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집 ] 2002년01월16일 제393호 

맹물 디자인, 뒤집어버려!

정류장에서 신분증·교과서까지 디자인의 공공성을 상상하는 ‘de-sign korea’


사진/ 사람들의 모이지 않는 황량한 경기도 부천시 송내역 광장을 나무와 잔디가 어우러진 아늑한 도심 속 공원으로 시뮬레이션했다.


친구와 버스정류장에서 만나기로 한다. 약속한 시간에서 한 30분쯤 미리 버스정류장으로 나간다. 어릴 적 놀러간 시골에서 한낮의 달콤한 잠에 빠졌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원두막처럼 포근한 나무결에 시원한 그늘을 드리운 정류장 의자에 앉아 친구와의 추억을 기분좋게 떠올리다보니 어느새 온 친구가 옆에 앉아 있다. 잘 다듬어진 키 큰 가로수와 앉은뱅이 꽃들이 화단처럼 이어진 넓은 보도를 함께 걸으며 요즘 이야기, 지난 이야기를 나눈다. 걸으면서 가끔 만나는 거리상점의 아기자기하게 정리된 잡지 표지나 커피향에 잠시 한눈을 팔기도 한다. 다리가 뻐근해질 무렵 거리상점에서 산 커피를 들고 근처의 도심 속 작은 공원으로 방향을 튼다. 카페의 소파보다 예쁜 벤치에 앉아 은은한 조명등 아래서 이야기는 계속 된다. 주변의 벤치에는 퇴근길 직장인들이 삼삼오오 모여앉아 고단한 노동의 피로를 털어낸다.

잠시 떠났던 상상의 세계에서 돌아와보면 거리에는 열 걸음 단위로 나타나는 무질서한 가판대와 수많은 표지판, 입간판, 보도 위에 버젓이 세워놓은 자동차들까지 우리의 발걸음을 막고 있다. 좀처럼 정류장에서 약속을 잡지도 않지만 할 수 없이 그렇게 될 경우 상대방이 10분만 늦어도 속에서는 부아가 치민다. 빌딩 숲 사이에서 맘 편히 쉴 만한 휴식처를 찾는 것은 애초 불가능한 일이다. 따지고보면 거리의 보도블록이 내가 낸 세금으로 깔린 것인데 왜 나는 나의 땅을 침범하고 있는 장애물들을 묵묵히 피해다녀야만 하는 것일까? 내 옷, 내 차, 내 집을 고를 때는 아름다움과 기능을 꼼꼼히 따져보면서 왜 내가 다니는 거리와 계단, 늘 만나는 표지판과 거리를 덕지덕지 메운 게시물, 거리 화장실의 불편함과 불쾌함에 대해서는 ‘노’라고 말하지 못하는 것일까?

공공 게시물이란 본래 촌스러운 것?


사진/ 정류장을 도심 속 쉼터로 만들 수는 없을까, 발걸음을 가로막는 거리가판대는 아름다운 도시의 가구가 될 수 없을까, 공공성에 대한 상상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현대인에게 디자인은 자신을 표현하는 언어이자 타인과 관계맺는 방식이다. 옷을 고를 때, 집안을 꾸밀 때 디자인을 신중하게 선택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사적 영역을 벗어나는 순간 자신의 취향도 까다로운 미감도 사라져버린다. 공공 게시물이란 본래 촌스럽고 투박한 것, 정류장이란 본래 을씨년스러운 곳, 공중화장실은 본래 지저분한 곳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여기 상상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디자인의 공공성에 대한 상상.’ 한국의 중견 그래픽 디자이너들이 거리상점, 정류장, 화장실, 선거 포스터, 증명서 등 공공의 영역에서 존재하지 않았던 혹은 잘못 존재해왔던 디자인을 뒤집고 해체하는 ‘상상’을 한다. 1월31일까지 예술의전당 디자인미술관에서 열리는 전은 한국사회를 구성하는 기호(sign)을 해체, 재구성하고자 하는 디자이너들이 던지는 일종의 ‘화두’다.

서울에 서 있는 거리상점은 3700여개. 그 자체로 충분히 어수선하다 못해 옆에 펼친 박스와 물품들이 보행자들을 가로막는다. “가판대는 노점상 문제와 맞물려 철수 등 부정적인 시책대상이 되면서 그 역할과 활용에 대한 연구, 대책없이 난립만 심해졌다.” 시스템 디자이너 김대영(시스템스토어 대표)씨는 인사동, 지하철 내부 등 기존 거리상점의 흉한 외관을 해체하고 흩어져 있던 기능을 하나의 세트 안에 정돈하는 ‘상상’을 해보았다. 주목할 만한 것은 획일성의 탈피다. 인사동의 가판대는 고전적이거나 미술작품 같고, 테헤란 벤처밸리의 가판대는 모던하고 공학적인 느낌이다. “주변의 환경이나 기능에 부합해야지, 아무리 기능과 디자인이 뛰어난 시설물이라도 획일적으로 세워지면 그 역시 독재이기” 때문이다. 자투리땅을 디자인한 조남석(EDI환경디자인연구소 대표)씨가 상상하는 도심 속 쉼터도 획일성을 거부한다. “대부분의 쌈지공원이나 마을마당에는 비슷한 형태의 식수와 정자가 서 있다. 또다른 문제는 주택지의 버려진 공간을 활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쌈지공원의 디자인이 마치 자투리 공원의 전형인 양 도심에서도 반복된다는 사실이다.” 서울에서 가장 번잡한 도심 가운데 하나인 여의도역 옆에 정자가 덩그러니 서 있는 웃지 못할 풍경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조씨는 나무도 정자도 필요충분조건이 아닌 도심의 쉼터, 때로는 작은 폭포가 때로는 독특한 의자가 시선과 마음을 끄는 ‘도시의 허파’를 상상한다.

주민증, 복종의 이미지를 넘어


사진/ 남녀를 구분하는 주민번호 뒷자리와 지문날인을 없앤 신분증. 기존의 주민증을 사회보장카드로 새롭게 디자인했다.(이용호 기자)


공공 디자인은 가판대나 공원, 화장실 같은 물리적 공간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심리적 공간에서도 우리의 공공적 삶은 디자인된다. 증명서는 공권력이 시민의 삶을 디자인하는 대표적인 케이스다. 전자주민증 폐지운동이 성공을 거두고 지문날인 거부의 움직임이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꺼이 ‘잠재적 범죄자’로 국가의 공문서에 손도장을 찍는다. 김주성(인터그래픽 대표)씨가 상상하는 신분증은 ‘주민증’이 아니다. 거기에는 주민등록번호 뒷부분에 남성과 여성을 구별하는 숫자가 빠져 있고 지문도 없다. 등록되는 정보도 주소에서 혈액형까지 본인이 원하는 만큼 취사선택할 수 있다. ‘주민증’이 아니라 일종의 ‘사회보장카드’다. “신분증이란 축약된 개인의 이미지고 정체성이다. 그런데 우리의 주민증은 어떠한가? 시민주체적 공공이미지라기보다 복종에 대한 강요의 이미지다.” 디자인이 심리적 공간을 개입해 들어가기 시작했을 때 이것은 단순히 스타일이 아니라 정체성 문제로 환원되는 것이다

선거철을 앞두고 대통령 선거포스터를 상상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아이를 앉고 있는 모습? 환한 얼굴에 승리의 브이(V)자? 차라리 그 환한 얼굴의 콧구멍을 뻥 뚫어놓고, 매직으로 우스꽝스럽게 덧칠해 놓은 모습이 먼저 떠오르지 않는가. 대통령 선거포스터는 정치문화의 ‘상징적 표상’이다. 이 프로젝트를 준비한 디자인언어행동모임 AGI의 장문정씨는 97년 대선 당시의 포스터를 회상해본다. “그때의 포스터를 보면서 웃는 것은 단지 디자인의 촌스러움 때문일까. 차라리 한없이 권위적으로 보이는 이미지 뒤에 있는 실체의 이율배반성을 확인했기 때문일 게다. 선거 포스터는 급성장한 커뮤니케이션 환경 속에서 여전히 권위적이며 일방적으로 내뱉기 식인 정치문화의 한 단면을 적절하게 드러내준다.” 이변이 없는 한 오는 대선 포스터에서도 유권자들은 ‘조금 세련돼졌지만’ 대화의 상대가 아닌 지배자의 모습을 만날 것이다. 불과 1, 2년 그 포스터가 전하는 코미디를 예견하면서 말이다.

“우리가 내놓은 선거포스터나 정책자료집은 하나의 대안이나 따라야 할 방향이 아니다. 다만 이제 소통 가능한 정치문화를 상상해보자는 말걸기, 제안이다.” 장씨의 말처럼 이번 전시에서 등장한 작품들은 대안이 아니다. 디자이너들이 해체하고자 하는 것은 한심한 생산물이 아니라 그 생산물이 만들어지는 과정, 즉 디자인의 프로세스다. “공공 디자인의 주체는 행정기관뿐 아니라 디자이너 등의 전문가, 시민이 함께 가야 한다. 시민은 요구하고 디자이너는 개입하며 행정기관은 집행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시민은 일방적인 수혜자로 머물러 있으며 디자이너는 공공영역의 디자인에 개입하기를 꺼려해왔다. 그러는 사이 공공디자인은 미학적으로도 기능적으로도 한심한 지경에 이른 것이다.” 인문지리정보시스템 프로젝트를 기획한 김경균(정보공학연구소 소장)씨의 반성적 비판이다.

선거철 포스터도 바꾼다


사진/ 잘된 디자인은 내용을 포장하는 것이 아니라 내용과 분리할 수 없는 유기적 관계를 맺는다.


‘de-sign korea: 디자인의 공공성에 대한 상상’은 100년 전 ‘디자인’의 개념이 만들어진 뿌리가 됐던 공공성, 타인에 대한 배려로 돌아가자, 즉 디자인의 본래 과정과 정신을 회복하자는 디자이너들의 선언이다. 그래서 이들의 작업은 대안이 아닌 상상이며, 반복돼야 할 상상이다. 이카루스에서 시작된 인류의 날기에 대한 상상이 비행기의 출현으로 현실화된 것처럼.

디자이너들의 상상이 현실과 만나는 지점이 그리 먼 것만은 아니다. 9개 프로젝트 가운데 하나인 ‘교과서-함께 만드는 책’은 이미 상상의 실현을 이뤄낸 이번 전시의 소중한 성과물이다. 이 프로젝트를 담당한 간텍스트(대표 조주연)는 지난해 중학교 1년생용 <우리말 우리글>이라는 대안적 교과서를 만든 전국국어교사모임과 함께 고1 국어교과서를 제작했다. 1년 동안 교사모임의 정례미팅에 함께 참여해서 토론하고 그 작업물을 다음 만남 때 함께 수정, 변경하며 한권의 교과서를 완성해나갔다. 교과서의 사용자인 교사와 디자이너가 주체가 되어, 보조가 아닌 교과내용과 결합, 하나의 텍스트로 역할하는 디자인의 프로세스를 이끌어낸 것이다. 한 예로 시각언어편을 보자. ‘이미지 어떻게 읽을 것인가’라는 이 주제에서는 사과를 중심으로 떠오르는 갖가지 이미지들을 시각화해 학생들이 ‘이미지 시대’에서 인식과정을 밟고 ‘이미지로 표현하기’를 안내한다. 전시장의 지면들은 이들이 토론 때 발표, 검토한 프로세스 자료들. 마무리 작업인 한창인 이 교과서는 오는 2월 초 출간돼 전국 고등학교에서 선택교재로 활용된다.

공공영역의 디자인 문제가 전문 디자이너들 사이에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반가운 일이다. 상상은 시작이자 과정이다. 설득이고 싸움이다. 중요한 것은 이들의 상상이 경험없음에서 나오는 시민들의 무관심이나 외면을 설득해나가고 일방통행길만 있는 관주도 공공디자인과 싸워나갈 때까지 지속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상상은 반복되고 공유되어야 현실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전시문의: 02-580-1540).


사진/ 모두 같은 색깔의 넥타이를 맨 정치인들. 획일적이고 일방적인 우리 정치문화를 은유한다.(이용호 기자)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




↑Back to the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