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집 ] 2002년09월04일 제425호 

천사의 소망 “환자 곁으로”

병원 노동자 파업 100일의 고달픈 여정… 병원과 의사들 강경 입장에 정상화 요원


사진/ 누가 백의의 천사를 거리로 내몰았는가. 지난 8월30일 보건노조파업 공동대책위 소속 노동자들이 종묘공원 앞에서 집회를 열었다. (이용호 기자)


“장미꽃 향기 달콤하던 그날 아무런 준비 없이 파업을 시작한 우리는 어느덧 100일이 흘러 선배님의 퇴직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8월30일 오전 11시 서울 강남성모병원 로비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장면이 펼쳐졌다. 두명의 파업 노동자가 노조에서 마련한 정년퇴임식을 치르고 있었다. 노동자가 파업 도중 정년퇴임을 맞은 것도 진기한 일이지만, 하필 그날이 파업 100일째라는 사실도 각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정년퇴임’과 ‘파업 100일’은 둘 다 ‘길다’라는 느낌과 ‘가득 채웠다’라는 느낌을 내포하는 점에서 서로 통했다. 얼핏 모순관계처럼 보이는 이 두 사건이 한날 한공간에서 동시에 벌어질 수 있었던 사정이 또한 그렇다.

한눈 팔지 않고 외길을 걸었을 때 정년퇴임도, 파업 100일도 가능하다. 노부전(57)·이점순(57)씨는 각각 여의도성모병원과 강남성모병원 영양과에서 16년8개월과 15년 동안 환자와 직원들의 밥을 짓고 반찬을 만들었다. 또 그들은 월드컵 개최를 앞두고 축제 분위기가 뜨겁게 달아오르던 지난 5월23일 이후 당당히 파업현장을 지켰다. 그들은 성실하게 노동했고, 근면하게 파업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노씨는 “하느님은 정당하시니까 신부님들과 우리 가운데 누가 옳은지 분명히 선택하실 것이라 믿는다”고 말했다.

파업 100일에 열린 정년퇴임식 풍경


사진/ "정년퇴임에도 파업은 지속된다." 정년퇴임하는 두 조합원이 축하 케이크를 자르고 있다. (김종수 기자)


그래서였을까. 이날 병원 로비 농성장은 웃음과 울음이 밀리거나 썰리고 있었다. 로비를 가득 메운 노동자들은 김영숙 여의도성모병원 지부장이 “큰언니 같고 어머니 같은 두분의 정년퇴임을 이 자리에서 맞게 해서 미안하다”고 울먹일 때나, 차수련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 위원장이 “오늘의 축배와 꽃다발이 승리의 축배와 꽃다발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아쉬워할 때 다같이 흐느꼈다. 그러나 샴페인을 터뜨리고, 케이크를 자르고, 꽃다발을 건네고, 기념촬영을 하는 동안 노동자들은 목젖을 드러내고 여고생처럼 웃었다.

같은 시각, 서울 경희의료원 로비에서는 이날 병원쪽의 노조 간부 12명 해고 통보에 항의해 15명의 삭발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지난 8월23일 여성 조합원 11명을 포함해 20명이 삭발한 지 일주일 만이었다. 머리카락이 꽃잎처럼 떨어질 때마다 로비는 통곡으로 바다를 이뤘다. 하지만 삭발을 하고 난 여성 조합원들은 동료들과 미장원에서 머리를 다듬고 예쁜 모자도 사서 썼다. 그들에게 파업은 밥을 짓거나 빨래를 하듯, 일상과 공존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들이 처한 현실에서는 웃음이 배어나올 여지가 없다. 제주 한라병원은 8월22일 파업 참가자 108명 전원 해고라는 엄청난 도발을 감행했다. 25일 새벽에는 경비용역업체 직원들을 동원해 병원에서 잠자던 노동자들을 발로 짓밟고 방패로 찍어 끌어냈다. 용역업체 직원들은 이어 병원 정문에서 소방호스에 고춧가루를 섞어 노동자들과 시민들에게 뿌려댔다. 병원은 ‘폐업카드’를 내놓으며 비조합원들로부터 병원이 정상화될 때까지 각종 수당과 상여금을 받지 않는다는 ‘자구노력안’을 덤으로 받아내기도 했다.

노동자들의 고통은 규모로도 쉽게 확인된다. 가톨릭중앙의료원은 서울 강남·여의도·의정부 등 산하 3개 병원 파업 지도부와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해고 16명, 체포영장 발부 11명, 소환장 발부 73명, 징계회부 405명의 초강경 조처를 내렸다. 경희의료원에서는 파업 지도부 4명에게 체포영장이 발부되었다. 노동자들은 감당하기 어려운 빚더미에 올라앉을 처지에 몰렸다. 조합원 500여명을 대상으로 임금 57억원의 가압류와 20억원의 손해배상 소송이 제기되었다. 조합원 43명에게는 별도의 재산 가압류가 신청되었다.

사회적 연대를 위한 고통의 나날

병원 노동자들이 이런 험한 고통을 당하면서 싸움을 이어가는 데는 어떤 긴박한 사정이 있는 것일까. 제주 한라병원의 경우 전 직원 계약직화를 추진해온 병원쪽에 맞선 생존권 싸움의 성격이 강하다(○○쪽 참조). 그러나 가톨릭중앙의료원과 경희의료원 등의 파업은 성격에 다소 차이가 있다. 사학연금의 병원부담률을 높여줄 것을 요구하는 것을 제외하면 조합원 개인에게 직접적 이익이 돌아가는 요구조건은 드물다. 한라병원 노동자들도 정규직 조합원 90여명이 비정규직 조합원 50여명과 함께 비정규직 문제로 파업에 돌입했다.

보건의료노조의 이슈는 다분히 사회적인 내용들이 많다. 병원 노동자 전체뿐 아니라 환자들을 위한 요구조건들도 눈에 띈다. 보건의료노조는 지난 5월 87개 소속 지부 가운데 51개 지부에서 파업 찬반투표를 벌여 지부별로 평균 75%가 넘는 찬성률로 파업을 결의했다. 이들은 개별 사업장별 요구안 외에 사학연금 병원 부담률 증액을 비롯해 △산별교섭 쟁취 △의료 공공성 강화 △인력확보 및 근무제도 개선 △비정규직 정규직화 및 차별철폐 △선택진료비(특진비) 감면 등을 공통사항으로 요구했다.

남성 조합원이 다수인 사업장에서 흔히 정규직 노조가 비정규직 사원을 희생시켜 고용안정을 얻는 것에 견줘보면 여성 조합원이 70∼80%를 차지하는 보건의료노조의 요구조건은 매우 인상적이다. 규모가 큰 산별연맹 가운데 보건의료노조가 최초로 지난 98년 2월 산별 단일노조로 전환한 데서 보듯 병원 노동자들은 다른 어떤 직종보다 연대의식이 강하다. 보건의료노조 이주호 정책국장은 “조합원들의 강한 연대의식을 기반으로 한 산별노조이기에 사회개혁과 관련한 문제를 주요 이슈로 내세울 수 있었던 것 같다”고 풀이했다.

여성 조합원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보건의료노조가 연대의식이 강한 건 무엇 때문일까. “여성 노동자들이 남성 노동자들보다 상대적으로 생계부담이 적기 때문에 단결력이 강한 것도 한 원인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여성들은 순수한 연대의식을 갖고 있다. 일하는 여성들의 연대의식은 근본적으로 일터의 구조적 성차별 경험에서 비롯된다고 봐야 한다.” 차수련 보건의료노조 위원장은 “특히 간호사들은 같은 병원 내 전문직이면서도 의사들로부터 일방적인 직종 간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에 연대의식이 더욱 강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병원쪽 ‘법과 원칙’ 내세워 요지부동

그렇다면 여성 조합원의 강한 연대가 병원파업 장기화의 원인일까. “적어도 쉽게 파업을 포기하지 않는 원인은 될 수 있다. 해고되고 가압류를 당하는 동료를 두고 혼자 복귀할 수 없다고 말하는 조합원들이 많다. 지금이라도 당장 우리는 파업을 접고 환자 곁으로 돌아가고 싶다.” 조은숙 경희의료원 지부장은 “그러나 파업 장기화의 책임은 처음부터 직권중재를 노려 성실한 교섭을 회피한 병원쪽에 있다”며 “병원이 허울뿐인 ‘법과 원칙’의 이름으로 씌운 멍에를 거두지 않는 한 아무도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현재 가톨릭중앙의료원과 경희의료원 파업의 핵심 쟁점은 무노동 무임금과 손해배상, 징계 문제 등이다. 그러나 병원쪽 입장은 요지부동이다. 가톨릭중앙의료원쪽은 <한겨레21>의 병원장 인터뷰 요청을 거절했다. 홍보실 관계자는 “병원장은 이미 밝힌 대로 불법파업에 대해 무노동 무임금과 징계에 대한 두 가지 원칙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것말고 달리 할 말이 없다”고 전했다. 경희의료원 관계자도 “모든 문제를 법과 원칙대로 처리하겠다”고 밝혔다. 병원쪽이 내세우는 노동조합법의 직권중재 조항은 지난해 11월 서울행정법원에 의해 위헌심판이 제청된 상태다.

파업 타결을 어렵게 하는 데는 임상교수들을 비롯한 의사들의 강경 입장도 크게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가톨릭중앙의료원에서는 지난 6월18일 여의도성모병원 영양과 여성 조합원이 산부인과 진료를 받으러 갔다가 “파업 중인 사람은 진료해줄 수 없다”는 말과 함께 진료를 거부당했다. 경희의료원 사이트에는 “앞으로 병원 임단협은 의사들로부터 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이 올라오기도 했다. 차수련 위원장은 “의사들이 조합원을 불러 복귀 압력을 넣는 일은 어느 병원 사업장에서나 흔히 있는 일”이라고 밝혔다.

의사들의 이중잣대… “끝까지 간다”

의사들은 파업에 대해 이중적이다. 2000년 의사파업에 대해서는 “의료개혁을 위한 의로운 대정부 투쟁이기 때문에 무노동 무임금이나 징계는 안 된다”고 하더니, 병원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해서는 “환자의 생명을 볼모로 한 병원 내 투쟁이기 때문에 법대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김영숙 여의도성모병원 지부장은 “의사 파업 당시 병원은 임금을 체불하고 연월차 휴가를 당겨쓰게 하는가 하면 의사 역할을 대신 하게 하고 의사 파업 지지 서명까지 받아오게 했다”며 “우리가 하면 불륜이고 자기가 하면 로맨스냐”고 되물었다.

8월30일 가톨릭중앙의료원 두 여성 노동자의 정년퇴임식은 <딸들아 일어나라>라는 노동가요로 막을 내렸다. “어두웠던 밤 지나 새벽이/ 얼어붙은 땅 녹아 새싹이/ …/ 딸들아 일어나라 깨어라/ 이 땅에 노동자로 태어나/ 자랑스런 딸로 태어나/ …/ 참아왔던 그 시절 몇몇해/ 나가자 깨부수자 성차별 노동착취/ 뭉치자 투쟁이다 여성해방 노동해방.” 그들을 백의천사가 아닌 마녀로 내몬다면, ‘언니들의 파업’은 100일을 넘겨도 쉽게 흔들리지 않을 것 같다.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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