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집 ] 2002년09월04일 제425호 

백기 들어야 직장 다닌다?

제주도 최대 현안으로 떠오른 한라병원… 생존권적 요구 파업에 병원폐업으로 맞불


사진/ 한라병원 노동자들은 심각한 고용불안을 느끼고 있다. 병원쪽입장을 지지하는 직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파업참가 노조원 전원해고, 용역업체 직원을 동원한 고춧가루 물대포 발사, 100일을 넘어선 제주도 사상 최장기의 병원파업….

제주도 최대 종합병원인 한라병원에서 벌어진 일들이다. 한라병원은 직원 400명에 405병상을 갖춘 2차 진료기관이다. 제주도 내 5개 종합병원 가운데 가장 큰 규모다. 제주도 최초로 인공신장실·암센터·장기이식센터·골수이식센터·심혈관클리닉 등을 개설해 운용하고 있다. 제주도 의료의 핵심센터라고 하는 한라병원에서 제주도에선 유례를 찾기 힘든 대형 노사쟁의가 100일 넘게 이어졌다.

도내 최대 종합병원의 최장기 파업


사진/ 제주도 사상 최장기 파업을 벌이고 있는 한라병원 노조원들.


갈수록 확산되는 파장은 제주도 전체를 들썩이고 있다. 병원쪽은 폐업 카드를 내세워 노조의 항복을 요구하고 있다. 노조는 결코 물러설 수 없다며 결의를 다지고 있다. 지역사회도 둘로 나뉘어 한라병원 사태의 의미를 둘러싸고 정당성을 다투고 있다.

사태의 발단은 한라병원 노동자의 노동조건을 둘러싼 대립이다. 한라병원은 지난 1996년부터 직원들의 연봉계약직화를 추진해왔다. 처음 의사에서 시작된 계약직화는 2001년 간호사와 의료기사 등 전 직종으로 확산됐다. 물론 모든 직원들이 모두 계약직으로 바뀐 것은 아니다. 이미 정규직으로 입사한 직원들 대부분은 신분이 유지됐다. 신규 채용자에 한해 1년 단위로 연봉계약을 맺었다고 병원쪽은 설명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계약직의 확산이 신규 채용 직원의 고용불안을 불러온 것은 물론, 기존 정규직 직원들의 노동조건 또한 크게 악화시켰다고 주장한다. 2001년 3월 계약직으로 입사한 간호사 김경숙(24)씨는 “근무평점이 70점을 넘어야 고용계약이 연장된다. 잘못하다간 일자리를 쫓겨날 수 있다는 압박감에 시달린다”고 말했다. 그는 “병원이 하라는 대로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병원쪽은 재계약 조건 등에 대해서도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방사선과 의료기사 김기만(29)씨는 99년 입사 5개월 만에 계약직으로 조건이 바뀌었다. 김씨는 “같은 연차의 정규직보다 연봉이 500만원 이상 적다. 사람이 모자라 3년 동안 휴가를 가지 못했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정규직 조합원들도 계약직화의 파장을 크게 우려했다. 5년차 간호사 김선주(28)씨는 “계약직 후배들에게 농담삼아 ‘총무과에서 전화왔다’고 하니까 막 울기까지 했다. 그들의 실상을 알수록 너무 마음이 아팠다”고 말했다. 이은주(27) 간호사는 “계약직이 확산되면서 정규직 직원들의 노동조건이 더욱 나빠졌다”고 주장했다. “간호사 둘이서 80명 넘는 환자들을 맡는다. 그런데 계약직 후배들은 불안한 조건 때문에 수시로 그만뒀다. 함께 일하는 우리들도 힘들 수밖에 없다.” 그는 “파업 조합원 150명 가운데 정규직이 90명을 넘는다. 이 문제에 대한 공감대가 그만큼 크다”고 말했다.

병원쪽이 노조 반발을 무릅쓰면서까지 계약직을 도입한 데는 제주도의 특별한 사정도 작용했다. 김성수 원장은 “도내 거의 모든 병원이 100% 연봉계약직 제도를 도입한 상태”라고 말했다. 한라병원만이 그런 물결에서 예외일 수 없다는 것이다. 노조쪽은 제주도의 계약직 비율이 유독 높은 것은 노동조합이 미약하기 때문이며, 그만큼 제주도 전체의 의료상황이 열악함을 뜻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보건의료산업노조 한상태 부위원장은 “한라병원이 계약직화를 밀어붙이는 데는 한라병원과 같은 재단인 한라대 보건 관련학과의 취업률을 끌어올리려는 이유도 있다”고 의혹을 제기했다. 그는 “한라병원 재단이사장은 아버지가, 한라대학 재단이사장은 어머니가, 병원장은 아들이 맡고 있는 구조다. 계약직으로 자꾸 잘라내야 새로 졸업생을 받을 수 있다는 계산을 한 것”이라고 말했다.

신규 채용직 계약직화로 고용불안 확산


사진/ 제주 한라병원은 파업 참가 노조원 전원 해고 방침을 밝혔다. 한라병원 노조원들이 파업 선전을 위해 병원을 나서고 있다.


파업사태는 8월 말 병원쪽의 강경대응을 거치며 한층 격렬한 대치국면으로 접어들었다. 8월22일 병원쪽은 사쪽 위원만이 참여한 징계위원회를 열어 파업 노조원 108명 전원의 해고를 결정했다. 8월25일 새벽엔 서울에서 불러온 경비용역업체 직원들을 동원해 병원 로비에서 자고 있던 농성 조합원을 강제해산했다. 이 과정에서 용역업체 직원들은 고춧가루를 탄 물대포를 쏴대는가 하면 각목과 방패를 마구 휘둘러 노조원 20여명과 지나던 시민 10여명이 부상을 당했다. 현재 해고와 관련해 병원쪽은 “재심청구를 통해 징계해고자를 최소화하면 된다”고 주장하는 반면, 노조쪽은 “병원의 일방적 징계결정 자체가 노사 동수로 참여해 결정하기로 한 단협을 어긴 것인 만큼 무효”라고 맞서고 있다.

용역 폭력사태로 지역여론의 비판이 거세지자 병원쪽은 폐업 카드를 내밀었다. 8월28일부터는 입원 환자들에게 다른 병원으로 옮기라고 일일이 통보했다. 그러나 막상 8월30일 재단이사회에선 폐업 유보를 결정했다.

폐업 고려라는 강수를 통해 병원쪽은 몇 가지 성과를 올렸다. 폐업 이야기가 나온 28일 의사와 수간호사, 관리직 등 파업 불참 직원 280여명은 “폐업만은 안 된다. 노조는 진료방해와 파업에 가담하지 않은 직원들에 대한 폭언과 폭행을 중지하라”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또 30일 이사회에 병원이 정상화할 때까지 의사 임금 50%와 일반 직원의 수당과 상여금을 유보한다는 자구 노력안을 제출했다. 김성수 원장은 “진료과장들과 다수 직원들이 파업에 반대하는 것만 봐도 노조 행위가 지나침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반면 노조쪽은 “회사가 의사와 수간호사 등 관리 입장의 직원들의 편견을 부추겨 노노갈등으로 몰아간다”며 반발했다. 한상태 부위원장은 “파업 불참자가 280명이라지만, 의사 50명과 파업이 끝나면 일자리를 잃을 대체직원 등이 대부분”이라고 지적했다. 노조는 공권력 개입의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30일 이사회의 폐업 유보 결정과 함께 농성장을 병원에서 제주도청으로 옮겼다.

교착상태에 빠진 한라병원 사태의 향방을 결정지을 지역여론의 분위기는 용역업체 폭력 이후 일단 병원쪽에 비판적으로 돌아선 것으로 보인다. 제주참여환경연대 등 12개 시민단체들은 시민대책위원회를 구성해 사태해결을 위한 활동에 나섰다. 시민대책위 간사를 맡은 고유기 제주참여환경연대 사무처장은 “노동문제에 시민단체가 직접 나선 것은 제주도에선 처음이다. 비정규직화와 용역업체 폭력 등 병원쪽의 잘못으로 노동자의 생존권은 물론, 시민들이 의료권을 위협받는 상황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어 나섰다”고 말했다.

시민단체도 나서서 해결 실마리 찾아

시민 김수경(70)씨는 “한라병원이 가장 큰 병원인데도 직원들을 제대로 대우 안 해 그런지 불친절하다. 제대로 대우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회사원 김훈범(38)씨는 “우리 도내 문제는 안에서 해결하는 정서가 있는데, 육지 용역들까지 끌어들인 것은 잘못됐다”고 병원쪽을 비판했다. 김성수 원장은 “지역언론들도 우리쪽 주장은 안 실어주고 다 병원만 잘못했다고 하니 답답하다”고 말했다.

반면 일부에선 중재제도를 어긴 노조의 불법파업을 엄단해야 한다는 주문을 내놓기도 했다. 제주상공회의소와 제주도관광협회 등 주로 사용자와 보수단체들이 결집한 경제살리기범도민운동추진협의회는 29일 “국제자유도시 건설을 위한 외자유치는 노동시장의 유연성 없이는 기대할 수 없으며, 당국은 불법행위에 대해 엄정한 법집행을 하라”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지역여론을 둘러싼 제주도 내부의 치열한 각축은 한라병원 사태가 단순한 병원 노사문제의 차원을 넘어 제주도 시민사회의 진로를 둘러싼 핵심쟁점으로 떠올랐음을 말해준다. 고유기 사무처장은 “지금은 다수 시민의 공익 대 일부 병원 소유주의 사적 이익이 맞부딪친 상태다. 궁극적으로 환자들과 병원 노동자, 지역주민이 모두 승리할 수 있는 방안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제주=손원제 기자 won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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