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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언론 향한 '커다란 족적' 젊은 논객에서 <한겨레> 창간까지… 현대사 연구에도 뚜렷한 성과 남겨
청암 송건호 선생은 1926년 충북 옥천에서 나 서울대 법대에 다니던 중 53년 대한통신사에 입사, 언론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서른셋의 젊은 나이에 <한국일보> 논설위원이 된 그는 젊은 논객으로 이름을 얻기 시작했다. <한국일보> <경향신문> <조선일보>의 논설위원 등을 거치며 <동아일보>로 자리를 옮긴 그는 72년 남북적십자회담차 평양을 방문한다. 당시 그는 국회에서 “북한 인민들의 김일성 주석 존경은 훈련돼서 일부러 그런 게 아니고 진심으로 우러난 것”이라고 했다가 적잖은 파문을 일으켰다. 엄혹한 시절에도 할말은 하는 강직한 선비가 바로 그였다.
할 말은 하는 강직한 선비의 표상
49살이던 74년 그는 <동아일보> 편집국장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그 무렵은 언론자유운동의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고 있던 때였다. 이듬해 이른바 ‘동아사태’가 터지면서 젊은 기자들이 강제해직되자 청암은 이에 항의해 스스로 편집국장직을 내놓는다. 23년간 몸담았던 제도언론을 떠나 재야언론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재야에 몸담게 된 청암은 언론자유를 위한 노력과 더불어 ‘한국현대사 연구자’의 길에 나선다. 헌책 한권 살 돈도 빠듯할 정도로 가난에 시달렸지만 그는 늘 고서점, 헌책방을 돌며 현대사 관련 자료를 모았다. 자료를 수집하면서 현대사 연구의 빈곤을 더욱 절실히 느낀 그는 분단 이데올로기로 뒤틀려 있던 역사를 바로 세우고 그때까지 텅 비어 있던 현대사를 채워넣는 작업에 나섰다. 틈나는 대로 대학에도 출강했으나 독재정권의 압력으로 그의 강의는 얼마 가지 못했다. 회유의 손길도 있었다. 청와대에서 몇 차례나 입각 제의가 있었지만 그는 이를 단호히 거절했다. 그의 현대사 연구는 ‘한길사 사상신서’ 1권인 <한국민족주의의 탐구>(1977년)로 첫 결실을 맺는다. 이 책은 신간회에 대한 연구 등 당시 현대사 연구에서 굵은 획을 긋는 서적이었다. 현대사 연구에 그가 남긴 뚜렷한 발자취는 이 밖에도 <해방전후사의 인식> <한국현대사론>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한국현대사> <민족통일을 위하여> <한국현대언론사> 등 20여권의 저작이 그대로 말해준다. 그가 기획한 <해방전후사의 인식>은 잊혀진 해방 공간에 민족주의의 빛을 비춰 읽어낸, 사회과학 출판계의 ‘하나의 사건’이었다. 특히 권두글로 실린 그의 ‘8·15의 민족사적 인식’은 대학생들이 밑줄쳐가며 읽은 ‘살아 있는 고전’이 됐다. 청암은 80년 신군부가 꾸민 ‘김대중내란음모사건’ 연루 혐의로 당시 치안본부(경찰청)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모진 고초를 겪고 6개월간 옥고를 치른다. 그는 군사재판에서 3년6개월의 형을 선고받고 2년형으로 감형됐다가 형집행정지로 석방된다. 그러나 군사정권의 탄압 속에서도 그는 독립언론의 꿈을 더욱 불태웠다. 84년 해직 언론인들이 만든 민주언론운동협의회 의장을 맡아 <말>을 발행하고, 86년에는 <말>을 통해 ‘보도지침’을 폭로했다. 보도지침은 당시 정보기관원들이 신문사에 출입하면서 특정 기사에 대해 어느 면에 몇단 크기로 넣으라고까지 간여했던 일종의 보도통제 지침이었다. 당시 폭로로 보도지침이 없어진 것은 물론이다.
고초와 시련의 나날에도 소망 일궈내
그리고 87년 독립언론을 향한 그의 꿈은 국민주신문 <한겨레신문>의 창간 주도로 불꽃을 피웠다. 자칫 무모한 것으로 비쳤던 <한겨레> 창간은 당시 민주화의 열기를 업고 성공했다. 그는 초대 사장과 회장 등을 거치면서 <한겨레>를 탄탄한 기반 위에 올려놓는 데 성공했으나 개인적으로는 불행이 찾아왔다. 80년 고문의 후유증이 심해지면서 94년 현직에서 은퇴했다. 그뒤로는 병마와의 외롭고 긴 싸움이었다. 온몸이 마비되는 파킨슨병으로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언론과 역사가 만나는 지점에 우뚝 선 ‘독립지성’이었던 그는 이렇게 인생의 마지막 7년을 병상에서 보내야 했다.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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