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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갈등을 ‘윈윈게임’으로 에스비에스 <터닝 포인드…>에 드러난 우리 사회 부부관계의 현주소
경기도 의왕시에 사는 주부 윤아무개(32)씨는 지난 1월12일 텔레비전을 보다가 혼자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었다. 그가 본 프로그램은 SBS의 <터닝 포인드, 사랑과 이별>(매주 토요일 11시40분). 이날 방송분의 주제는 ‘남편은 채팅중’이었다.
전쟁같은 나날, 남 얘기 같지 않아
평소에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어휴, 교양없어. 저러니까 다투지”라는 언짢음과 “저렇게라도 화해하니 다행이다”라는 안도감이 뒤죽박죽되곤 했던 윤씨는 이날 방송을 보며 문득 부러움을 넘어 서러움을 느꼈다. 자신은 단 한번도 남편과 목청을 높이고 싸운 적이 없다는 사실이 새삼 떠오른 것이다. 윤씨는 대학 시절 만난 남편과 애기 돌 지날 무렵부터 틈이 벌어졌다. 윤씨가 보기에 특별한 계기는 없었다. 자신은 애기를 낳은 뒤 많이 우울해졌고 그 우울을 치유하는 데 남편이 도와주길 바란 것밖에 없다. 그러나 남편은 거꾸로 밖으로만 돌면서 피곤하다, 인생에 의미가 없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윤씨는 그런 남편이 너무 괘씸해 잠자리도 피했고 눈도 잘 마주치지 않았다. 그의 생각은 이랬다. “나는 사회생활 다 접고 애 키우고 있는데 대체 자기가 무슨 자격으로 우울하다는 거야.” 그러나 이들 부부는 명절이나 집안 대소사에 빠짐없이 애를 앞세우고 참석하는 등 겉보기엔 아무런 문제가 없도록 처신을 했다. 그러나 침묵과 냉소로 곪아가는 날들이 벌써 3년째이다. 윤씨는 남편이 차라리 바람을 피우거나 도박을 하거나 아니면 자신을 때리기라도 했으면 좋겠다고 여긴다. 윤씨 부부는 “그래 그래, 항상 너는 너만 힘들지. 관두자”라는 비아냥으로 시작도 하기 전에 언쟁을 끝낸다. 윤씨는 부부관계의 절박한 ‘터닝 포인트’를 찾고 있다. 방송 출연을 생각해보지만 남편에게 이 말을 꺼내기가 자존심 상한다. 설사 남편이 동의해 출연한다고 해도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 윤씨와 같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의 부부들은 하루에도 수십명씩 <터닝 포인트…> 제작진의 문을 두드린다. 지난해 2월 처음 기획할 당시 자신의 문제를 꺼내놓을 부부를 찾지 못해 애태웠으나, 5월 첫 방송을 탄 지 불과 8개월여 만에 프로그램 신청자는 700명을 훌쩍 넘어섰다. 오는 2월16일 방송까지 모두 36쌍의 부부가 이 프로그램을 거쳐갔다. 방송이 나간 뒤에는 새벽 2∼3시까지 전화통에 불이 나고 인터넷을 통한 접수들도 폭주한다. “남 얘기 같지 않다”는 공감과 “내 얘기 좀 들어달라”는 하소연이 반반이다.
카메라 앞에서 육박전도 불사하는 부부
그러나 제작이 쉽지만은 않다. 당장 2월16일 방송을 앞두고 막바지 촬영을 하던 고부갈등 케이스의 경우 아내가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지금은 남편과 시어머니만 찍고 있다. 상담과 1차 인터뷰를 모두 마치고 촬영에 들어가기로 한 날 어느 한쪽이 거절하거나 미루는 경우도 허다하다. 무엇보다 가장 제작이 어려운 경우는 앞서 윤씨와 같은 상황. 자존심, 엘리트 의식이 많은 부부는 가장 난코스이다. 변호사인 남편이 바람을 피워 우울증에 빠졌던 아내는 신청을 했다가 시간을 좀더 달라며 제풀에 포기한 일도 있고, 둘이 함께 상담을 청해왔던 교수 부부는 막판에 ‘사회적 체면’을 내세운 남편쪽이 고사를 하기도 했다. 제작진은 ‘대책없는 남편폭력’을 가장 불가능한 ‘불능’으로 꼽지만 그뒤를 잇는 것은 이처럼 ‘고학력 커플’이다. 그 다음의 ‘불능’은 ‘심각한 나이차’라고 한다. 이와 함께 일반의 생각과는 달리 갈등의 근본요소가 되지 않는 것은 ‘돈문제’이다. 경제적인 이유로 부부갈등이 증폭되는 경우는 신청사례 중에서는 찾기 힘들다고 한다. 최근 눈에 띄는 점은 부모의 갈등을 해결해달라는 자식들의 신청이 늘고 있다는 것. 중·고등학생부터 결혼한 자녀까지 연령을 막론한다. 카이스트에 재학중이던 한 아들의 눈물겨운 노력으로 거듭나게 된 중년부부도 있다. 가족 뒤치다꺼리하느라 평생 뼈빠지게 일하고도 남편으로부터 존중받지 못하는 어머니, 자기 속내를 아내에게도 털어놓지 못하고 여유와 관용이 말라버린 아버지를 보다 못한 아들이 상담을 청해왔고, 부모를 설득해 출연하기에 이른 것이다. 제작진은 대부분 부부상담 전문가가 돼 있다. 변명환 PD는 “프로그램 제작하며 깨달은 것이 많아 연애중인 나 역시 위기를 많이 넘겼다”며 “부부관계란 안정적으로 고정된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으니 이를 늘 염두에 두고 적극적으로 실천할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제작진은 <터닝 포인트…>를 두고 “우리 사회 부부관계의 임상보고서”라고 자평한다. 상담이나 신청사례를 보면 20대는 주로 아내의 사회적 욕망과 자아존중감에 대해 남편이 박자를 맞춰주지 못할 때 갈등이 증폭된다. 30대를 넘어가면 성격차와 성생활 갈등이, 40대 이상으로 가면 고부갈등, 외도, 알코올중독, 폭력 등 전형적인 문제가 대두된다. 그 밑바탕에 공통으로 깔려 있는 것은 소통 부재 혹은 체념이다. 때론 재혼한 커플에게도 초혼 때 겪은 갈등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최 작가는 “남편은 초혼, 아내는 재혼인 커플을 상담했는데, 자신 탓이든 상대 탓이든 전 관계에서의 상처를 치유하지 않고 덮어둔 채 또다른 관계를 맺으면 언젠가는 그 상처가 더 큰 고통으로 모습을 드러낸다”며 “그런 경우에는 어떤 치료약도 소용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문제를 드러내고 희망을 포기하지 말라
바야흐로 부부갈등마저 미디어를 통해서만이 치유받는 시대가 된 걸까? 이 질문은 <터닝 포인트…>의 꾸준한 인기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이기도 하다. 엄밀하게 말해 이 프로그램은 부부싸움 잘하는 법을 가르치는 프로그램이다. 싸움의 무기는 문제를 드러내는 것. 그리고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것.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모든 싸움은 이기게 돼 있지 않는가. 여느 전쟁과 달리 부부싸움은 최종 승자가 두 사람 모두라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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