일 협력, 그리고 신의주특구의 성공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북한의 변화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보인다. 지금은 북한이 서둘러 경제체제쪽만 구조조정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경제개혁의 성공을 위해서도 어느 정도 정치체제의 변화도 불가피할 것으로 보이는데. 이제 경제개혁의 시작단계기 때문에 지금 상황에서 정치체제 변화를 예단하는 것은 성급하다. 다만 북한은 경제관리 개선과 신의주특별행정구 조처의 성실한 이행과 성과를 촉진하기 위해 김 위원장을 중심으로 한 빠른 세대교체의 가능성은 있다. 개혁조처들이 큰 성과를 거둬야만 경제난이 해결되기 때문에 장애물이 된다고 판단되면 일부 정치적 변화의 가능성은 있을 수 있다. 북한은 오는 12월의 남쪽 대선에도 신경을 많이 쓰는 것으로 알고 있다. 대선 결과에 따라 지금의 남북관계나, 북한의 경제개혁 조처들이 영향을 받을 가능성은. 북쪽에서 대선 결과에 신경을 쓰는 것은 사실이다. 북쪽의 지도층 인사들은 남쪽의 대선 관련 보도를 꼼꼼히 보고 있었다. 따라서 각 대선 후보들이 내놓은 대북정책 내용도 소상히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누가 대통령이 되어도 남쪽에서 먼저 적대정책을 펴지 않는 한 지금의 교류협력정책을 유지한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최근 남북관계가 급물살을 타는 것과 관련해 일부 인사들은 “‘신북풍’ 운운하는데 이는 터무니없는 소리”라며 강한 어조로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대선 후보들 모두가 대북 화해협력정책의 기조에 공감하기 때문에 약간의 우여곡절은 있을 수 있으나 지금의 남북관계 흐름을 거스르지는 않을 것이다. 김 위원장의 답방설이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그의 서울 답방은 약속대로 꼭 성사돼야 한다. 하지만 지금이 답방을 위한 ‘적절한’ 시기인지는 김 위원장의 판단 사안이다. 개인적 생각으로 북·미 관계의 진전 여부, 남북한 양쪽의 복잡한 내부 사정 등을 두루 감안하면 올해 안 답방은 어렵지 않나 생각한다.
납북·행불자 문제도 전향적 검토
납북 행불자 문제와 관련한 북·일과 남북 사이의 이해관계는 서로 다르다. 일본은 80년대 말부터 꾸준히 이 문제를 제기하면서 이번 북·일 정상회담에서 북쪽으로부터 사실인정과 사과를 이끌어냈다. 일본인 행불자 수는 남쪽의 그것에 비해서는 아주 적은 편이다. 남북관계에서 이 문제 해결은 다소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2000년 6월 정상회담 뒤 남쪽은 모든 행불자 문제를 이산가족 차원에서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요즘은 북쪽도 과거와 달리 남쪽 입장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풀지 못할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최근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있는 북한, 특히 평양 주민들의 겉모습은 어떠했나. 평양 시내 모습은 깨끗하게 단장되고 시민들의 옷차림도 많이 세련되게 보였으며, 특히 거리 사람들의 표정이 밝았다. 자유롭게 물건을 파는 포장마차가 시내 군데군데 널려 있었고, 여기에서 아이스크림·사과·배·빵·통닭 등을 진열해놓고 파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평양의 전력사정도 많이 나아진 것 같았다. 이전의 잦은 정전사태도 볼 수 없었고, 전등도 백열구에서 형광등으로 많이 바뀌었다. 최근 경제관리 개선조처는 2000년 남북정상회담 전부터 김 위원장의 지시로 시작된 전반적인 경제개선 연구 결과로 이제 가시화된 것이다. 근로자들의 생산성 향상이 초점이다. 이를 위해 과감한 인센티브 제도를 도입한 것이 특징이다. 의료와 교육 무상혜택을 받는 것빼고는 주민들이 버스를 타거나, 생활필수품을 살 때도 직접 번 돈으로 지불해야 한다. 정신노동 근로자보다 육체노동 근로자를 우대한다는 점도 눈에 띈다. 가령 한달 교수 월급이 3천원이라면 광산근로자는 1만원 정도를 받는다. 애초 일각에서 낯선 제도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가 많았다는 점도 시인하더라. 하지만 이런 조처들을 대부분의 북쪽 주민들은 매우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보였다. 특히 백화점 판매원 등 각종 서비스업종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이 하나라도 더 많은 물건을 팔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숙소인 고려호텔 안내원이나 경비원, 그리고 묘향산 안내원 등이 너무나 적극적이고 활기찬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비슷비슷한 제품을 파는 점원들이 서로 앞다퉈 상품을 파는 모습은 이번에 처음 보는 것들이다.
차기 대통령 누구든 협력 기대
통일부 장관이 아닌 민간인으로서 평양 땅을 다시 밟은 감회는… 북한 당국자들도 상당히 반겼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들이 남쪽에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이라고 보는가. 뜻밖의 환대를 받았다. 특히 나와 함께 정상회담 뒤 양쪽 장관급회담의 수석대표로 4차례나 만나 미운 정 고운 정 다 든 전금진 내각 책임참사와의 재회는 색다른 감회를 불러일으켰다. 그는 고맙게도 내 생일을 기억해 9월17일(음력 8월11일) 생일상을 따로 차려주기도 했다. 평양시내의 한 선술집에서 마주앉아 지난 회담에 얽힌 뒷얘기부터 시작해, 서로 얼굴을 붉히면서 목소리를 높인 당시를 회상했다. 모두 다 좋은 추억으로 돌리고 남북화해와 공동번영을 위해 노력하자며 손을 굳게 맞잡았다. 내가 만난 북쪽 고위인사들 모두 비료와 쌀지원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남쪽 국민에게 전해달라고 하더라. 그리고 지금의 화해협력 관계를 계속 발전시켜 나가기를 바라며, 누가 남쪽의 차기 대통령이 되더라도 협력하기를 원했다. 또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한반도에 항구적인 평화를 정착하자고 여러 번 강조했다.
임을출 기자 ch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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