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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사 진실을 생매장 말라! 공권력에 의한 타살 실체에 접근 막혀… 특별법 개정 통해 돌파구 찾아야 한다
“1999년 12월28일, 농성 421일 만에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에 관한 특별법안’과 ‘의문사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유가협은 또다른 투쟁의 자리로 돌아갔다.”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이하 유가협)의 국회 앞 천막 농성을 다룬 다큐멘터리 <민들레>의 엔딩 자막이다. 그리고 3년 뒤인 2001년 연말, 유가협이 돌아간 또다른 투쟁의 자리는 뜻밖에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실’이었다. 2001년 12월17일부터 25일까지 유가협 의문사지회 회원들이 “위원장 퇴진과 특별법 개정”을 요구하며 위원장실 점거 농성을 벌인 것이다. 이들은 ‘의문사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이하 의문사 특별법)에 근거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이하 규명위)를 만들어낸 주인공들. 제 손으로 탄생시킨 규명위를 점거하기까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2002년 1월19일 오후 3시, 명동의 향린교회로 다큐멘터리의 ‘늙은’ 주인공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이러다 다 자살, 사고사로 결론날 것 같아.” “차라리 가만히 두면 의문사로 남을 거 아이가. 이게 뭐꼬?” “정권교체되면 진상규명 될 거라고 믿었는데….” “애타 죽겠어. 애타….”
유가협, 진상규명위 위원장 퇴진 요구
규명위는 2000년 10월17일 출범했다. 과거청산을 위한 최초의 국가기구였다. 오랫동안 과거청산 노력을 기울여온 사회운동단체의 활동가들이 참여한 규명위의 ‘실험’은 숱한 우여곡절을 겪어왔다. 규명위의 활동을 돌이켜보면, 역사의 ‘의문’을 오늘에 ‘규명’하는 어려움과 한계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첫 번째 걸림돌은 ‘의문사 특별법’ 그 자체였다. 현행 특별법에 따르면, 은폐 의혹을 받는 국가기관이 조사요구나 자료제출을 거부해도 규명위가 행사할 수 있는 강제 권한은 전혀 없다. 국정원에 자료를 요청했다는 한 조사관은 “조사대상이 되는 직원의 연락처조차 알려주지 않는다”고 분개했다. 국정원뿐 아니라 다른 국가기관에서도 “특정해서 자료 요청을 하라”는 회신을 보내기 일쑤다. 그러나 조사관들은 각 기관이 보관한 자료 목록조차 확보할 수 없는 형편이다. 조사권의 한계 탓이다. 참고인들이 허위진술을 해도 제재할 방법이 전무하다. 조사관들은 “참고인들이 스스로 증언을 뒤집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전한다. 1차 조사를 받은 참고인들이 서로 입을 맞춘 뒤, 2차 조사에서는 말을 바꾼다는 것이다. 게다가 “오래된 일이라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모르쇠로 나오면 속수무책이다. 양심고백을 끌어낼 장치가 전무한 탓이다. 조사관들은 “양심고백을 하면 사면을 하고, 허위진술이 밝혀질 경우 공소시효 없는 처벌을 하는 권한을 위원회에 부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행법으로는 출석을 거부해도, 위증을 해도 처벌할 길이 없다. 기껏해야 출석거부에 대해 ‘과태료’를 부과하는 것이 고작이다. 그나마 과태료 규정마저 징수의 주체와 절차규정이 없어 유명무실하다. 허약한 조사권한으로는 국정원, 기무사, 검찰 등 국가기관의 ‘비협조’ 앞에 속수무책이다. 한총련 투쟁국장으로 의문사한 김준배씨 사건의 담당검사가 소환에 불응한 경우와 ‘강제징집 및 녹화사업’을 조사하러 간 조사관이 기무사에서 문전박대당한 사건은 대표적인 비협조 사례였다. 민간조사관들은 “국정원, 검찰, 기무사, 경찰순으로 권력이 막강한 기관일수록 문을 열기가 어렵다”고 토로한다. 반관반민(半官半民)의 인적 구성도 갈등을 낳았다. 조사 실무를 담당하는 전문위원 50여명은 민간 출신 20여명과 파견 공무원 30여명으로 나뉜다. 검찰과 경찰, 국정원과 기무사 등에서 파견나온 공무원들은 규명위 활동이 끝나면 원기관으로 복귀해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 조사대상이 되는 기관은 이들이 파견나온 곳이다. 복직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 이들의 조건상 의문사 규명에 적극적으로 임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한 민간 출신 조사관은 파견 공무원들의 처지를 “자기 집 토끼를 잡아야 하는 꼴”이라고 표현한다. 어쩌면 위원회의 이런 한계들은 출범 때부터 예상돼온 것이었다. 낡은 세력이 아직 역사 속으로 사라지지 않고, 권력의 한켠을 지키고 있는 시대 상황에서 기인한 탓이 크기 때문이다. 그나마 주어진 조건 속에서나마 최선의 결과를 끌어냈다면 얘기는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이마저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규명위가 예정된 난관을 돌파하지 못한 데는 내부 갈등도 한몫을 했다. 갈등은 2001년 11월21일, 김학철 조사3과장이 “현재의 위원회 체제에서는 진정한 진상규명 활동이 어렵다”며 사표를 제출하면서 불거졌다. 이에 앞서 박현주 대외협력팀장을 포함한 민간 출신 전문위원 3명이 사표를 제출했다. 80년대 자행된 ‘녹화사업’에 대해 김학철 과장이 당시의 사회, 정치 상황 전반을 포함한 조사활동 방침을 밝힌 데 대해 기관 파견 조사관들이 “사망 전후의 행적과 사인 등만을 규명하면 된다”며 반발한 것이 발단이 됐다.
힘없는 조사관들… 공무원의 몸사리기
유가족과 규명위의 갈등은 위원회 활동 초기로 거슬러올라간다. 유가협 허영춘 의문사지회장은 “지난해 여름부터 시작된 유가족 중간설명회를 거치면서 위원회 기조에 의문을 갖게 됐다”고 밝혔다. 위원회가 유가족들의 의문에 귀기울이지 않고, 독단적으로 조사를 진행해왔다는 것이다. 의문사 조사결과가 나오면서 갈등은 더욱 심화됐다. 그동안 규명위의 조사대상이 된 의문사는 83건. 현재 조사가 종료된 진정은 15건이다. 이중 2건만이 의문사로 인용(認容)되었고, 나머지는 각하되었다. 이런 상황이다보니 유족들은 “규명위 활동이 과거청산이 아니라 의문사청산으로 끝날 가능성이 크다”는 위기감을 느낀다. 결국 유가족들의 불만은 위원장실 점거 농성으로 이어졌다. 농성이 시작되자, 민간조사관들이 유가족들의 문제제기에 동의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농성 마지막날인 12월22일 규명위 9명의 위원 중 안병욱 가톨릭대 교수(사학) 등 비상임위원 3명마저 사퇴 의사를 밝혔다. 이들도 위원회의 활동 기조를 문제삼았다. 안 교수는 “위원회가 객관성과 합리성의 함정에 빠졌다”고 지적했다. “법 조항에만 매달리다보면 결국 개별 사건의 자·타살 여부에만 집중하게 됩니다. 그런데 지금의 법적 권한으로는 은폐된 사실을 들춰내 공권력에 의한 타살을 규명하기가 어렵지요. 조사를 할수록 기각 결정만 나오게 되는 딜레마에 빠지는 거죠. 유족들의 의문이 완전히 풀리지 않는 한, 조사불능으로 처리하는 편이 차라리 낫지요.” 안 위원에 따르면, 의문사의 특성상 피해자들의 공권력에 의한 타살을 ‘증명’하는 방식이 아니라 국가기관들이 의혹이 사실이 아님을 ‘반증’해야 한다. 그러나 현재의 규명 방식은 뒤집어진 꼴이다. 규명위 황인성 사무국장도 “규명위 활동이 진정처리가 아니라 과거청산의 관점에서 진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개별 사안의 자·타살 여부에 매몰되지 않고, 의혹을 갖게 된 사회·역사적 배경에 주목해야 권력기관의 인권침해 메커니즘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규명위 한 관계자는 “위원회가 진실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밝히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유가족들의 동의도 얻고, 법 개정도 이뤄낼 수 있다”고 말했다.
안팎의 난관에 진상규명은 지리멸멸
일단 위원장의 사퇴로 규명위 활동은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하지만 규명위 활동 쇄신의 걸림돌은 당장 코앞으로 다가온 활동종료 시점이다. 현행 특별법에 따르면, 규명위의 활동시한은 4월 말까지다. 조사개시 시점에서 최장 15개월까지 가능한 사안별 조사활동은 2월 말 대부분 마감된다. 상당수 사안이 2000년 연말 조사활동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대통령에게 제출할 조사보고서를 작성할 한달여의 시간까지 고려하면 사실상 1월 말이 조사활동 종료시점이 된다. 시한 연장을 포함한 의문사 특별법 개정이 시급한 상황이다. 계승연대 이은경 사무처장은 “조사관들이 바닥을 훑으면서 찾아낸 사실들을 보면 현재의 조건에서도 진상규명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라며 “시한을 연장해 진상규명 활동을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실적으로도 조사종료된 사안 외에 60여건의 진상규명 활동이 남아 있다. 민간 조사관들은 “대부분의 사안들이 참고인 조사를 끝내고 본격적으로 권력기관을 조사할 단계에 이르렀다”며 “위원회의 권한이 조금만 강화되면 얻어낼 성과들이 눈에 보인다”고 안타까워한다. 법 개정에 미온적이던 규명위도 12월 말 ‘특별법 개정 소위원회’를 구성하고 개정안 마련에 나섰다. 소위원회는 이미 조사관과 유가족들의 요구를 수렴해 개정안의 초안을 확정지은 상태다(상자기사 참고). 2월 임시국회가 열리기 전까지 개정안을 확정하고, 국회의원 설득 작업에 나설 계획이다.
적지 않은 성과, 아직도 진실은 멀었다
한편 조시현 성신여대 교수(법학)는 시민사회의 무관심을 지적한다. “의문사 진상규명 활동을 해오던 시민사회의 주역의 대부분이 위원회에 들어갔다. 규명위 바깥에서 진상규명 활동을 감시하고 강제할 동력이 사라진 것이다. 더구나 시민들의 과거청산 열기마저 식어버린 상황이 겹쳤다”. 이어 조 교수는 “현 정권이 과거청산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있는 정권인지 의심스럽다”고 꼬집는다. 보수적인 야당과 정부 관료들의 저항에 부딪혀 ‘생색내기용’ 과거청산에 그치고 있다는 것이다. 참여연대 박원순 사무처장은 규명위의 현실을 “추진력 없는 여당, 보수적인 야당, 뒷받침하지 못하는 시민사회가 빚어낸 복합적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법적 권한의 한계와 내부갈등 속에서도 규명위가 거둔 성과는 적지 않았다. 73년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를 받던 중 숨진 최종길 서울대 법대 교수와 전남 거문도에서 실족사했다는 이내창씨의 의문사에 대한 진상 규명에 근접한 상태다. 김형태 위원은 “처음 시작할 때는 1건이라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는데 생각보다는 성과가 컸다”고 평가한다.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사회학)는 “의문사 규명이 얼마나 가능한가는 우리 사회의 인권지수를 반영한다”고 말한다. 특별법 개정안의 국회 통과 여부는 한국 사회가 어두운 과거를 청산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묻는 시금석이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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