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감춰진 진실, 문서는 안다미국 국립문서보관소 20여년째 출입하며 역사 추적하는 한 사학자의 증언
1982년인가 싶다. 필자는 갑신정변 실패 뒤 미국에 망명한 변수(邊燧)와 서광범(徐光範)의 사적을 추적하고 있었다. 서광범 전 주미공사가 1897년 8월13일 워싱턴에서 폐결핵으로 사망할 당시 ‘구두유언’이 있었다는 것을 신문에서 찾은 필자는 행여나 하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낯선 시청 건물을 찾아갔다. 들어선 지 15분도 안 돼 원본의 복사본을 쥔 필자는 이것이 꿈인가 무엇인가 하고 한참 생각했다. 찾아온 사연을 들은 안내역은 어느 방으로 가라고 지시했고 그 케케묵은 방에 들어가자 원하는 사람의 이름을 달라고 하여 주었더니 카드색인 같은 것을 보고나서 빛바랜 봉투 하나를 내어놓고 복사해 달라는가 물었다. 이것이 한국 서울시의 시청이라면 어떠했을까 생각해 보게 됐다. 번잡한 수속도 없었고 나의 신분증 제시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100년 전의 문서관리도 잘 되어 있었다는 점이었다. 이것이 미국의 좋은 단면인 것만은 틀림없다.
신분증 없이 100여년 전의 유언장 열람
필자는 1978년 미국 수도 워싱턴에 이주하여 본격적으로 미 국립문서보관소 출입을 시작했다. 그 전에는 도산처럼 계절노동자들과 같이 농장과 과수원에서 일했다. 박사학위를 받고도 이런 일밖에 없는 바에야 현대사 공부나 더 하자는 목적이었다. 국립문서보관소(Nara: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를 흔히 ‘국립기록보존소’(National Record Center)라고 이야기하지만 양자는 같은 것이 아니다. 미국 정부의 각 부처는 일정기한이 지나면 그 보유문서를 기록보존소에 예탁하도록 제도화돼 있다. 매릴랜드주 스트랜드라는 고장에 가면 국립기록보존소 본부가 있고 여기에 국무부 내무부 등 각 부처가 자기들의 문서를 쌓아놓는다. 그러면 그곳 보존소 직원들이 분류를 해놓고 국립문서보관소에서 가져가고 싶은 문건덩치들을 사이에 놓고 흥정한다. 그 과정에는 예탁한 정부 부처의 입김이 작용한다고 들었다. 국립기록보존소에서부터 국립 공문서관이 문서를 입수했어도 연구자가 곧바로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곳의 문서연구관들이 다시 일반 연구자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엄격히 구별하기 때문이다. 일반 연구자들에게 보여줘도 무방하다고 여기는 문서들 사이에도 간간이 여기서부터 어디까지는 열람금지돼 보류되었다는 쪽지가 삽입되어 있다. 물론 내용이 어떠하기 때문에 열람금지 한다는 설명이 없다. 필자가 워싱턴에 도착하여 처음 열람을 시작한 것이 6·25전쟁중에 북한에서, 또 남침한 인민군에서 노획하여 온 1천여 상자의 문서들을 열람하는 것이었다. 그 안에는 열람금지의 카드가 곳곳에 삽입되어 있었다. ‘정보자유법’에 의하여 그것들의 기밀해제를 거듭 요구하여 원상회복시키고 나서 보니 거의 모두가 개개인 사생활 침해 조항에 저촉하여 빼놓은 것들이었다. 즉 북쪽 어느 마을의 밀고자 명단, 전쟁중에 남쪽에서 북으로 피난간 인사들의 명단 같은 대수롭지 않은 것들이었다. 이것은 검열한 사람이 일을 했다는 증거를 남겨놓으려는 의도도 있겠지만 어찌하든 개개인의 사생활을 보호하려는 자세가 돼 있어 과연 미국이로구나 라는 호감이 들게 하는 대목이다.
국가기밀 유지·사생활 보호된다면 공개
미 국무부의 한국관련 일반문서 가운데에는 열람이 금지된 언론관계의 것들이 더러 섞여 있다. 검열자의 소홀함으로 딴 문서에 섞인 1∼2매의 낙장(落張)으로 판단한다면 미 대사관에서는 한국언론들의 재정구조, 소유관계 그리고 경향성을 일일이 조사하여 연례적으로 본국에 보고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았다. 모 신문은 중앙정보부가 그 지분 50%를 강점했다더라는 서술도 본 일이 있다. 그러나 이런 사항들이 개개 언론사의 프라이버시에 속한다면 보여주지 않는 것이 오히려 당연할 것이다. 결국 미국의 문서 비공개의 2대 원칙은 국가기밀의 유지와 개개인의 프라이버시 보호차원이다. 국가기밀의 유지는 당연히 국익계산이 그 밑에 깔려 있겠다. 한국관계 국무부 문서나 육군문서 안에는 ‘ACCESS RESTRICTED’라는 카드가 무수히 삽입되어 있고 정보자유법에 의해 기밀해제신청을 하여 될 것이 있고 되지 않을 것이 있다. 될 것은 프라이버시 당사자가 중요하지 않은 인물로 이미 고인이 된 경우이고 또 기밀해제 신청을 내어도 우선순위가 있어 일본 것들은 언제나 한국 것보다 앞섰고 힘 많은 신청자가 항상 유리한 입장에 있다고 보았다. 필자는 이미 공개된 북한 노획문서말고도 약 180상자가 더 있다는 것을 알고 나서 맹렬히 해제신청을 냈지만 몇해 지나도 너무 일이 폭주하여 일손이 모자란다는 대답 일변도였다. 그러다 공군 정훈감을 지낸 전쟁기념사업회의 이은봉 퇴역대령이 미국에 왔을 때 같이 아카이브스의 제일인자를 기습방문하고 이것이 주효하여 해제가 촉진된 예가 있었다. 이것이 나의 한국사에 대한 업적이면 업적에 들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 외에는 6·25전쟁중의 북한간첩 조사철, CIC 백범관계문서 등등 몇해가 지나도 소식이 감감하여 이제는 지쳐서 포기상태이다. 제주도 출신 이도영 박사의 대전감옥 좌익인사 1800명 처형이라는 대형 스쿠프는 노근리 사건이라는 큰 테두리 안에서 얻어진 행운으로 큰 사건의 해명과정에서는 왕왕이 노다지가 쏟아져 나오게 되어 있는데 대전에서 처형된 죄수와 보도연맹관계자는 최소 5천명을 넘을 것이라는 것이 나의 추측이다. 다만 구체적인 자료가 나오지 않았을 뿐이다.
해제문서 부스러기 모아도 역사 밝혀
필자의 연구성향은 가능한 한 많은 기밀해제문서를 읽고 부스러기를 모아 하나의 그림을 그려본다는 것이므로 시간과 노력이 이만저만 아니다. 노근리사건을 조사하다 옛 일본군 군인이 불법적으로 미 제1기갑사단 안에 들어가 노근리 부근에서 싸웠고 북진하다가 전사한 예를 찾아 후속 조사를 하고 있다. 노근리사건 당시 과연 노근리 주둔 미군 안에도 전 일본 군인이 없었는가라는 새로운 시각이 열리게도 되었다. 이 전사자는 미군이 아니기에 미군 명단에도 없을 것이며 이 사람이 8·15 전에 한국인에 감정을 가졌다 가정한다면 기관총 총질로 40∼50명쯤이야 단박 결단을 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는 군인기록관리를 아무리 잘해봐도 나올 수 없는 허점이다.
방선주/ 재미 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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