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당신들과 우린 코드가 달라!‘30대 이상’과 ‘30대 이하’, 그 견고하고 높은 문화적 감성의 철벽
99년 개봉했던 <오스틴 파워>를 보러간 20대의 한 영화 전문 기자는 우연히 만난 평론가와 나란히 앉아 영화를 보게 됐다. 영화 내내 앉음새를 추스르기 힘들 정도로 까르르 넘어가면서 영화를 본 뒤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며 일어날 무렵 옆자리의 평론가로부터 질문을 받았다. “저게 재미있어요?” 30대 중반의 평론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기자를 빤히 쳐다봤다. 극장에서 나오는 두 사람의 얼굴은 각기 <총알탄 사나이>와 <플래툰>을 본 것만큼이나 달랐다. <시민 케인>이나 히치콕의 위대함에 대해서라면 한 시간이고 한나절이고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두 사람이 이 영화에 대해서 한마디의 감상도 나누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 작품의 전체 관객 중 90% 정도가 10대 후반에서 20대 중반이었다는 사실은 두 동종업자간의 머나먼 거리를 설명해준다. <오스틴 파워>는 갖가지 성적 유희와 배설물에 대한 농담으로 도배된 이른바 ‘화장실 유머’의 결정판 영화다. 고환 모양의 우주선, 바나나에서 오이로, 오이에서 나무토막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남성 성기에 관한 농담들, 변기에 앉아 자신의 분신을 ‘낳는’ 주인공, 원색으로 가득 찬 영화의 장식물들까지 어디에도 우디 앨런식의 ‘은유적’이고 ‘풍자적’인 웃음은 없다. 평론가들은 종종 ‘90년대 미국사회에 대한 냉소’라는 그럴듯한 평을 내놓았지만 이 영화에 대한 반응은 두 가지다. “막 웃겨”와 “역겨워”. 전자는 대체로 20대 이하 관객의 것이고 후자는 30대 이상 관객의 것이다. 또한 전자는 ‘엽기’라는 단어에서 헤어젤로 변신한 정액을 떠올리는 세대의 것인 반면, 후자는 토막살인을 떠올리는 세대의 것이라는 차이가 있다.
“막 웃겨”와 “역겨워”
세대간 문화의 충돌은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나 있어왔다. 그러나 웃어야 할 지점을 세대에 따라 다른 곳에서 찾는 것은 불과 몇년 사이에 벌어진 새로운 현상이다. 젊은이들은 오줌을 맥주로 착각하고 마시거나 파이를 자위기구(?)로 이용하는 얼간이에 환호하는 동안 기성세대는 이들을 한심하다는 눈초리로 쳐다볼 뿐이다. 장발머리와 나팔바지 차림의 아들과 아버지가 으르렁거리다가도 <웃으면 복이 와요> 시간만 되면 행복하게 만나는 시대는 끝난 것이다. 가족이데올로기이든 현대사회에 대한 비판이든 메시지가 없는 ‘텅 빈 유희’에 기성세대들의 감성코드는 움직이지 않는다. “쿨하잖아요.” 지난해 서울 관객 98만명의 대부분을 18∼23살이 채웠던 영화 <매트릭스>를 이우영(22)씨는 네번이나 봤다. 문학평론가 주인석씨가 “감성의 윈도가 좀체 열리지 않는다…, 이소룡과 성룡과 이연걸을 어설프게 흉내내는 이 공허한 영웅”이라고 비판했던 이 영화는 인터넷과 게임, 그리고 일본 애니메이션에 익숙한 세대의 감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머릿속에 ‘로그인’해서 헬리콥터 조종술과 무술을 익히며 총알을 피해가는 ‘황당무계함’에 젊은이들은 환호한다. 무공을 쌓기 위해 오랫동안 땀흘리며 연마하는 주인공은 따분할 뿐 아니라 구차하다. “같은 SF영화라도 <브라질>이나 <블레이드 러너>처럼 메시지를 주는 영화는 뭔가 가르치려고 하는 게 맘에 들지 않는다”는 게 이씨의 말이다. 비범한 주인공이 세계를 구한다는 메시지가 있지만 이들은 결론에 환호하는 것이 아니라 ‘쿨한’ 장면들, ‘세련된 유희’를 즐기는 것이다. 영화에서처럼 ‘로그인’은 바로 젊은 세대들이 자신들의 세계로 들어가는 출입구이고, ‘사이버 세계’는 검은 가죽을 입은 주인공처럼 새로운 ‘나’가 활약하는 무대다. 메시아는 비범한 재능과 힘의 소유자가 아니라 ‘파워유저’다. <매트릭스>나 <오스틴 파워>처럼 젊은 세대들이 열광하는 영화들의 마케팅은 당연하게도 ‘로그인’을 통해 이뤄진다. 지난해 유난히 많이 개봉했던 엽기유머영화 가운데 가장 좋은 성적을 냈던 <무서운 영화>는 보통 영화들이 가장 중요시 하는 지면 매체 광고가 나가기도 전에 한 사이트에서 조사한 가장 보고 싶은 영화 1위에 올랐다. 개봉 한달 전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올린 광고가 유저들 사이로 빠르게 ‘입력’됐기 때문이다. ‘나는 엽기가 좋아’ 등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코드로 도배된 카피 역시 주효했다. <오스틴 파워> 역시 초고속망 통신과 함께 진행한 인터넷 광고 덕을 톡톡히 봤다.
리니지, 가장 높은 벽
<매트릭스>의 엄청난 성공은 게임 세대의 감수성과 궤를 같이한다. 로그인을 통해 가상세계에 들어가서 각종 전술을 쌓아가며 적과 싸운다는 전개가 정확히 게임과 맞아떨어지는 컨셉이다. 이때 게임은 ‘테트리스’나 ‘헥사’ 같은 고전적 레퍼토리와는 다른 인터넷 사이버 세상에서 ‘아’와 ‘비아’가 등장해 벌어지는 전략게임이다. 최근 1천만 접속자를 돌파할 정도로 젊은이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리니지는 게임에서의 세대간의 소통의 벽을 보여주는 게임 소프트웨어다. 한 예로 지난해 가상공간의 롤플레잉 게임인 리니지에서 일어난 범죄로 인해 경찰에 적발된 건만도 수십건이었다. 게이머들이 리니지에서 사용되는 가상 무기들을 폭력이나 해킹, 사기 등을 통해 획득해서 벌어진 문제다. 이런 사건은 인터넷으로 신문정보를 검색하는 세대들에게는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시키기 어렵다. 허구의 공간에서 싸우기 위해 현금거래를 한다는 발상 자체가 오프라인 세대에게는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이다. 사이버세계와 현실세계를 경계짓지 않고 자유롭게 넘나드는 세대들에게만 해독가능한 이야기다. 리니지 게임과 같은 머그 게임(멀니 유저 그래픽 게임)은 유저들에게 일상생활과 별다를 바 없는 또 하나의 ‘사회생활’이다. 자신을 성장시킬 수 있고 아이템이나 돈을 모아 집을 마련하거나 마음에 드는 상대와 결혼할 수도 있다. 게다가 게임 속의 자신을 상징하는 캐릭터인 ‘아바타’는 현실에서는 표현하지 못했던 나의 모습을 더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다. 그렇게 때문에 범죄나 일탈도 가능하다. 그러다 피할 수 없는 궁지에 몰리면? 로그오프를 하면 된다. 더이상 매력적일 수 없는 것이다. 게임평론가 박상우씨는 젊은이들이 게임에 열광하는 이유를 “자신이 게임의 캐릭터가 돼서 새로운 세계에 몰입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죽으면 새로 시작하지’라고 단순하게 생각하던 이전의 게임자들과 가상공간에 대한 사고 자체가 다를 수밖에 없다. 캐릭터(아바타)를 자신과 동일시하기 때문에 “시스템을 중요시했던 올드 게이머에 비해 젊은 세대들은 그래픽이나 연출을 중요하게 여긴다”고 한다. 같은 온라인 게임 세대라도 세대간 취향의 격차는 크다. 20대 이상이 ‘스타크래프트’ 같은 복잡한 전략시뮬레이션 게임을 즐기는 반면, 10대들은 ‘디아블로’나 ‘창세기전’ 같은 롤플레잉 게임을 좋아한다는 것이 특징이다.
유희를 위한 유희, 메시지는 없어진다
게임의 미학이나 세계관은 영화뿐 아니라 만화나 소설 같은 장르로도 빠르게 퍼져나가고 있다. 만화에서 말풍선 속의 글이 이전에 비해 현저히 줄어든 사실은 이제 더이상 대사의 묘미가 젊은이들에게 큰 매력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때 세대를 막론하고 사랑을 받았던 고우영씨나 김수정씨 만화는 전성기의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현재 스포츠지에 만화를 오래간만에 다시 연재하고 있는 김수정씨는 “나는 만화의 전개에 있어 결과가 있으면 수긍할 만한 이유를 뒷받침하는 이야기의 논리성에 집착하는 반면 요즘 젊은이들은 감성적인 부분을 논리적 당위성 위에 놓는다”면서 젊은 세대와의 간격을 “극복하기 힘들다”고 토로했다. 또 “이전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를 많이 따졌는데 젊은 독자들은 지금 보는 작품의 재미만을 중요시하는데 이런 면들을 봤을 때 세대차이를 크게 느낀다”고 말했다. 만화잡지 <부킹>의 편집장을 지낸 학산문화사의 박성식 차장도 “20대 초반 이하는 작가의 이름을 거의 따지지 않고 마음에 드는 그림을 골라보기 때문에 이현세나 허영만, 황미나 등 스타작가의 이름은 이제 독자들 사이에 별로 의미가 없다”고 세대간의 차이를 진단했다. 말이 줄고 스토리가 단순해진 대신 그래픽(그림)이 만화선택의 중요한 요건이 됐다는 것은 젊은 만화독자들을 나이든 독자들과 구별짓는 특징이다. 최근 젊은 독자들에게 인기있는 만화들은 한결같이 비주얼적인 측면에서 예전 만화들보다 훨씬 디테일한 것들이다. 스토리 전개는 그 다음이다. 최근 청소년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던 만화 <힙합>의 내용은 주인공의 춤대결이라는 단순한 구도였지만 페이지마다 이어지는 힙합춤의 세부적인 묘사로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다. 스토리보다 그림과 캐릭터가 중요하고, 캐릭터 역시 사실적인 묘사보다는 왜곡된 형태의 극단적 양식이 어린 연령층에서 선호되는 것은 게임의 특징과 같은 맥락이다. 메시지를 거부하고 자기애 성향이 강한 신세대의 문화적 코드는 이른바 순수소설이라는 고전적 문화장르에까지 침투했다. 평론가 이명원씨는 “40대 중반의 교수가 백민석의 <내가 사랑한 캔디>와 <목화밭 엽기전>을 언급하면서 자신은 해독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면서 “문학에서도 세대간에 적대적인 벽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제목에서도 하위문화에 대한 거리낌없는 세대의 특성을 보여주는 백민석씨나 배수아씨 작품에는 루카치가 설파한 소설의 숙명적 낌새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나르시시즘과 쾌락주의는 이들 소설의 특징으로 루카치식 ‘리얼리즘’의 정반대인 오히려 판타지 세계에 가깝다. 이러한 신세대 소설의 흐름의 상류에는 80년대 후반에 등장한 장정일의 소설이 놓여 있다. 그러나 <내게 거짓말을 해봐>에서 쾌락지향적 태도를 보이면서도 아버지라는 억압적 기성문화에 대한 저항이라는 ‘계몽성’이 남아 있었던 반면, 백민석씨에 이르면 메시지는(어쩌면 의도적으로) 없어진다. ‘유희를 위한 유희’라는 젊은 세대 문화의 두드러지는 특징이 관통하고 있는 것이다.
랩, 아무리 연습을 해도…
스타일에 대한 매료는 대중음악에서도 젊은층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헐렁한 바지에 겹쳐 있는 티셔츠, 야구모자 등 힙합패션은 힙합음악보다 빨리 한국의 젊은이들을 장악했다. 물론 주류사회에 대한 분노라는 힙합음악의 메시지는 아직 한국에서는 자리잡지 못했지만 껄렁껄렁한 스타일에 웅얼거리는 랩은 젊은이들에게 빼놓을 수 없는 문화적 코드가 됐다. 기성세대가 랩에서 느끼는 이질감은 70년대 기성세대가 포크음악에 대해서 느꼈던 이질감보다 더 크고 적대적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아무리 연습을 해도 기성세대에게 랩은 ‘넘을 수 없는 벽’이기 때문이다. 문화의 세대간 단절은 이제 어떤 끈도 찾기 힘든 것 같다. 지난해 말 ‘30대 이상’과 ‘30대 이하’라는 해괴한 부문으로 나뉘어 방영됐던 ‘10대 가수 가요제’는 문화에 있어 세대간 단절이라는 현상이 극적으로 드러난 예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이 프로그램은 한 가족이 모여앉아 한해를 보내는 자리였다. 김건모, 신승훈이 사랑받을 때까지만 해도 올해의 가수왕이 누가 될까는 가족 모두의 관심사였다. 그러나 지난해 장르도 아닌 나이로 나누어, 합쳐질 수 없는 두 세계를 모은 방송사의 ‘배려’는 모두를 지루하게 할 뿐이었다. 젊은이들은 ‘따분하다’고 기성세대의 문화를 배척하고 기성세대는 ‘공허하다’고 젊은 감성의 문화를 야유한다. 요즘 젊은 세대들은 70∼80년대의 젊은 세대들처럼 반항하거나 반론을 펴지도 않는다. “왜?”라는 질문에 그들은 “그냥”이라고 ‘쿨’하게 대답한다. 그러나 대중문화담론의 역사는 따지고 보면 텅 빈 것처럼 보이는 유희에서 미학적, 사회적 지평을 발견해나가는 과정이었다. 이미 기성세대가 된 전문가들은 젊은이들의 문화가 ‘감각’이고 ‘포장’일 뿐이라고 비판하지만 이 역시 지금의 결론일 뿐이다. 난도질만이 난무했던 70년대 B급 공포영화가 사후에 ‘미국 중산층 이데올로기에 대한 부정’으로 격상됐듯이 요즘 젊은이들의 ‘목적없는 유희’에서 전문가들은 언젠가 새로운 지평을 발견할지 모른다.
구본준 기자 bonb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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