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집 ] 2002년02월06일 제396호 

끝없는 갈등을 ‘윈윈게임’으로

에스비에스 <터닝 포인드…>에 드러난 우리 사회 부부관계의 현주소

경기도 의왕시에 사는 주부 윤아무개(32)씨는 지난 1월12일 텔레비전을 보다가 혼자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었다. 그가 본 프로그램은 SBS의 <터닝 포인드, 사랑과 이별>(매주 토요일 11시40분). 이날 방송분의 주제는 ‘남편은 채팅중’이었다.

전쟁같은 나날, 남 얘기 같지 않아


사진/ <터닝 포인트, 사랑과 이별>은 결국 자신을 드러내 잘 싸우는 방법을 일깨우는 부부갈등 치유 프로그램이다. 최근에는 당사자뿐 아니라 자녀들의 신청도 줄을 잇는다.


TV 속 부부의 사연은 이렇다. 남편 신아무개씨는 엘리베이터 관리회사에 근무하고 있고 에어로빅 강사를 하다 남편을 만난 아내 손아무개씨는 집에서 아이 둘을 기르고 있다. 여섯살 차이가 나는 이들 부부는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했다. 너무 어릴 때 결혼한 탓인지 서로를 이해하는 데 심각한 어려움을 겪던 부부는 1년여 동안 성생활도 하지 않고 만나면 으르렁대는 지경이 돼버렸다. 직접적인 계기는 남편의 채팅. 남편은 채팅에만 빠져 지냈고 아내는 그런 남편을 사정없이 몰아세운다. 남편은 급기야 일주일에 5일 이상 새벽귀가를 하기 시작했고 아내의 확인 결과 이메일에는 사랑편지가, 휴대폰에는 사랑메시지가 빼곡이 차 있었다. 과단성이 약한 남편은 매번 안 하겠다고 하면서도 계속 채팅에서 알게 된 여자를 만나고, 고집이 센 아내는 작심 3일인 남편의 얼굴만 보면 속이 터져 화풀이를 한다. 부부는 제작진의 안내로 정신과 상담을 한 뒤 저마다의 문제를 어렴풋이 느끼고, 단둘이 겨울바다로 여행을 떠난 날 서로에게 쓴 편지를 읽으며 화해를 한다. 일주일 뒤. 화면에서는 이른 귀가 약속을 지키고 있는 남편과 더이상 버럭버럭 화를 내지 않는 아내가 티격태격하면서도 만두를 빚어 먹고 있었다.

평소에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어휴, 교양없어. 저러니까 다투지”라는 언짢음과 “저렇게라도 화해하니 다행이다”라는 안도감이 뒤죽박죽되곤 했던 윤씨는 이날 방송을 보며 문득 부러움을 넘어 서러움을 느꼈다. 자신은 단 한번도 남편과 목청을 높이고 싸운 적이 없다는 사실이 새삼 떠오른 것이다.

윤씨는 대학 시절 만난 남편과 애기 돌 지날 무렵부터 틈이 벌어졌다. 윤씨가 보기에 특별한 계기는 없었다. 자신은 애기를 낳은 뒤 많이 우울해졌고 그 우울을 치유하는 데 남편이 도와주길 바란 것밖에 없다. 그러나 남편은 거꾸로 밖으로만 돌면서 피곤하다, 인생에 의미가 없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윤씨는 그런 남편이 너무 괘씸해 잠자리도 피했고 눈도 잘 마주치지 않았다. 그의 생각은 이랬다. “나는 사회생활 다 접고 애 키우고 있는데 대체 자기가 무슨 자격으로 우울하다는 거야.” 그러나 이들 부부는 명절이나 집안 대소사에 빠짐없이 애를 앞세우고 참석하는 등 겉보기엔 아무런 문제가 없도록 처신을 했다. 그러나 침묵과 냉소로 곪아가는 날들이 벌써 3년째이다.

윤씨는 남편이 차라리 바람을 피우거나 도박을 하거나 아니면 자신을 때리기라도 했으면 좋겠다고 여긴다. 윤씨 부부는 “그래 그래, 항상 너는 너만 힘들지. 관두자”라는 비아냥으로 시작도 하기 전에 언쟁을 끝낸다. 윤씨는 부부관계의 절박한 ‘터닝 포인트’를 찾고 있다. 방송 출연을 생각해보지만 남편에게 이 말을 꺼내기가 자존심 상한다. 설사 남편이 동의해 출연한다고 해도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

윤씨와 같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의 부부들은 하루에도 수십명씩 <터닝 포인트…> 제작진의 문을 두드린다. 지난해 2월 처음 기획할 당시 자신의 문제를 꺼내놓을 부부를 찾지 못해 애태웠으나, 5월 첫 방송을 탄 지 불과 8개월여 만에 프로그램 신청자는 700명을 훌쩍 넘어섰다. 오는 2월16일 방송까지 모두 36쌍의 부부가 이 프로그램을 거쳐갔다. 방송이 나간 뒤에는 새벽 2∼3시까지 전화통에 불이 나고 인터넷을 통한 접수들도 폭주한다. “남 얘기 같지 않다”는 공감과 “내 얘기 좀 들어달라”는 하소연이 반반이다.

카메라 앞에서 육박전도 불사하는 부부


사진/ <터닝 포인트, 사랑과 이별> 제작진은 연출없이 부부의 동선을 따른다. 소통의 기미가 보이는 부부에게는 서로의 역할을 바꿔보는 심리극(사진)이나 정신상담, 여행등을 권해보기도 한다.


<터닝 포인트…> 제작을 맡고 있는 독립프로덕션 리얼리티비전의 최은영 본부장(작가)은 “남편이 지나치게 폭력적인 경우를 빼고는 10에 7∼8쌍은 프로그램이 끝나면 대체로 화해를 하게 된다”고 귀띔한다. 화해를 하지 않은 부부일지라도 1∼2주일 뒤 다시 연락을 해보면 “그냥 그렇죠”라고는 하나 말투가 한결 밝아진 것을 느끼게 된다고 한다. 이 프로그램은 재연장면을 빼고 아무런 연출없이 찍는다. 대체로 집안 곳곳에 4∼7대의 관찰카메라를 설치해 일주일에서 열흘 가까이 밀착 촬영을 한다. 출연부부들은 이를 알고도 천연덕스럽게 싸우고 때론 육박전도 불사한다. 일단 싸우기 시작하면 카메라고 뭐고 신경쓰지 않게 되는 탓도 있지만, 그만큼 창피함을 무릅쓰고라도 부부관계를 풀어보고 싶은 절박감이 크기 때문이다. 최 작가는 “자신의 문제를 그대로 꺼내보일 수 있는 사람이라면 갈등을 해결하는 데 절반은 성공한 것이라는 상식에 따른 기획이 맞아떨어졌다”고 말한다. 일단 문제를 드러내고도 소통이 잘 안 되는 부부들에게 제작진은 심리테스트, 정신상담, 심리극, 여행 등을 권유하고 그 동선을 좇는다.

그러나 제작이 쉽지만은 않다. 당장 2월16일 방송을 앞두고 막바지 촬영을 하던 고부갈등 케이스의 경우 아내가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지금은 남편과 시어머니만 찍고 있다. 상담과 1차 인터뷰를 모두 마치고 촬영에 들어가기로 한 날 어느 한쪽이 거절하거나 미루는 경우도 허다하다. 무엇보다 가장 제작이 어려운 경우는 앞서 윤씨와 같은 상황. 자존심, 엘리트 의식이 많은 부부는 가장 난코스이다. 변호사인 남편이 바람을 피워 우울증에 빠졌던 아내는 신청을 했다가 시간을 좀더 달라며 제풀에 포기한 일도 있고, 둘이 함께 상담을 청해왔던 교수 부부는 막판에 ‘사회적 체면’을 내세운 남편쪽이 고사를 하기도 했다. 제작진은 ‘대책없는 남편폭력’을 가장 불가능한 ‘불능’으로 꼽지만 그뒤를 잇는 것은 이처럼 ‘고학력 커플’이다. 그 다음의 ‘불능’은 ‘심각한 나이차’라고 한다. 이와 함께 일반의 생각과는 달리 갈등의 근본요소가 되지 않는 것은 ‘돈문제’이다. 경제적인 이유로 부부갈등이 증폭되는 경우는 신청사례 중에서는 찾기 힘들다고 한다.

최근 눈에 띄는 점은 부모의 갈등을 해결해달라는 자식들의 신청이 늘고 있다는 것. 중·고등학생부터 결혼한 자녀까지 연령을 막론한다. 카이스트에 재학중이던 한 아들의 눈물겨운 노력으로 거듭나게 된 중년부부도 있다. 가족 뒤치다꺼리하느라 평생 뼈빠지게 일하고도 남편으로부터 존중받지 못하는 어머니, 자기 속내를 아내에게도 털어놓지 못하고 여유와 관용이 말라버린 아버지를 보다 못한 아들이 상담을 청해왔고, 부모를 설득해 출연하기에 이른 것이다.

제작진은 대부분 부부상담 전문가가 돼 있다. 변명환 PD는 “프로그램 제작하며 깨달은 것이 많아 연애중인 나 역시 위기를 많이 넘겼다”며 “부부관계란 안정적으로 고정된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으니 이를 늘 염두에 두고 적극적으로 실천할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제작진은 <터닝 포인트…>를 두고 “우리 사회 부부관계의 임상보고서”라고 자평한다. 상담이나 신청사례를 보면 20대는 주로 아내의 사회적 욕망과 자아존중감에 대해 남편이 박자를 맞춰주지 못할 때 갈등이 증폭된다. 30대를 넘어가면 성격차와 성생활 갈등이, 40대 이상으로 가면 고부갈등, 외도, 알코올중독, 폭력 등 전형적인 문제가 대두된다. 그 밑바탕에 공통으로 깔려 있는 것은 소통 부재 혹은 체념이다. 때론 재혼한 커플에게도 초혼 때 겪은 갈등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최 작가는 “남편은 초혼, 아내는 재혼인 커플을 상담했는데, 자신 탓이든 상대 탓이든 전 관계에서의 상처를 치유하지 않고 덮어둔 채 또다른 관계를 맺으면 언젠가는 그 상처가 더 큰 고통으로 모습을 드러낸다”며 “그런 경우에는 어떤 치료약도 소용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문제를 드러내고 희망을 포기하지 말라

바야흐로 부부갈등마저 미디어를 통해서만이 치유받는 시대가 된 걸까? 이 질문은 <터닝 포인트…>의 꾸준한 인기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이기도 하다. 엄밀하게 말해 이 프로그램은 부부싸움 잘하는 법을 가르치는 프로그램이다. 싸움의 무기는 문제를 드러내는 것. 그리고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것.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모든 싸움은 이기게 돼 있지 않는가. 여느 전쟁과 달리 부부싸움은 최종 승자가 두 사람 모두라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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