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집 ] 2002년03월13일 제400호 

세계 속 한국인, 몸으로 울다

창간 8돌 기획 l 독자 NG 리포트

독자 8인의 좌충우돌 NG 리포트… 짜릿하고 공포스럽고 정겨운 세계인의 일상들

독자들이 들여다본 지구촌 사람들의 일상은 너무도 다양했습니다. 타향에서의 전신마취 수술, 유스호스텔의 빈대 잡기, 쓰레기 널린 인도의 철길…. 곳곳에서 타인의 편견 때문에 상처입기도 하고, 자신의 편견 때문에 오해를 받기도 하며, 세계를 배워나갑니다. 이렇게 독자 NG 리포트는 외신 기사들에서 볼 수 없는, 세계의 감춰진 모습을 보여줍니다. 지면사정으로 인해 모든 독자의 글을 싣지 못한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참여해주신 모든 독자께 유용주씨의 노동소설 <마린을 찾아서>를, 글이 선정된 독자께는 책과 함께 원고료를 송부해드립니다. 편집자

빈에서 빈티내며 빈대 잡기


일러스트레이션/ 설은영
유럽 배낭여행 중 부다페스트의 민박집에서 ‘바람98’이라는 이메일 아이디를 쓰는 한국인 남자와 빈으로 갔다. 그날 묵을 숙소를 찾다가 숙박료가 다른 유스호스텔에 비해 딱 절반이라는 이유로 돈보스꼬재단에서 운영하는 유스호스텔로 결정했다. 빈에 왔다고 너무 빈티나는 곳에 드는 것이 아니냐고 서로 농지거리를 하며 물어물어 찾아갔다. 예상대로 건물은 족히 이삼십년은 된 듯한 낡은 모습이었다.

빈 시내를 여기저기 돌아보다가 열시가 훌쩍 넘어서야 불 꺼진 객실로 돌아와 정신없이 잠자리에 들었다. 잠자리도 낯설고 몸도 여기저기 가려운 듯해서 깊은 잠이 들지 않았다. 그렇게 새벽녘까지 비몽사몽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부욱부욱, 북북 하며 무언가를 긁어대는 소리가 끊이질 않는 것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윗침대에서 잤던 ‘바람’은 얼굴이 옻이라도 옮은 것처럼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 사람 왈, 빈대가 있다는 것이었다. 어제 나도 적잖이 괴로움을 당한 터라 퍼뜩 정신이 들었다. 어제 그 소리는 그가 발진한 피부를 긁어대는 소리였다. 그는 빈대에 알레르기가 있다면서 얘기를 하는 중에도 구석구석을 계속 득득 긁고 있었다. 둘쨋날 ‘바람’은 초저녁에 출발하는 밀라노행 야간열차를 타러 역으로 나서면서도 팔등을 긁고 있었다. 나는 좀더 늦은 시각에 베네치아행 기차를 탈 참이었는데 마침 프런트를 보는 수위의 배려로 출발시간까지 객실에 들어와 있었다.

밤새 야간기차를 타야 하기 때문에 미리 면도를 하고 세면장을 나오는데 금발의 꽁지머리에 키가 훤칠한 백인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는 객실 여기저기를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무엇인가를 찾는 것처럼 이불을 들춰보기도 하고 허리를 바싹 숙여서 바닥을 유심히 들여다보기도 한다. 한참을 그러고 있길래 도와줄 생각으로 뭘 찾느냐고 물었더니, “스몰 박스”를 찾는다는 것이다.

박스라면 상자를 말하는 것인데…. 여행 내내 눈치코치로 의사소통을 해오던 터라 이번에도 단번에 그가 말하는 몇 마디로 모든 것을 알아챘다. 그는 반지나 목걸이 따위를 넣어둔 액세서리 함을 두고 간 것이었다. 그를 거들어 여기저기를 기웃기웃 훑어보지만 상자는 없다. 더 찾는다고 그 상자가 나올 성싶지 않아 나는 꽁지머리에게 정중하게, “If I find it, I’ll put it on the front desk on the first floor”(내가 그것을 찾으면 1층 프런트에 있는 책상 위에 갔다 놓을게요)라고 말하고 그만 찾고 나가줄 것을 권유했다. 꽁지머리는 내가 못 미더운지 눈살을 찌푸리며 “Oh, no”라고 볼멘 소리다. 일단 내 영작문을 알아들었다는 점에서 흐뭇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제한으로 꽁지머리를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나는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조금 전에 사용했던 영작문을 기억해내서 아까보다 좀더 큰 목소리로 외웠다. 그런데 이 사람이 이번에는 어깨를 치켜들고 입까지 삐죽이며 잔뜩 인상을 찌푸린다. 나는 슬슬 화가 치밀어오기 시작해서 꽁지머리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마땅한 다른 문장이 떠오르지 않아서) 아까 그 영작문을 한번 더 쓰기로 했다. 더 크고 더 빠르고 더 높은 톤으로 그 문장을 외쳐서 “당장 나갓!”이라는 의미를 표현하려던 참이었다. 큰 숨을 한번 들이마시고 막 입을 떼려는 찰나, 하필 그 순간 배꼽 안으로 뭔가가 기어들어가는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상대를 노려보는 시선을 놓지 않으며 일단 배꼽 주변을 박박 기 시작했는데 바로 그때 꽁지머리가 “벅스?”(벌레)라고 말끝을 올리며 미간을 찌푸린다.

“아하, 버그스!” 쯧쯧…. 그제서야 나는 그놈의 ‘스몰 박스’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분절어에 익숙한 나는 연음된 벅스(bugs)를 박스(box)로만 들은 것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꽁지머리는 그날 8층에 투숙했는데 자기 방에 빈대가 있어서 다른 객실로 옮기려고 살피러 왔다고 한다. 결국 그런 그에게 빈대를 찾으면 일층 프런트 책상 위에 가져다 놓겠다고 했으니 그가 당황했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빈에서의 경험 이후로 정확한 발음이 소통을 원활하게 한다는 당연한 사실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바람’은 그 뒤 스위스의 취리히 역사에서 다시 한번 만날 수 있었다. 유럽 인구의 1/3을 감소시킨 중세의 흑사병을 옮긴 것이 바로 빈대였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옆구리를 북북 긁으며 유럽 곳곳을 엽기적으로 돌아다니고 있었다.

김원형/ 광주시 서구 화정3동

자리 양보는 실례


일러스트레이션/ 설은영
1999년 11월 말경이었다. 남보다 늦은 결혼의 신혼 여행지로 미국의 서부지역을 선택한 나는 LA와 샌프란시스코를 1주일 동안 빠듯하게 돌아보고 있었다. 대학 때의 전공이 영어였고 나름대로 영어권의 언어나 문화에 대해 남들보다는 더 잘 이해한다고 자부하고 있던 터라 아내와 나는 여유있게 낯선 곳에서의 자유를 만끽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샌프란시스코에서 있었던 일. 샌프란시스코는 우리의 제주도처럼 세 가지가 많은 지역이라고들 하는데, 그것은 안개와, 바람, 언덕이다. 그런데 그것만큼이나 유명한 것은 ‘케이블카’다. 미국의 대도시에 어울리지 않는 고풍스러운 모습으로 덜컹거리는 소리를 내며 가파른 언덕을 오르는 케이블카의 모습은 샌프란시스코에 처음 간 사람이라도 쏙 눈에 들어오는 정겨운 풍경이 아닐 수 없다. 이 케이블카는 1906년 대지진으로 운행이 중단되었다가 거액의 보수비를 들여 1984년부터 재운행되고 있고, 꼭 관광객이 아니더라도 시민들의 출퇴근용으로 많이 이용되는 것이라고 여행 안내책자는 말하고 있었다. 마침 내가 머물던 숙소와 시내가 케이블카의 한 노선으로 연결되고 있었기 때문에 케이블카를 타고 시내를 둘러보기로 하고 들뜬 기분으로 올라탔다. 그다지 넓지 않은 단칸짜리라 좌석이 많지 않은 가운데도 운 좋게 아내와 나는 자리를 차지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웬걸! 잠시 뒤에 60살은 족히 넘어 보이는 노부부가 우리 앞자리에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케이블카가 워낙 만원이라 서 있기도 만만치 않아 보였다. 서울의 만원 지하철 풍경과 자리를 놓고 벌어지는 과도한 신경전에 익숙해 있던 나는 당연히 자리를 양보하기 위해 벌떡 일어섰다. 그랬더니 할머니처럼 보였던 노부인이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너 여기서 내리느냐?”고 물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에 당황한 나는 “두 분 모두 어른(senior citizen)처럼 보이니 여기 앉으시라”고 했다(나도 서양사람들이 스스로에게 ‘old’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고 자신하면서). 그랬더니 불쾌한 표정을 지으면서 할아버지가 하신 말씀. “I still have twenty five years to collapse!”(나 아직도 죽으려면 25년 남았어!) 윽! 결국 어정쩡하게 서 있던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아서 그분들에게 사과해야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연세 드신 분들에게 이런 곳에서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으로 이해되는데, 혹시 감정이 상하셨으면 이해하십시오.” 결국 두 분도 내 말뜻을 이해하고 케이블카에서 내릴 때는 가벼운 눈인사를 주고받았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자랑스러운 전통인 경로효친 사상이 지구상 어디에서나 유효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앞으로 내가 샌프란시스코를 생각할 때면, 딸랑거리는 종소리와 함께 힘겹게 언덕을 오르던 덜컹거리는 케이블카, 그리고 그 안에서 당당히 서 계시던 은빛 머리의 노부부를 함께 떠올리게 될 것이다.

김규완/서울시 서초구 방배1동

네팔 수술실의 공포체험


일러스트레이션/ 김성희
아득하게 멀리서 사람의 형체가 어른거렸다. 정신은 조금씩 살아났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내가 지금 죽은 건가? 어렴풋이 푸른 옷을 입은 아내의 모습이 보였다. 아 살았구나….

지난 2000년 6월 난 네팔의 포카라국립병원에서 전신마취를 하고 수술을 받았다. 영어엔 젬병인 탓에 아직도 정확한 병명은 모른다. 엉덩이에 난 종기 비슷한 것을 제거하는 수술이라는 정도. 뭐라고 떠드는 의사의 말 중에서 겨우 몇 마디만 이해할 수 있었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널 치료해주겠다.”

당시 직장생활에 지칠 대로 지친 아내와 나는 인도, 네팔로 배낭여행을 떠났다. 시간이 갈수록 우리는 인도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어 갔다. 하지만 섭씨 40도를 훌쩍 넘는 무더위는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 우리는 네팔로 피신(?)하기로 결정하고 갠지스강의 화장터로 유명한 인도의 마지막 여행지 바라나시로 향했다.

말로만 듣던 인도 기차의 2등 침대칸. 더위 속에 오래 앉아 있다보니 살에 난 상처가 곪기 시작했나보다. 당시에는 잘 몰랐는데, 네팔 포카라에 도착했을 때에는 앉아 있기가 힘들 정도였다. 여기서부터 나의 좌충우돌 네팔 국립병원 체험이 시작됐다. 묵고 있던 게스트하우스 종업원에게 콩글리시로 “아프다”와 “병원”을 반복하니, 눈을 둥그렇게 뜨고 자기를 따라오란다. 택시를 잡아타고 함께 포카라국립병원으로 향했다. 복도에서 3시간이나 기다린 끝에 진료 차례가 돌아왔다.

수술실로 들어가니 더러워 보이는 수술복을 내주며 갈아입으란다. 침대 난간으로 바퀴벌레가 기어다니고 여기저기 피가 낭자한 수술실 침대에 벌벌 떨며 누워 있는데, 의사가 안심하라며 따뜻한 미소를 지어줬다. 웃으며 “Small Operation”을 하겠다고 하더니 팔에 주삿바늘을 꽂는 게 아닌가? 피검사겠거니 생각하다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팔다리가 다 잘린 듯한 기분. 난 전신마취를 한 채 수술을 받은 것이다!

다행히 종기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의료비도 무척 저렴했는데(모두 3만원 정도) 그것도 외국인이라 몇배를 받은 거란다. 가난한 사람들도 돈걱정 없이 아플 때 병원을 찾을 수 있다는 점이 부러웠다. 친절한 의사와 간호사들, 자기 일처럼 도와준 게스트하우스 종업원도 너무 고마웠다.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사람은 다음날 나를 데리고 다니며 약도 타주고 통역을 도맡아 해준 택시운전사 게비 구릉. 한국에서 5년 동안 일하며 월급을 떼어먹힌 적도 있다는데, 참 따뜻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우리를 도와주었다. 새로운 직장에 다니며 다시 반복되는 생활을 하고 있는 요즘, 가끔씩 생각난다. 포카라국립병원 수술실의 공포체험과 네팔 사람들의 따뜻했던 마음씨가….

조계환/ 서울시 양천구 목1동

파리 가면 V자를 그려요


일러스트레이션/ 설은영
지난 1월, 프랑스 외무성 고문서를 읽기 위해서 복사신청을 해놓은 뒤, 버스를 타고 아르스날 도서관을 향해 가다가 몹시 배가 고파서 일단 생제르맹데프레 성당 앞에서 내렸다. 20년쯤 전 유학 시절에 살던 뤼데시조 거리가 가까워서 옛 생각도 나고, 늦은 아침도 먹기 위해서 였다. 유학 시절에는 단 한번 들어가봤던 레되마고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샌드위치와 맥주 한잔을 시켰다.

샌드위치를 뜯고, 맥주 한 모금 마시고, 생제르맹데프레 성당을 보면서 모처럼 한가한 오전 시간을 가졌다. 옆에 먼저 와 있던 일본인 여자 손님 둘이 자리를 뜨고, 또다시 일본인 여자 손님 넷이 들어와 내 뒤편에 앉았다. 그들은 웨이터가 음료를 가져오자 그 자리에서 계산을 했다. 나는 자리를 뜰 때가 되어서, 계산을 하려고 돈을 꺼냈다. 11.30유로, 역시 비싸다. 5유로를 꺼내서 계산서 위에 놓고 웨이터를 찾았다.

내 자리인 19번 담당 웨이터는 좀처럼 나와 눈을 맞추지 않는다. 나는 일어서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그를 몸짓으로 불렀다. 그가 오더니 돈을 집고 내 눈앞에서 흔들면서 “감사합니다”를 한두번 하더니 돌아선다. 나는 그에게 ‘거스름’이라고 말했다. 그는 돌아서더니 거스름 3.70유로를 탁자 위에 놓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돈을 남겨두고 가시든지, 주고 가시든지 그것은 전적으로 손님 마음입니다.”

양심적인 웨이터는 일단 돈을 거슬러주고 고맙다고 말한 뒤 물러선다. 그때 손님이 거스름의 일부나 전부를 남겨두고 간다. 그것이 바로 그 19번 웨이터의 말처럼 “전적으로 손님 마음”이다. 그러나 19번은 자기 마음대로 돈을 가져가고자 했다. 만일 내가 조금 늦게 반응을 보였거나,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면, 그는 내게서 3.70유로(우리 돈 4천원 남짓)를 쉽게 빼앗아갔을 것이다. 그렇게 당한 동양인(한국인이나 일본인)이 얼마나 많았을까?

나는 그에게 손가락으로 V자를 그렸다. 웨이터도 웃었고 나도 웃었다. 그 V는 승리라는 의미가 아니었다. 나는 프랑스 혁명 전에 도둑에게 내린 형벌을 생각했다. 그 웨이터의 조상들은 도둑(voleur)의 이마에 V자를 새겨 군선의 노를 젓게 하거나, 심한 경우 사형시켰다. 파리는 역시 아름답다. 그러나 여행자 가운데 불쾌한 추억을 안고 돌아가는 사람도 많다. 공항에서 테러 위협 때문에 주인 없는 가방을 폭파하는 소리가 가끔 들리고, 지하철에서 소매치기를 조심하라는 방송이 나오는 것은 참을 만하다. 그러나 시장이나 카페에서 거스름을 제대로 주려고 하지 않는 사람을 만나면 불쾌하다. 아름다운 파리에 가면, 누구라도 한번쯤 V자를 그리는 경우가 생길지 모른다.

주명철/ 충북 청원군 강내면

너무 깔끔떨지 마!


일러스트레이션/ 김성희
우리나라를 여행한 어느 인도 사람이 “한국은 참 깨끗한 나라더라. 심지어 철길마저도 깨끗하더라”라는 말을 했단다. 사실 한국에서는 왜 “심지어 철길마저도”라는 말을 들어가는지 의아할 것이다. 가령 ‘시골 버스터미널의 화장실마저’라고 했으면 이해가 쉽게 될 텐데. 그러나 인도를 여행해본 사람이라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인도의 철길…. 각종 쓰레기는 물론이고, 여기저기 자리잡은 인분(!)에서 뿜어나오는 그 악취는 얼마나 감당하기 어려운지. 대낮에도 버젓이 철길에다 노상방뇨를 해대는 용감무쌍한 남자들은 또 얼마나 많은지. 한번은 아직 출발하지 않은 기차에 앉아 무심히 창 밖을 내다보다가 건너편 철길쪽에서 내가 탄 기차쪽으로 볼일을 보고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 혼비백산한 적도 있다.

인도에 온 첫해의 겨울방학, 델리에서 바라나시로 가는 밤기차를 탔다. 그 기차 안에서 이탈리아에서 온 한 남자를 만났는데 그는 인도 아이들에게 나눠주겠다고 장난감을 한 보따리 가져온 독특한 사람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같이 비스킷을 먹었는데, 그 남자가 그 비스킷 봉지를 달리는 차창 밖으로 휙 버리는 것이 아닌가. 아직 ‘한국물’이 덜 빠진 탓이었는지, 순간 깜짝 놀라 “그런 건 가지고 있다가 쓰레기통에 버리는 거예요” 하고 바른 교육을 받고 자란 한국학생답게 점잖은 훈계를 했다. 그러자 그 남자 하는 말인즉, “나도 처음엔 꼭꼭 쓰레기통을 찾아 휴지를 버렸지요. 어느 기차역에서 쓰레기통에 휴지를 버리고 기차를 기다리고 있으려니까 청소부가 다가오더군요. 그 청소부가 쓰레기통을 들고 가길래 음, 쓰레기통을 비우러 가나보다, 생각했답니다. 그런데 그 청소부는 그 쓰레기통을 철길쪽으로 들고 가더니 안에 있던 쓰레기를 철길에 확 쏟아붓던걸요?” 그리고는 자, 어떻게 할까,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너무 어이없어하는 나를 보고 웃더니 그 남자는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조금 있다가 “차이(차)∼ 차이∼”를 외치며 차장수가 지나갔다. 그 차장수가 다른 칸으로 옮겨가자마자 그 남자는 굉장한 비밀이라도 말하는 듯이 낮은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저 사람에게서 차 사 마시지 마세요. 저 사람이 무슨 물로 차 끓인 줄 알아요? 화장실에 왜, 그 수도꼭지 있잖아요, 변기 옆에. 인도 사람들 볼일 본 뒤에 처리하는 용도로 쓰이는 물. 그 물로 끓였다니까요!” 분개한 그 남자는 이 중요한 사실을 우리만 알아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우리 맞은편에 앉은 인도 사람들에게도 이야기해주었다. 그런데 인도 사람들은 무심히 앉아 있다가 시큰둥하게 한마디 했다.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다는 겁니까? 아무 상관없어요.” 그 남자의 머쓱해하는 표정이라니! 그런 식으로 선의를 묵살당한 그 남자를 배려하느라 곁에 앉은 나는 터지는 웃음을 애써 다스려야 했다. 그런 다음 다시 다가온 다른 차장수에게 그 남자는 차를 주문했다. 차를 사 마시는 그 사람에게 짐짓 심각한 듯 물어보았다. “저 사람도 그 물로 차 끓였으면 어떡할 거예요?” 그랬더니 그 남자는 “뭐, 내가 안 봤으면 모르는 거죠. 신경 안 쓸래요”라고 말한다. 왠지 포기한 듯한 그 남자의 표정 때문에 참았던 웃음이 다시 터지려고 했다.

우명주/ 인도 델리

어른 앞에선 무릎 조심


일러스트레이션/ 김성희
나는 일본 유학생이다. 내가 사는 기숙사는 화장실을 공동으로 쓰고 있다. 어느날 평소와 다름없이 용변을 보려고 하는데 쪽지가 붙여져 있었다. “이 휴지통에 화장실 휴지를 버리지 마시오.” 휴지통에 버리지 않으면 가지고 가란 말인가. 나는 그 쪽지를 보고도 이해가 안 가서 무시해 버렸다. 그리고 며칠이 더 지났다. 아마 화장실을 수십번도 더 들락거렸을 것이다. 그 휴지통에 더 큰 글씨로 휴지를 버리지 말라고 쓰여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무래도 신경이 쓰여 선생님에게 물어보니, 화장실 휴지는 휴지통에 버리면 안 되고 변기에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건 휴지통이 아니고 작은 쓰레기나 생리대 등을 버리는 쓰레기통이라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나는 부끄러워 어쩔 줄 몰랐다.

또 한 가지 일화가 있다. 내가 일본 와서 가장 믿고 따르는 히토미 오그리 선생님은 내가 한국에서 고등학교 다닐 때 나를 가르쳐주셨던 분이다. 선생님의 임기가 끝남과 동시에 나도 고교를 졸업하고 선생님을 따라 일본으로 유학을 왔다. 그런 선생님은 내게 커다란 위안이자 의지처였다. 어느날 선생님댁에 놀러갔다. 그때 선생님의 어머니도 계셨다. 그래서 인사를 드리고 얌전히 앉아 있었다. 선생님이 잠깐 나가셨을 때, 어머니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조금 화가 난 듯한 표정이라 나는 은근히 풀이 죽었다. “선생님의 어머니께도 잘 보이고 싶었는데… 역시 일본 사람은 한국인인 나를 좋아하지 않는가보다”라고 생각하니 속이 좀 상했다. 나는 얼굴이 좀 벌게져서 고개를 수그리고 있었다. 그때 선생님께서 들어오셨다. 선생님은 방안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눈치채시고 설명을 하신다. 그때 나는 두 무릎 다 꿇고 있으면 발이 저릴 것 같아서 한쪽 무릎은 구부리고 한쪽 무릎은 세우고 있었는데 그것 때문에 어머니께서 화가 난 거라고 하신다. 일본에서는 두 무릎을 반드시 구부리고 앉아야지 그렇게 앉으면 실례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선생님의 어머니는 내가 버릇없이 군다고 생각한 것이다. 일본과 한국, 가까우면서도 먼 나라라고 한다. 이것은 두 나라 사이의 미묘한 관계를 뜻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역시 문화의 차이는 무시할 게 못 된다. 이웃나라인데도 이 정도이니 말이다.

정태연/ 일본 나고야

파업에 대한 보답


일러스트레이션/ 설은영
95년 12월, 나는 취업을 마치고 유럽 배낭여행을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 유럽에 대해 나름대로 많은 관심을 가지고 관련 서적 및 신문을 꼼꼼히 살피곤 했다. 파리의 지하철은 파업중이어서 나는 파리를 제일 마지막 여행지로 선택했다. 상당한 부담감을 가지고 파리 시내로 들어서며 공항버스 운전사에게 물어보니 파업이 끝났다고 했다. 안도의 숨을 내쉬며 개선문에 내려 지하철을 타기 위해 역으로 들어섰다. 표를 사기 위해 나와 친구는 돈을 내밀고 표를 달라고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표를 안 파는 것이었다. “아! 아직도 파업중이구나.” 당황하기도 하고 겁도 덜컥 났다. 매표원은 우리를 향해 손짓을 하며 뭐라고 말을 했는데 우린 프랑스어를 몰랐기 때문에 들으려 하지도 않았다. 배낭을 짊어지고 역 구내를 나가려는 순간, 그 매표원이 달려와서는 우리를 잡았다. 겁이 더럭 났지만, 그래도 용기를 내서 그에게 영어로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그가 한 말은 “공짜예요, 공짜예요”였다. 그가 지금까지 계속 우리를 향해 한 말이 바로 그것이었다. 공짜라니 말이 되는가. 좀 어리둥절했지만, 일단 지하철을 타고 숙소를 찾아갔다. 주변 사람들에게 이 일에 대해 물어보니 다들 박장대소하며 파업은 오늘 오전에 끝났으며, 시민들에게 불편을 끼친 것에 대한 사과와 성원에 대한 보답으로 일주일간 파리의 지하철 및 철도 중 일부를 시민들이 무료이용토록 한다는 것이었다. 이럴 수도 있구나! 정말 눈물이 나도록 부럽고 우리나라의 현실이 상대적으로 더 암울해 보였다. 프랑스 노동운동의 역사는 몇백년에 이르고 세계 최초의 노동자 정부인 파리코뮌의 경험을 가진 나라인 만큼, 우리와 비할 바가 아님을 알면서도 그 안타까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덕분에 파리에 머무는 2박3일 동안 지하철 요금은 한푼도 들지 않았지만 그런 금전적 이득에 비할 수 없는 더 큰 것을 배웠던 것 같다. 국민의 정부 들어 구속된 노동자 수는 문민정부 시절보다 훨씬 많다고 한다. 사회가 발전한다는 것은 주가가 오르고 백화점 매출이 늘어나고 수출이 잘되어서 경제적으로 넉넉해지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더 많은 자유가 보장되고 사회적 정의가 올바로 서는 질적인 향상이라 생각한다. 오늘 신문 1면 머릿기사를 보며 우리도 이제 노동자의 제 몫 찾기가 시민들의 이해와 지지 속에서 이루어지길 간절히 바라본다.

김일수/ 서울시 마포구 구수동

두번 받은 교통교육


일러스트레이션/ 김성희
지난해 9∼10월에 미국 인디애나주에서 품질관리에 대한 연수를 받았다. 거대한 건물 속에서의 딱딱한 일정이었지만 낯선 이국풍습에 놀라워하는 하루하루였다. 귀국을 일주일 앞둔 마지막 일요일. 유일한 연수생인 동료와 500여km나 떨어진 시카고로 당일치기 관광을 하기로 하고 아침 일찍 시동을 걸었다. 사전준비 없이 달랑 지도 한장만 들고 달리자니 불필요한 톨게이트도 여러 번 거치고 시내를 돌고 돌아 겨우 쌍둥이 빌딩과 자연사 박물관을 구경할 수 있었다. 귀로에는 차량도 많지 않고 교통순경도 보이지 않는데다 일직선 도로라 신나게 속력을 높였다. 속도계는 80마일을 넘고 있었고 출국 때 지참했던 테이프에서는 흥겨운 ‘뽕짝’이 흘러나왔다. 그 순간,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경찰의 사이렌이 요란하게 울리면서 우리 차를 추적해오고 있었다. 우린 길 가장자리에 얌전하게 차를 세우고 기다렸다. 이때 잘못 손을 움직인다면 총알세례를 받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텔레비전에서 여러 번 봐왔기 때문이다.

흑인경찰 2명이 다가와서 면허증을 요구했다. 그리고는 스피드 건을 보이면서 속도위반이란다. 우린 서툰 영어로, 어제 이 나라에 왔기 때문에 속도계 표시가 우리나라와 같은 km로 알았다며 선처를 부탁했다. 그러자 경찰들은 여러 가지를 얘기했는데, 대충 벌금 50달러를 내라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 당시 우리 실력으론 연수에 필요한 전문분야는 이해가 가능했으나 다른 분야는 절반도 어려운 수준이었다. 계속 km라는 말만 반복했더니 연수회사와 관련 부서를 적고 난 뒤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는 사라졌다. 우리는 “이렇게 얼버무려도 통하는 걸 보니 선진국도 별거 아니구나”라고 생각하며 다음날 출근했다. 10시쯤 되었을 때 담당부장이 우리를 찾았다. 어제의 시카고 관광에 대한 얘기를 꺼내며 “Black people”을 만났느냐고 물었다. 우리는 ‘시카고 관광 중에 흑인들 때문에 낭패한 일이 없었느냐’는 뜻으로 이해하고 “흑인을 만난 일은 없으나 구경은 잘하고 왔다”고 대답했다. 그는 씩 웃으면서 교통경찰이 보낸 팩스를 보여주었다. “귀사의 연수생들이 과속을 했으나 제한속도 10% 이상을 넘지 않았기 때문에 훈방처리했다. 그러나 이해가 부족한 것 같으니 다시 한번 교육을 부탁한다”는 내용이었다. 과속에 대해 두번의 교육을 받아야 했지만 담당부장이 “내가 당신 나라 언어를 잘 모르듯이 당신들이 영어를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며 우리를 배려해줘서 고마웠다. 얼렁뚱땅이 통하지 않는 그들의 철저한 교통법규 준수에 수긍이 갔다. 또한 해외여행을 할 때는 출국 전에 철저한 관광계획과 그에 따른 충분한 자료수집이 필수임을 깨닫는 계기가 됐다.

이선기/서울시 구로구 오류1동







.




↑Back to the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