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돌파구는 존재한다산별노조체제로의 이행, 노동자 정치세력화, 양대노조 통합 등이 새로운 시대의 과제
“기업별 노조하에서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거나 중앙이 관료적으로 정비되는 상황으로 전개된다면 민주노조운동의 그동안 성과는 무너지고 노동운동의 미래는 후퇴할 수밖에 없다.”(민주노총 ‘노동운동발전전략위원회 초안’) “노동시장 유연화 등 신자유주의의 세계화는 노동자의 지위와 노동운동의 역량을 크게 약화시킨다. 노동운동이 허리가 꺾이느냐 펴느냐의 기로에 서 있는 현 상황에서 다시 일어서기 위한 당면전략수립이 중요하다.”(한국노총 ‘21세기 노동운동의 기조’)
‘협상시대’의 대안, 산별노조
신자유주의 물결 속에서 침체의 길을 걷던 양대노총은 지난해부터 21세기 노동운동을 이끌어갈 운동의 기조를 마련하고 있다. 민주노총은 노동운동 발전전략으로 △2005년까지 7∼8개의 대규모 산별노조체제로 이행 △정치력 강화 △현장지향성 강화 등을 내세우고 있다. 또 한국노총은 21세기 운동의 기조로 △산별 조직전환 △조직률 강화를 위한 광범위한 조직활동 전개 △독자적인 정치세력화 도모 등을 내걸었다. 물론 노동운동을 압박하는 새로운 도전들에 대응하고 변화된 상황에 맞는 새로운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는 과제에서 출발한 것들이다. 노동운동이 위기 속에서 나름대로 질적인 변화를 겪고 있는 셈이다. 당면한 노동운동의 위기를 극복할 돌파구로 가장 역점을 두는 부분은 양대노총 모두 산별노조 건설과 노동자 정치세력화다. 산별노조 건설은 무엇보다도 기업별 노사관계에 기초한 대립적이고 갈등적인 노사관계가 이제 더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인식이 노동운동 안에 확산되고 있는 것과 맞물려 있다. 고립·분산적이고 파편화된 조직적 기반을 가진 기업별 노조주의 자체가 허용되지 않는 시점에 와 있다는 것이다. 한신대 노중기 교수는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유지돼온 틀이 있었지만 이제는 법적, 제도적 장치들이 더이상 맞지 않는 상황”이라며 “이는 기업별 노조시스템이 불가능한 상태에 와 있음을 의미한다”고 진단했다. 기업별 노조체제 아래서는 고용불안에 대한 개별사업장 노동자들의 저항이 그대로 중앙조직에 반영되어 노동운동은 합리적 대안 제시보다는 투쟁 일변도로 기울기 일쑤였다. 장홍근 박사(노동문제연구가)는 “‘87년 노동체제’가 97년 초 노동법개정 총파업을 계기로 새로운 노동체제로 전환하고 있다”며 “이 과정에서 노동은 대립과 투쟁보다는 타협과 협상을 요구받고 있다”고 파악했다. 극한적 투쟁이 아니라 주고받기식 ‘교환논리’로 운동의 방향을 전환하도록 강제당하고 있다는 얘기다.
노사정위, 제도화의 실험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이원보 소장은 “지금의 노동 조직기반은 새로운 도전에 대응할 수 없는 한계를 안고 있다”며 “더이상 이탈을 막고 분열에 노출되는 것을 막는 길은 산별노조 외에 대안이 없다”고 말했다. 산별노조로의 전환은 이미 몇몇 산업에서 이뤄지고 있다. 언론, 금융, 보건의료, 대학노조 등이 산별노조로 탈바꿈했고 15만명의 조합원을 거느린 금속산업연맹의 경우 오는 2월 산별노조 창립대회를 가질 예정이다. 산별노조로의 전환은 특히 비정규직과 중소사업장 노동자 등 미조직 노동자들을 노동조합으로 묶어내는 길이기도 하다. 양대노총을 합쳐 조직대상 노동자 1200여만명 중 조직된 노동자는 160여만명으로 노조조직률은 11.9%에 불과하다. 현대그룹 노동조합협의회 최선미 조직부장은 “양대노총이 대공장노조 중심으로 핵심노동자층만을 대변하는 조직으로 전락하고 있다”며 “1천만 노동자들을 떠안으려면 당장 해야 할 사업은 중소사업장과 비정규직의 조직화다”고 말했다. 하지만 산별노조로 가는 길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다. 금속에서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대우자동차, 대우조선 등 대공장노조는 자신들이 갖고 있던 재정과 권한의 기득권 때문에 산별로 가는 데 여전히 미온적이다. 이는 대공장노조를 중심으로 이뤄져온, 오랜 기업별 노조의 틀을 깨기가 그만큼 힘들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경남대 임영일 교수는 “지금의 민주노총은 인력과 재정구조에서 중앙이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은 거의 없으며 그 밑바닥에는 기업별 노조가 자리잡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러나 2002년 노조전임자 임금지급 금지와 복수노조 허용으로 기업별 노조는 급속히 해체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을 공산이 크다. 실제로 전임자 임금지급이 금지되면 조합비만으로 전임자 임금을 자체 지불할 수 있는 노조는 최소한 조합원 1천명 이상인 대기업노조(전체 노조의 3.8% 정도)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노동자세력의 정치적 대표체제인 진보정당 건설은 21세기 노동운동의 최대 과제가 되고 있다. 진보정당은 현재 민주노총을 기반으로 하는 민주노동당 외에 노동자 주도를 중시하는 정치조직으로 노동자의 힘(준비모임)이 있고 지난 4·13총선에서 서울과 인천지역에 46명의 후보를 냈던 청년진보당이 있다. 양대노총 가운데 민주노총은 민주노동당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반면 한국노총은 산하 금융노조 등에서 일부 민주노동당에 참여하고 있긴 하지만 공식적으로는 가칭 ‘한국노동당’이라는 독자적인 노동자 정치조직을 건설하는 방안을 검토해오고 있다.
운동이 곧 미래다
사회적·정치적 수준에서 제도화하지 못한 채 사업장 수준에서 갈등과 대립을 수반해온 노사관계는 국민의 정부 들어 노사정위원회가 설치되면서 사회적·정치적 수준에서의 제도화가 실험을 받고 있는 중이다. 비록 민주노총의 불참으로 ‘반쪽’에 불과하지만 노사정위는 사회적 합의를 통한 계급타협체제 가능성에 있어서 큰 변수인 것은 분명하다. 이에 대해 인하대 윤진호 교수는 “노사정위원회가 계급타협체제로 가능하려면 강력한 산별노조와 진보정당의 존재라는 조건이 갖춰져야 한다”며 “현재 이런 요소들이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노동계가 노사정위를 통해 그런 조건들을 창출하는 데 유리한 제도와 정책을 만들어 진정한 의미의 사회적 합의주의를 이끌어낼 수도 있을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전망했다. 양대노총 통합문제도 노동운동 진영의 오랜 숙제다. 특히 산별노조로 조직체계가 바뀌는 과정에서 양대노총 통합문제는 이슈로 터져나올 가능성이 높다. 한국노총 이정식 대외협력본부장은 “실질적으로 운동과정에서 사업을 통해 양대노총을 묶어내느냐가 핵심”이라며 “사안별, 부문별 연대사업을 통해서 점차 극복해나가야 할 과제”라고 말했다. ‘차이’를 인정하면서 ‘연대’를 통해 통합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얘기다. 한신대 노중기 교수는 “노·사·정 3자를 묶고 있는 사회구조적 틀이 크게 바뀌고 있는데 현재는 룰이 없는 과도기체제”라고 규정한 뒤 “하지만 이런 노동운동의 위기는 산별노조체제와 노동자 정치세력화로 가는 기회일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87년 이후 민주노조운동 10여년의 경험에서 많은 성장을 했지만, 채 꽃피기 전에 신자유주의 흐름 속에서 방황을 거듭하고 있는 노동운동의 진로는 어디인가. 한국노동사회연구소 김금수 이사장은 ‘노동운동의 미래는 있는가’라는 글에서 노동운동의 발전이 평탄할 리 없다는 생각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노동‘운동’이 곧 미래이다.”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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