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집 ] 2002년02월06일 제396호 

등돌린 부부여, 서로 통하라!

깊어가는 부부갈등에 멀어지는 건강가족… 위기 극복하는 행복의 묘약은 '의사소통'


(일러스트레이션/장광석)


결혼 9년차 박아무개(36)씨. 그는 얼마 전 아주 ‘낯선 아내’를 발견한다. 결혼생활이라면 할 만큼 했고, 아내에 대해서도 알 만큼 안다고 자부해온 그에게는 기이한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그날도 퇴근시간은 여느 때처럼 새벽 3시. 박씨는 술기운을 지긋이 누르며 아파트 현관문을 콩콩콩 두드렸다. 술기운을 지그시 누른 건 아내와의 끊어질 듯 팽팽한 신경전을 대비함이요, 현관문을 ‘쾅쾅쾅’ 대신 ‘콩콩콩’ 두드린 것도 예정된 신경전을 겨냥한 극도의 자기절제에 다름아니었다. 그러나 사뭇 비장하기까지 한 그의 이런 몸가짐은 전혀 새삼스러울 게 없었다. 이미 결혼 초부터 줄곧 이어져온 것이어서, 의식적인 행동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조건반사에 가까웠다. 밖에서의 탁월한 부침성도 집에만 오면 오간 데 없었다.

“오늘은 당신이 딴 방 가서 자”


사진/ 결혼생활은 저절로 이뤄지는 게 아니라 가꿔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실을 이해하는 부부는 별로 없다. (씨네21 이혜정)


박씨는 속으로 수를 셌다. ‘하나 둘 셋.’ 한치 오차없이 ‘딸깍’ 자물쇠 따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손잡이를 잡아돌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눈길 한번 안 주고 안방으로 들어가는 아내의 뒷모습과 다시 베개를 든 채 눈길 한번 안 주고 딸아이 방으로 들어가버리는 아내의 싸늘하게 굳은 얼굴을 찰나처럼 볼 수 있을 터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현관문이 왈칵 열리면서 아내의 악다구니가 터져나오는 것이었다. “지금 몇시야. 그 잘난 휴대폰은 폼으로 들고 다니냐. 오늘은 당신이 딴 방 가서 자.”

적에게 칼을 겨누다 바지가 흘러내린 사무라이 꼴이 되어버린 박씨는, 그 꼿꼿하던 자세를 어떻게든 수습해야 했다. 일단 아내의 팔을 잡아끌고 들어갔다. 아내는 거실 한가운데 광화문의 이순신 장군 동상처럼 우뚝 버티어 섰다. “한번만 살려주라. 다시는 안 그럴게. 다음부터는 늦으면 전화라도 꼭 할게.” 박씨는 털썩 바닥에 주저앉아 장군의 다리, 아니 아내의 다리를 붙들고 콧소리까지 섞어가며 싹싹 빌었다. 다음날 아침 눈을 뜬 박씨 곁에는 잠자리 날개만큼 투명한 옷을 입은 아내가 누워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선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박씨는 결혼 9년 만에 처음 겪은 상황을 곰곰이 되짚었다. 남편의 늦은 귀가에 차가운 외면으로 일관하던 아내의 갑작스런 변화도 그러려니와, 아내 앞에 ‘자발적으로’ 무릎꿇은 자신의 행동도 놀라운 일이었다. 언제나 아내보다 더 차갑게 침묵 속으로 빠져들던 박씨가 아니었던가. 박씨는 아내가 악다구니를 쓰자 자신도 모르게 ‘감읍’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아내에게 애교를 부리며 느낀 묘한 쾌감은 다름아닌 ‘카타르시스’였다고 결론내렸다. ‘소통’에서 오는 카타르시스.

“아내의 공격은 형식상 따뜻한 언어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남편이 감동한 건 형식과 내용을 달리 해석했다는 걸 의미한다. 외면은 아예 상대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라면 거칠게라도 얘기를 건넸다는 건 상대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뜻이다.” 한국가족상담교육연구소 유계숙 선임연구원(가족학 박사)은 “박씨 부부는 그동안 제대로 소통하지 못했지만 그나마 상대방 언어의 속뜻을 읽어낼 수 있을 만큼 최소한의 건강성은 유지하고 있었다”며 “거친 소통이 단절보다는 훨씬 낫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라고 설명했다.

당신 부부는 건강한 부부인가? “먹고살기도 바쁜데 웬 홍두깨 같은 질문이냐”라고 되묻는다면, 그건 모범답안과는 한참 거리가 먼 대답이다. 그러나 적어도 동문서답은 아니다. 병에 대한 정확한 진단명은 아니지만 병인을 정확히 진단할 수 있는 증상이라고나 할까. 눈에 황달이 생기면 눈병이 아니라 간질환을 의심하듯이, ‘건강부부’인지 생각해보지 않은 건 바빠서가 아니라 처음부터 건강부부가 아니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마누라 집안일 잘하고 아이들 공부 잘하고.” 그렇다고 결론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부부 건강성을 나타내는 가장 간명한 지표는 이혼율이다. 지난 1998년 한햇동안 우리나라에서는 세쌍이 결혼할 때마다 한쌍이 이혼(33%)했고, 2000년에는 인구 1천명당 이혼한 부부비율(조이혼율)이 2.5건으로 아시아 1위였다. 그러나 가족문제 전문가들은 이 수치가 우리나라 부부의 건강성 수준을 온전히 보여주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채규만 성신여대 심리학과 교수(한국심리학회장)는 “이혼을 여전히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우리 현실을 감안하면 법적 이혼율이 보여주는 건 문제의 극히 일부분일 뿐”이라고 평가했다.

건강부부의 현주소를 더욱 초라하게 하는 건 부부들의 자신에 대한 낮은 관심도다. 유영주 경희대 생활과학부 교수(한국가족상담교육연구소 소장)는 “학문적으로 가족은 ‘부부와 그들의 자녀’로 규정된다”며 “당연히 부부가 가족관계의 중심이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부부들은 자녀에게는 온갖 애정을 쏟으면서도 배우자에게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강학중 가정경영연구소 소장은 “결혼생활을 ‘가꿔가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그냥 방치해버리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양은냄비 열정에 부부 건강성 바닥

왜 우리나라 부부들은 결혼하고 나면 양은냄비처럼 서둘러 열정이 식어버리는 걸까. 표현을 안 해서 그렇지 우리 사랑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다고? 그렇다면 연애 시절 서로 귓볼을 간지르며 쉴새없이 나누던 밀어는 모두 어디로 사라지고, 왜 “아(애)는?… 묵(먹)자… 자자”만으로 모든 의사소통을 해결하는 터무니없는 ‘과묵함’에 빠지는 걸까. 부부는 ‘이심전심’, ‘일심동체’, ‘부창부수’이기 때문이라고? 그러나 전문가들의 얘기는 전혀 ‘아니올시다’이다. 이만저만 착각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 부모들도 그렇게 살아왔다. 보고 배워 몸에 밴 ‘학습모델’이 그런 식이니 쉽게 바뀌지 않는 것이다.” 강학중 가정경영연구소 소장은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남편의 역할이 심각하게 부족한 형편”이라며 “생활비만 벌어다주면 남편 구실 다 한다고 생각하던 꿈같은 시절은 지나간 지 오래인데도 여전히 그 시절로 착각하고 사는 남편들이 많다”고 꼬집었다. ‘애정 급속냉각’과 ‘지나친 과묵함’의 역사적 배경에는 뿌리깊은 가부장제가 자리잡고 있고, 원인을 제공하는 장본인은 다름아닌 남성인 셈이다.

한 가족문제 전문가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는 한국계 여성들의 결혼기피상대 1위가 다름아닌 한국계 남성이라고 귀띔한다. 그에 따르면, 이 지역 한국계 여성의 90%가 한국계 남성이 아닌 다른 나라 남성과의 결혼을 원하며, 한국계 남성은 중국계나 필리핀계 남성보다 선호도가 낮다. 그는 “한국계 남성은 아주 권위적이고 애정표현도 못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며 “한국계 남성이 같은 유교권인 중국계 남성보다 훨씬 가부장적인 걸 보면 유교주의의 영향 탓으로만 돌릴 문제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가부장제나 남성에게만 책임을 돌릴 수도 없다. 여성에게도 일단의 책임이 있다. 우리나라 여성들은 자신의 욕구를 분명하게 얘기하지 못 하고, 남자들이 알아서 다 해주기를 바라는 경향이 강하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결혼생활에 대한 집단적 무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더 큰 문제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한국가족상담교육연구소 유계숙 선임연구원은 “지구상에서 가장 복잡하고 까다로운 게 부부관계이고, 아무리 노력을 기울여도 부족한 게 결혼생활”이라며 “그런데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누구나 결혼이라는 걸 하고, 사는 것도 다 그렇고 그런 것’이라고 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채규만 성신여대 교수의 평가는 좀더 부정적이다. “아무도 결혼할 준비가 안 되어 있는 상태에서 결혼을 한다.” 채 교수에 따르면, 미국의 부모들은 결혼을 앞둔 자녀에게 결혼준비교육 수강증을 끊어주는 경우가 많다. 결혼하면서 겪게 될 부부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미리 익히게 하는 것이다. 일부 주에서는 결혼준비교육 이수증을 제출하는 신혼부부에게는 세금감면 등의 혜택을 주기도 한다. 채 교수는 “90년대부터 미국의 이혼율이 눈에 띄게 낮아지고 있는 것은 이처럼 건강한 부부관계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크게 늘었기 때문”이라며 “우리도 비슷한 제도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건강부부가 건강가족의 필수조건이라는 사실은 자녀교육에만 열을 올리는 우리나라 부모들의 행태에 비춰보면 역설적인 시사점을 던진다. “임상심리학에서 보면 여성들이 결혼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친밀감이다. 그런데 남편한테서 친밀감을 못 얻으니 자녀들에게 지나치게 내리사랑을 쏟아붓는다.” 채규만 성신여대 교수는 “특히 아들은 부족한 남편의 역할을 대신하는 대상”이라며 “그런 아들이 결혼하면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 삼각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고부갈등은 결코 여자끼리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준비없는 결혼에 자녀들도 고통 겪어



사진/ 한국어린이육영회 치료교육연구소에서 치료를 받은 한 사내아이의 가족화. 언뜻 이 그림은 엄마는 설거지, 할머니 ·할아버지는 식사, 아빠는 TV보기, 나는 블록놀이, 동생은 물 엎지르기를 하는 평범한 가족생활의 단면인 것 같다. 그러나 또래와 어울려 놀지 못하는 폐쇄적 정서장애를 보인이 아이는 가족그림을 그릴 때마다 엄마는 뒷모습, 아빠는 옆모습으로 표현했고 엄마와 아빠 사이를 최대한 멀리 있는 것으로 그렸다. 부모의 부부갈등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건강하지 못한 부부 밑에서 건강한 자녀가 나올 리 없다. 가장이 알코올 중독에 걸린 가족은 대개 부부간 소통이 원활하지 못하고, 어머니와 자녀가 아버지를 배제한 채 폐쇄적인 소통구조를 갖는 경우가 많다. 한국어린이육영회 박랑규 치료교육연구소장은 “정서장애나 행동장애를 보이는 아이를 데리고 치료상담을 오는 부모를 보면 부부갈등이 심한 경우가 많다”고 밝혔다. 박 소장은 “그런 부모에겐 ‘아이를 위해서라도 부부관계부터 먼저 점검해보라’고 권한다”며 “부부갈등이 치료되지 않으면 아이도 치료되기 어렵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건강부부란 도대체 어떤 부부일까. 전문가들은 ‘대화’와 ‘소통’을 가장 중요한 요소로 꼽는다. 유영주 경희대 교수는 “부부들을 대상으로 건강가족의 공통된 특징을 조사해본 결과 ‘대화가 있는 가족’이 첫 번째로 꼽혔다”고 밝혔다. 그러나 부부소통이 말처럼 쉽게 이뤄지지는 않는다. 결혼 9년차 박아무개씨가 집에만 오면 입이 얼어붙는 것에서 보듯, 부부소통은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경우가 많다. 유 교수는 “사적이면서도 가장 전문적인 인간관계를 요구하는 게 부부관계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결혼을 하면서 부부들은 누구나 행복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부부의 사랑 그 자체가 행복한 부부관계를 유지하게 하는 충분한 조건은 되지 못한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성장한 남녀는 사랑하는 방식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의 생각과 행동에서도 차이가 난다. 실제로 결혼만족도가 높은 부부와 낮은 부부를 비교해보면 갈등의 존재여부에서는 유의미한 차이가 나타나지 않고 갈등 대처방법에서 유의미한 차이가 나타난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부부소통에서 대화기술이 중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연애 시절 그처럼 잘 통하던 연인이 결혼만 하면 단절 속으로 빠져드는 게 대화기술이 갑자기 사라진 결과는 아니다. 그렇다면 눈에서 콩깍지가 벗겨졌기 때문일까. 가장 한국가족상담교육연구소 유계숙 선임연구원은 “결혼 전에는 결혼이라는 공동의 목표가 있기 때문에 소통이 원활하고 다투다가도 쉽게 화해하는 것”이라며 “그러나 결혼과 동시에 공동목표가 사라지면서 소통단절로 이어진다”고 말했다. 부부가 공유할 수 있는 목표와 관심사, 가치관 등을 만드는 게 더 본질적인 해법이라는 얘기다.

행복한 가정을 꿈꾸는 당신이라면…

전문가들은 대화의 기술이 아니라 대화의 태도가 더욱 핵심적인 요소라고 지적한다. “대화와 소통은 상대방 입장으로 사고하고 상대방 감정과 사고를 수용하는 게 전제돼야 한다. 대화는 상대방을 설복시키는 게 아니라 자신을 잘 표현하고 상대방 얘기를 잘 들어주는 것이다.”(채규만 성신여대 교수) “대화의 가장 기본은 잘 듣는 것이다. 상대방을 평가하려 하지 말고 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먼저 얘기해야 한다. 승패를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유영주 경희대 교수)

당신은 행복한 가정을 바라는가. 그렇다면 부부끼리 먼저 소통할 일이다. 결혼 9년차 박아무개씨처럼, 더 늦기 전에 지금부터라도.

안영춘 기자 jo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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