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사섹션 : 특집 | 등록 2002.02.27(수) 제398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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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그래도 개혁은 지속된다 노무현이 꿈꾸는 골고루 잘사는 나라… 유럽식 경제 모델 지향, 낭만적 발상이라는 지적도
노무현 민주당 상임고문에 대한 우리 사회의 평가는 크게 엇갈린다. 뚜렷한 소신과 개혁성, 동서통합을 위한 노력을 칭송하는 ‘팬’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보수정당의 현실 정치인일 뿐이라는 평가와 과격한 좌파 정치인의 대표자라는 ‘의심’도 공존한다. 그의 비전은 과연 무엇인가. 대통령이 된다면 우리 사회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려는 것일까. 노 고문은 각종 강연회나 대담, 기자들과의 공·사적인 만남에서 ‘성장’보다 ‘분배’를 강조해왔다. 핵심 정책 기조도 “골고루 잘사는 사회”에 맞춰져 있다.
◆경제·복지·노동 사회적 연대를 경쟁력의 원천으로
그는 우리 사회가 지향할 경제 모델을 미국식이 아닌 유럽식이라 믿는다. 그 가운데 사회적 연대와 통합, 약자에 대한 배려를 아주 중시하는 독일식, 이른바 ‘라인형 자본주의’를 선호한다. 그는 “유럽 노동자나 서민의 삶이 미국보다 훨씬 안정됐고, 유럽문화가 미국문화보다 우수하다”면서 “세계질서에서 강요되는 것은 어쩔 수 없더라도,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한에서 유럽식을 따르는 게 옳다”고 거침없이 말한다. 효율성 극대화를 통한 경쟁력 강화라는 미국식 모델을 선호하는 다른 대선주자들과 차별성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현실을 무시한 낭만적 발상이라는 비판도 따라붙는다. 노 고문은 “서로 의지하고 공동체를 이뤄간다는 정신적 기반과 효율성을 살리는 사회적 연대가 경쟁력의 진정한 원천”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이런 확신은 DJ정부에 커다란 정치적 부담을 안겨준 생산적 복지, 기초생활보장제, 의약분업 정책 등을 지속하겠다는 의지로 구체화된다. 정치권과 재계 일각에서 꾸준히 제기되는 ‘복지예산 축소론’에도 ‘확대론’으로 맞선다. 장기적인 경쟁력 강화 차원에서 교육, 문화, 사회적 통합과 안정을 위한 복지에 투자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기초생활보장 확대는 “상당한 재정적 부담이 늘더라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최근 공·사석에서 “복지문제는 기술과 정책의 문제가 아니라 철학의 문제이며, 국가경쟁력 강화를 위해서도 복지투자는 필수”라는 논리를 전파하고 있다. “안전하고 쾌적한 사회, 국민통합이라는 사회적 합의수준이 높은 사회를 지향한다면 비용문제만으로 따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재계가 요구하는 재벌의 출자총액제한 철폐와 금융기관의 소유제한 완화론에 대한 반대 의지도 분명하다. 특히 금융기관의 경우 “돈을 빌려갈 쪽이 빌려주는 기관을 장악해서는 안 된다”며 “전문경영인제도를 활용해 독자성과 자율성을 보장한다면, 정부가 소유하는 게 나을 수 있다”고까지 주장한다. 재벌총수의 경영세습에 대한 규제는 찬성한다. 노 고문은 노동계에 대한 친밀감을 자산으로 노사관계 혁신을 구상중이다. 스웨덴의 ‘짤쯔요바단 협정’을 벤치마킹한 ‘신노사관계 구축을 통한 노사평화 실현’이 그 핵심. 측근 참모는 “스웨덴은 노동자가 먼저 정리해고량을 정하되 정부와 사용자가 재취업, 의료비, 실업수당 등을 부담하는 것을 전제로 노사가 몇년간 파업을 안는다고 협정을 맺는다”며 “토론과 설득, 합의를 거친다면 가능하다”고 말했다.
◆정치 책임총리제에 인사시스템 투명화
노 고문은 요즘 “정치가 개혁되지 않고는 다른 어느 분야도 개혁될 수 없다”는 말을 자주 입에 올린다. 정치개혁이 사회 정상화의 핵심이라는 설명이다. 크게 두축으로 실현이 가능하다고 본다. 먼저 ‘제왕적 리더십’ 극복과 ‘권한위임형 리더십’ 구축. 그 핵심은 ‘책임총리제’ 도입이다. 지난 2월3일 제주 추대위 발대식에서 그는 “대통령이 되면 국가전략과 국정개혁, 국민통합 과제에 집중하고 총리가 내각관리를 책임지는 이른바 ‘책임총리제’를 시행하겠다”고 약속했다. 사석에서도 이런 속내를 자주 내비쳤다. “대통령이 되면 법무부, 재정경제부, 행정개혁위원회 3개 부서만 틀어쥐고 국가 전체를 개혁하는 데 전념하겠다. 나머지는 모두 총리에게 주겠다”는 게 주요 줄거리다. 다른 한축은 ‘도덕성과 정통성 확립’을 통한 ‘원칙과 소신없는 정치문화 청산’. 이인제 고문은 “세계가 지식문명의 소용돌이에 휩쓸리고 사회 패러다임 자체가 급변하는 상황에서 민주화 세력과 산업화 세력이 충돌하던 시절의 기준인 정통성과 도덕성의 잣대로 정치를 평가하는 것은 시대착오”라고 말해왔다. 노 고문은 그러나 “원칙과 소신은 없고 정치적 이익만 있는 정치문화가 개선되지 않는 한 정치는 바로 설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의 이런 구상에 “운동권 방식의 이분법”이라는 비판도 제기된다. 하지만 노 고문은 “관료들도 가능하면 균형잡힌 사람 중 가치지향이 분명한 사람을 기용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힌다. 국민의 정부에서 지식과 경험 때문에 구시대 사람, 가치지향이 분명치 않은 관료를 기용한 것이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는 평가에 따른 것이다. 대통령의 몇몇 측근 입김이 크게 작용하는 폐쇄적 인사시스템을 투명화하고 장관의 권한과 임기는 확실히 보장하겠다는 생각도 비교적 뚜렷하다. 국회와 정당정치 정상화를 위해 대통령 후보와 여당대표 겸임 금지 법제화, 감사원 감사내용 국회보고 의무화도 공언한다.
◆통일·외교·사회 햇볕정책 잇고 교육개혁 실현
노 고문은 햇볕정책 계승의지가 분명하다. 당장 ‘뜨거운 감자’인 금강산 관광에 대해 “남북관계 유지발전의 핵심요소인 만큼 국가가 나서서라도 지속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구체적인 통일방안은 고민중이다. 노 고문은 그동안 “상호신뢰, 남북연합 단계에서 국가연합 단계로 점진적으로 발전시킨다는 총론에는 이견이 없다”고 말해왔다. 하지만 “통일방안에 대한 이론적 접근이 색깔공세를 일삼는 사람들에게 빌미만 제공한 측면이 강하다”며 “장차 통일을 어떻게 할 것인지는 신뢰, 평화정착 이후 점진적으로 논의하는 게 옳다”는 태도를 보인다. 군비축소는 신중하다. 평소 “미국·일본·중국은 잠재적 적대관계고, 남북관계와 동북아 정세는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며 “(남북) 긴장완화가 바로 군비축소로 이어진다는 단순논리에는 동의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주한미군 문제도 그 연장선에 있다. “통일 뒤에도 지금 같은 안보적 대치구도가 유지된다면 주한미군은 계속 주둔시켜야 한다”는 것. 물론 “한국이 중심에서 한반도 상황을 주도해야 한다”는 큰 전제가 깔려 있다. 그는 적극적인 국가보안법 폐지론자다. “국가보안법은 좌우의 문제가 아닌 인권의 문제이며, 민주주의 사상과 인권에 대한 믿음이 투철하다면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게 지론이다. 부패방지 척결을 위해 논란중인 부패방지위원회 권한강화 및 공익제보자 포상, 부정축재재산 가중처벌법까지 제정하겠다고 약속했다. 또 검찰권의 확실한 독립이 성취되고 국민의 신뢰가 회복될 때까지 한시적으로 특검제를 상설화하겠다는 태도를 보인다. 기부금입학제 등 교육현안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허용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국민정서가 용납하지 않으므로 교육종사자 중심으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야 한다”고 말한다. 다만 “철밥통을 보장하는 교육공무원 제도는 반드시 시정하겠다”고 강조한다.
◆언론개혁 핵심 빠진 정간법 개정안 불만
노 고문은 대선주자들이 언급을 꺼리는 언론개혁 문제에도 거침없이 발언한다. 지난해 2월 언론사 세무조사 이후 줄곧 ‘언론개혁’을 부르짖었다. 사적인 자리에서 “언론은 최후의 독재권력이고, 일부 언론의 편향 왜곡 보도는 민주주의와 개혁을 거부하고 특권을 누리려는 수구세력의 본심”이라며 “언론과의 전쟁도 불사해야 한다”고 말해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는 요즘도 “대통령이 나서는 게 아니고, 국회에서 입법할 문제”라는 단서를 달았지만 강도높은 언론개혁 추진 의지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지난 2월8일 김근태·이부영 의원 등 개혁성향 여야의원 27명이 제출한 ‘정기간행물 등록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에도 불만을 표시한다. 없는 것보다는 좋지만 뜨뜻미지근한 내용을 담았을 뿐이라는 판단 때문. 시민단체가 줄기차게 요구해온 특정인의 언론사 소유지분 제한, 노사동수의 편집위원 구성, 신문사 경영자료 공개 의무화 등 핵심이 빠져 있다는 것이다. 정간법 개정안이 발행부수, 구독료, 광고료, 재무제표 등을 문화관광부에 신고하도록 규정한 것도 시대착오적이라고 비판한다. “국민과 사원들에게 투명하면 되지 신문사가 정부에 보고할 의무는 없다”는 것이다.
노 고문은 사회적 이해관계가 첨예한 정책에 대한 선택과 해답이 비교적 분명하다. 문제는 어떻게 현실화할 수 있느냐는 것. 그는 평소 대통령과 고위 관료집단의 정치력, 몸을 던지는 적극적인 자세를 강조해왔다. 의약분업 등 쟁점 현안도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대화·타협하고 토론하며 저항과 이해관계를 관리하면 풀 수 있다”고 주장했다. ‘화합과 균형위원회’라는 묘안도 구상중이다. 각 시·도의회에서 5명 정도씩 개혁적이고 신망있는 인사를 선출한 뒤 대통령이 의장을 맡는 자문기구를 구성, 사회적 논란거리를 논쟁에 붙여 합의되는 대로 실천하겠다는 것이다.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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