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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섹션 : 특집 등록 2002.08.28(수) 제424호

[특집] 누가 인공기를 두려워하랴

아시안게임 게양을 열린 사회 지표로… 아직도 당신은 북한의 깃발에 경직되는가

금강산이나 평양 등을 방문하는 남쪽 사람들이 가져가서는 안 될 것들이 있다. 이른바 ‘지참 금지 물품’이다. 여기엔 무기류·위조지폐·화학물질 등이 들어 있다. 하지만 이들 물건들은 다른 나라를 방문할 때도 마찬가지로 반입이 금지되는 것들이다. 유독 북한이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들이 있다. 남쪽에서 출판되는 각종 인쇄물이나 그림 따위다. 특히 남쪽의 정식 국호인 ‘한국’, ‘대한민국’이란 글자나 태극기 문양을 새긴 의류 등의 북한 반입은 엄격하게 통제한다. 어떤 단체가 금강산에서 행사를 열면서 현수막을 내걸려면 사전에 북한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현수막에 새긴 글자 내용을 사전 검열하기 위해서다. 예컨대 행사 주최자가 ‘한국00협회’라면 ‘한국’이란 글자는 빼고 그냥 ‘00협회’만 붙여야 한다. “이번만 좀 봐달라”고 사정해도 눈감아주는 경우는 흔치 않다.

반세기 넘도록 소모적 신경전 벌여

사정이 이러니 태극기를 들고 들어가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남쪽 사람이 날마다 수천명씩 금강산 관광길에 오르고 있으나, 이런 국가 상징물에 대한 북한 당국의 강한 거부 태도는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북한을 방문하는 사람들의 고민거리는 또 있다. 도대체 북한의 국호를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다. 그냥 ‘북한’이라고 불러도 될까. 아니면 ‘북쪽’, ‘북측’이라고 해야 할까.

북한 방문 경험자를 통해 간신히 북한 당국이 선호하는 호칭을 알아냈다. 그냥 ‘북’ 또는 ‘북쪽’이라고 부르면 무방하단다. 간혹 실수로 무심결에 ‘북한’이라고 하면 그들은 버럭 화를 낸다. 물론 이런 태도는 과거에 견줘 최근에는 많이 누그러졌다. 하지만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더는 실수하지 말라는 경고가 뒤따른다. 그들은 내부적으로 정식국호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약칭인 ‘공화국’이라는 용어를 즐겨쓴다. 남쪽 사람들이 가끔 이 호칭을 쓰면 북쪽 사람들은 반색을 한다. 하지만 이 용어는 남쪽 공안 관련 부서에서 눈살을 찌푸리는 용어다. 남쪽 사람들이 북쪽 관계자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모처럼 공화국이라고 불러주려면 주위 눈치부터 먼저 봐야 한다.

어쨌든 북한은 남쪽의 국가 상징물에 대해 무척이나 경직된 자세를 보여왔다. 최근 부산아시아경기대회에 인공기 사용을 둘러싼 논란들을 보면 남쪽도 북한 못지않게 뻣뻣해 보인다. 남이나 북이 국가 상징물을 갖고 소모적인 신경전을 벌이는 것은 지난 50여년간 몸에 밴 체제경쟁 의식이 아직도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국호나 국기를 놓고 힘겨루기를 하고 있다는 것은 남북한이 여전히 냉전시기의 체제경쟁 의식에 사로잡혀 있음을 뜻한다고 풀이한다.

남북 정상이 포옹하고, 50년 이상 헤어져 살던 가족·친지들이 회포를 풀고, 남북한을 수시로 오가는 사람들 수가 하루가 다르게 늘고 있지만 아직도 금기시되는 것들이 두루 널려 있다. 인공기는 그 많은 금기물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인공기’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기’를 줄인 말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남쪽에는 ‘인공’이라는 단어만 봐도 섬뜩해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일종의 ‘레드콤플렉스’에 빠져 있는 셈이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옛 속담처럼 어떤 일에 몹시 놀란 사람은 그와 비슷한 것만 보아도 놀라는 식이다.

국민을 레드콤플렉스에 가두지 말라

우리는 이미 지난해 8·15 평양 통일축전 때도 비슷한 내홍을 겪은 바 있다. 한 참가자가 김일성 주석 생가인 만경대 방명록에 ‘만경대 정신 이어받아 통일위업 이룩하자’는 글을 남겨 엄청난 파장을 몰고온 적이 있다. 당사자는 국가보안법상의 반국가단체 고무·찬양죄로 기소됐다. 그 뒤 남쪽 사회는 남남 갈등이라는 유례없는 광풍을 맞고 휘청거려야 했다. 사실 정부 관계자들은 물론 많은 일반 사람들은 아직도 만경대 정신이 무엇을 뜻하는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검찰은 방명록에 ‘만경대 정신 이어받아 통일위업 이룩하자’고 서명하면서 주체사상 계승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그를 기소했다. 하지만 보석으로 풀려난 상태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당사자는 “만경대 정신과 주체사상 간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객관적 근거를 제시하라”며 “검찰이 방북단 파문이 일자 나를 문제삼은 것은 편의적이고 자의적인 법 적용이며 이번 방명록 파문은 필화사건”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아마도 공안 당국은 사실에 기초해 엄격한 법의 잣대를 들이댔다기보다는 국민 정서를 우선적으로 고려했는지 모른다. 보수 언론들이 공안 당국의 등을 떠민 것도 만경대 파문의 당사자를 재판의 도마 위에 올려놓는 데 한몫 단단히 했음은 물론이다. 한국 사회가 아직도 깊은 레드콤플렉스의 수렁에 빠져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하지만 지난 6월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군 월드컵은 레드콤플렉스 환자들을 침묵게 했다. 이제 한국 사회도 저 지긋지긋한 망국병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움튼 것도 사실이다. 전국 방방곡곡에 넘실댄 붉은 응원 물결이 가져온 놀라운 변화였다. 붉은색은 이제 더는 북한의 호전성만을 떠올리는 상징물이 아니게 된 것이다. 월드컵은 비난 남쪽 사회뿐 아니라 북쪽 사회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북한 당국은 한국팀과 붉은악마의 응원장면이 고스란히 담긴 월드컵 주요 경기를 녹화해 주민들에게 보여주었다.

레드콤플렉스는 이제 그만… 축제에 깃발은 필수

북한의 <조선중앙TV>는 월드컵 대회를 녹화중계하면서 한국팀의 16강전을 시작으로 준결승전과 3, 4위전까지 편집·방영했다. 경기장의 개최도시 영문 광고판과 태극기까지 화면으로 그대로 내보냈다.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남쪽의 변화된 인식은 최근 부산아시아경기대회에서 인공기 사용 허용 여부를 묻는 여론조사에서도 보인다. 한국 국민 10명 가운데 6명꼴로 부산아시아경기대회에서의 인공기 게양 및 인공기 사용 응원에 찬성한다고 밝혔다. 통일부가 8월17일부터 이틀 동안 여론조사회사 ‘리서치 앤 리서치’에 의뢰해 20살 이상 전국 남녀 1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다.

하지만 수구·보수 언론과 일부 강경파들의 목소리는 여전하다. 검찰도 이들을 의식해 일정한 구역 내에서 제한적으로 인공기 게양을 허용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는 듯하다. 아시아경기대회 참가 회원국기를 게양토록 하는 아시아올림픽평의회 헌장과 규정 등 국제 관례상 인공기 게양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기장 밖은 물론, 경기장 안에서의 인공기 사용 응원은 허용하지 않은 쪽으로 궁리를 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국내 실정법 체계에서는 인공기 게양이 국가보안법상 반국가 단체에 해당하는 북한을 찬양·고무하는 행위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정부 관계자는 법보다 국민감정이나 보수 여론에 더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음을 숨기지 않는다. 특히 6월29일에 불거진 서해교전에 대한 분노가 채 사라지기 전이라 더욱 곤혹스러워 보인다.

그렇다고 미리부터 국가보안법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를 것 같지는 않다. 너무 엄격하게 법을 적용했다가는 모처럼 다시 살아나는 남북 대화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또 한국이 지레 겁먹고 순수 스포츠를 정치 논리로 비약한다는 나라 안팎의 비난도 감수해야 한다. 물론 무제한적으로 인공기 사용을 허용할 수도 없는 처지다. 이들이 우려하는 것은 경기장 밖에서 벌어질 일들이다. 검찰은 인공기 게양이 무제한 허용될 경우 대학 캠퍼스에 인공기나 불법 걸개그림 등이 무분별하게 등장하는 등 아시아경기대회를 틈탄 학원 내 운동권 단체의 범법행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정부도 어정쩡한 자세다.

하지만 이런 모든 우려는 기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북한 당국에서도 스포츠를 떠난 정치적인 목적에서 경기장 밖에서 무분별하게 인공기를 게양하거나, 응원에 이용하는 과열 분위기를 우려하는 것으로 보인다. “북쪽은 인공기 문제로 또다시 남북 화해 분위기가 식는 것을 원치 않고 있어요. 자신들의 아시아경기대회 참가로 분위기가 지나치게 뜨거워지는 것도 경계하고 있다는 얘기지요. 그렇다고 경기장 안에서까지 남쪽 당국이 인공기 사용을 하라 말라 하는 것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입니다. 북쪽 협상 실무자들도 남쪽 국민 정서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았어요. 원만한 타협점이 모색될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아시아경기대회 참가 문제와 관련해 금강산에서 열린 북쪽과의 실무접촉을 지켜본 한 관계자의 말이다.

북쪽 원만한 해결 기대… 명분보다 실리를

일각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이번 스포츠 행사가 북한의 정치 선전·선동장으로 악용될 위험성은 거의 없다는 주장이다. 사실 부산아시아경기대회 조직위원회는 북한의 참가를 성사시키기 위해 무진 애를 써왔다. 조직위는 주로 남쪽 당국의 공식 대화채널을 활용해왔다. 하지만 북한은 이런저런 이유를 내세워 시간을 끌었고 마침 서해교전까지 터지는 바람에 조직위는 북한의 불참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인 상태였다.

하지만 북한이 돌연 남북관계를 복원하겠다고 나서면서 다 꺼진 듯하던 불씨가 되살아났다. 북한은 665명이라는 대규모 선수단과 응원단을 부산에 보내겠다는 결단을 내렸다. 스포츠를 통해 민족의 화해와 교류에 보탬이 됐으면 하는 마음에서다. 북한 당국이 처음부터 작정하고 아시아경기대회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했다면 이렇게 뜸을 들이지 않았을 것이라는 게 정보 당국의 평가다. 이들은 이번 8·15 서울 민족통일대회가 별탈 없이 끝난 것처럼, 부산아시아경기대회에서도 불상사가 없을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보수 언론이나 세력한테 공세의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무리수를 두지는 않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번 인공기 논란을 지켜보며 많은 지성인들이 정작 씁쓸해하는 것은 남쪽 사회의 못난 자화상이다. 국가 상징물 사용에 관한 한 남쪽 체제가 과연 북쪽보다 낫다고 자신 있게 내세울 게 있는지 의문이 생긴다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정부의 한 고위 관계자는 개인 견해임을 전제로 “한국 사회가 항상 북에 대고 낫다고 자랑스럽게 말해온 게 몇 가지 있다. 자유민주주의 체제, 다양성, 다원주의, 열린 사회, 관용 따위다. 남쪽 사회가 순수 스포츠 경기에서마저 인공기 사용과 관련해 너그러운 관용이나 자신감보다는 옹졸하고 편협한 자세를 보여준다면 북한의 엘리트들이나 주민들이 남한을 어떻게 생각하고 무엇을 배우겠느냐.” 명분보다 실리를 찾아야 할 때라는 지적이다.

인공기는 부산서, 태극기는 평양서

지구상 가장 폐쇄적인 국가라는 오명을 들어온 북한도 실리 추구에 골몰하고 있는 터다. 이번 아시아경기대회는 30억 아시아인이 체제와 이념, 종교의 벽을 뛰어넘어 화합과 단결의 모습을 전 세계에 과시하는 스포츠 대제전이다. 손혁재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은 “월드컵 때 세계인이 박수를 쳐주었던 한국민의 성숙한 시민의식을 이번에도 유감 없이 보여줘야 한다. 소모적인 인공기 논란으로 세계인의 웃음거리가 돼서는 안 된다”며 “인공기가 부산이나 서울 하늘에, 태극기가 평양 하늘에 자유롭게 나부끼는 그날이 하루속히 오기 바란다”고 말했다.

임을출 기자 ch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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