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집 ] 2001년12월26일 제390호 

참언론인, 송·건·호

민족주의와 독립언론을 평생의 화두로 삼고 살았던 우리 시대 불굴의 지성



그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그 어떤 물질적 유산이나 허명, 권력의 흔적까지도. 심지어 일생 동안 분신처럼 아끼던 1만5천여권의 소장 도서들조차 그의 곁을 떠난 지 오래다. 그가 남긴 것은 이름 앞에 붙은 ‘참언론인’이라는 수식어 뿐이다.

고문 후유증으로 인한 파킨슨병 증후군으로 한겨레신문 회장을 물러난 지 8년여 만인 2001년 12월21일 그는 서울 은평구 역촌동 자택에서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1925년 충북 옥천의 산골에서 태어나 대한통신 외신부 기자, 동아일보 편집국장, 15년의 재야생활, 한겨레신문 회장에 이르기까지 파란 많은 이력을 마감한 것이다. 오랜 기간 병마와의 싸움 때문일까? 송건호 이름 석자를 기억하는 젊은이들은 많지 않다. 특히 올 한해 한국사회를 뒤흔들었던 언론개혁의 거센 바람이 그로부터 시작됐다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에게 잊혀진 역사다.

고문 후유증으로 병석에

2001년 6월 정부가 사상 처음으로 언론사 세무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대주주들을 조세포탈 혐의로 구속했을 때 그는 병석에 누워 있었다. 한마디 말도, 손짓도 하지 못하는 전신마비의 상태로. 그가 일생을 통해 추구했던 언론개혁의 현장 앞에서 그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아마도 일생 동안 입으로 되뇌었던 ‘민족주의’와 ‘독립언론’이었을 것이다.

지난 74년 10월. 동아일보 편집국장 시절, 교문을 박차고 뛰쳐나온 경기도 수원 서울농대의 민주화 요구 시위가 있었다. 기관원의 압력을 무시하고 기사를 내보낸 그는 정보기관에 연행됐고, 이는 편집국 기자들의 자유언론선언을 촉발하는 기폭제가 됐다. 유신체제의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 이렇게 해서 동아·조선 기자들의 언론자유운동은 시작됐고 그 결과는 160여명에 이르는 두 회사 기자들의 대량해고로 이어졌다. 동아·조선 두 회사가 권력의 핍박과 재벌들의 광고 탄압에 굴복하고 자유언론선언 기자들을 거리 밖으로 몰아낸 것이다. 그는 스스로 사표를 던졌다. 누가 강요해서가 아니다. 언론자유를 외치는 후배 기자들이 죄없이 희생당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어 30여년 동안 몸담았던 언론계를 박차고 떠났다.


사진/ 50여년을 언론인으로 올곧게 살아온 송건호 선생은 생활고에 시달리는 날들이 많았다. 현직 언론인으로 있던 당시의 가족사진.


언론인 송건호의 이름 석자는 이때부터 세상에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10여년에 걸친 가난과 핍박 속에서 그는 참언론인으로, 나아가 양심적인 민족 지성의 표상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그는 암울했던 박정희 정권 말기 재야인사로서 누구보다도 열심히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다. 그러나 투사는 아니었다. 사상가도 아니었다. 오로지 바른 언론의 한길을 걸어간 언론인이었다. 특히 송건호라는 이름이 무게를 더하는 이유는 어떤 가식과 과장도 없는 진실된 삶이 있었기 때문이다. 민주언론운동협의회의 최민희 사무총장은 “언론자유와 민주화를 위해 뛰었던 어떤 사람보다 말과 행동과 생활이 일치하는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현란한 수사와 온갖 주의, 주장이 난무하는 언론계에서 말보다는 행동으로, 더 근본적으로는 생활 속에서 참언론인의 모습을 실천해온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가 평생에 걸쳐 매달려온 화두는 ‘민족주의’와 ‘독립언론’이었다. 이 두 가지가 우리에게 던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는 왜 민주언론이나 민족언론, 진보언론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고 독립언론이란 표현을 썼을까? 그가 떠난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런 의문이 남는다.

그가 말하는 민족주의는 사상이라기보다는 올바른 역사의식이었다. 동아일보를 마지막으로 제도언론을 떠난 이후 한국 현대사 연구에 매달렸던 것도 이 때문이다. 역사의식이 없는 기자, 그리고 이들이 만들어내는 언론이 얼마나 무책임하고 위험한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신과 철학이 있는 독립언론 꿈꿔


사진/ 끝내 일어서지 못한 송건호 선생. 고문 후유증으로 파킨슨병을 앓던 선생은 1999년 정부로부터 금관 문화훈장을 받았다.(이정용 기자)


그는 특히 조직의 일원으로서 기능화되어가는 기자의 모습을 경계했다. 소신과 철학없이 하루하루 표변하는 기자, 진실 보도보다는 개인적인 출세와 야망에만 관심을 두는 기자, 그리고 이를 아무 일 없었던 듯이 받아들이는 언론. 그는 여기에 경종을 울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80년대 후반에 저술한 ‘제도언론에서 독립언론으로’라는 글에서 “70년대에 유신만이 살길이라고 떠들던 언론계가 10·26 이후 너도나도 새 시대, 새 질서를 외치기 시작했다”며 “단 몇 사람만이라도 그래도 유신만이 살길이라고 고집하는 언론인이 나왔다면 좋았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물론 유신을 찬성했기 때문은 아니다. 소신과 철학이 없는 무책임한 언론을 지적했던 말이다.

그는 이러한 입장을 삶 속에서도 그대로 실천했다. 큰아들인 준용씨는 “아버지는 평소 역사의 진실이나 사회의 논리보다는 인생의 올바른 자세가 앞서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말한다. 결코 어떤 주의나 주장을 앞세우지 않았던 그의 태도를 여기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가 재야활동을 하면서 몰두했던 민족주의에 대한 연구도 마찬가지였다. 언론이 가져야 할 올바른 역사의식의 해답을 거기서 찾은 것이다. 그는 <해방전후사의 인식>에서 “민중이 주체로서 역사에 참여할 때만 민족의 자주성이 실현되며, 민주주의도 꽃핀다”는 나름대로의 역사관을 강력히 피력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지사적인 양심과 역사의식만으로 언론이 바른길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항상 언론이 바로 설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건을 문제삼았다. 바로 권력과 자본으로부터의 독립이다. 70년대 유신체제 아래서는 권력으로부터의 독립, 80년대 이후 체제를 옹호하는 기관으로 변질해가는 언론의 모습을 바라보면서는 자본으로부터의 독립이 그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언론이 제구실을 하기 위해서는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는 너무나 상식적이고 당연한 주장이다. 그래서일까? 그를 제외한 대부분의 언론인들이 독립언론이란 말을 쓰지 않는다. 오히려 민주언론, 민족언론, 진보언론이란 말들이 우리 귀에는 더 친숙하다.

굴하지 않는 철학, 일상에서 실천


사진/ 진정한 독립언론을 향한 집념으로 창간을 주도한 <한겨레>. 송건호 선생이 1988년 5월15일 <한겨레> 창간호를 살펴보고 있다.


그는 언론을 제도언론과 독립언론으로 구분한다. 체제를 옹호하고 그 체제의 일원으로 편입되고자 하는 대부분의 언론이 제도언론이다. 독립언론은 물론 어떤 집단의 영향도 받지 않는 언론 본연의 길을 가고자 하는 언론일 것이다. 해직기자 출신인 김언호 한길사 대표는 “송건호 선생은 항상 언론이 어느 당파나 집단에 소속되지 않고 독자적으로 자기 길을 걸어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회고했다. 그의 이러한 언론관은 언론개혁이 최대의 사회적 현안이었던 2001년을 되돌아볼 때 더욱 그 가치를 느낄 수 있다. 과연 언론개혁의 목표가 무엇인가에 대한 혼선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민주언론과 민족언론을 얘기한다. 또다른 사람은 진보언론을 얘기한다. 그런 점에서 독립언론은 이 모든 언론개혁 논의의 중심에 위치하는 개념일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독립언론의 철학을 구체적인 삶 속에서 그대로 실천해왔다는 사실이다. 그는 항상 어떤 사상적 지향이나 이념적 방향보다는 기본적인 태도를 중요하게 봤다. 그가 민족주의을 강조한 것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기자들의 올바른 태도와 역사의식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언제나 주위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해왔다. “운동을 하려면 무엇보다 가난과 핍박을 이겨낼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고.

실제로 그는 평생을 그리 넉넉하게 살지 못했다. 현직에 있을 때도 아는 사람이 찾아오면 돈이 없어 다방에 가기 힘들 정도였다고 그는 토로했다. 그가 회갑기념 논문집에서 쓴 ‘고행 12년, 이런 일 저런 일’에는 쇠고기와 관련된 얘기가 나온다. “30대에 쇠고기를 무척 먹고 싶었으나 돈이 없어 사먹지 못하다가 40대가 되어 이름이 알려지고 수입이 늘어나 생활이 안정되고 쇠고기를 먹을 만하니까 회사를 떠나게 됐다. 나는 쇠고기와는 인연이 없는 것 같다.” 동아일보를 그만둔 뒤 재야생활을 하는 동안의 경제적 고통은 그보다 훨씬 컸다. 대학생에서부터 초등학생까지 6남매를 둔 가장으로서 거리에 나앉게 된 이후의 생활고와 불안감을 그는 ‘죽음의 공포’라고까지 표현했다.


사진/ 송건호 선생은 1만5천여권의 소장도서들을 한겨레신문사에 기증했다. 1996년 9월 한겨레신문사 자료실에 개설된 '청암문고'


그가 독립언론의 꿈을 키운 매체는 있었다. 현재의 월간지 <말>과 <한겨레신문>이다. 해직기자들의 모임인 민주언론운동협의회 기관지였던 <말>은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독립한 최초의 독립언론의 시도였다. 물론 대중적 매체로서는 일정한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시도했던 <한겨레>는 아직 진행형이다. 한겨레는 1988년 민주화의 열기 속에서 국민주 모금을 통해 설립한 회사로 어느 정도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한겨레>가 과연 그가 꿈꾸던 진정한 독립언론으로 우뚝 서 있는가는 의문이다. 특히 자본으로부터의 독립은 그가 추구했던 독립언론의 모습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마지막으로 혼신의 열정을 불태웠던 <한겨레>는 하나의 시험을 거치고 있다. 그의 독립언론에의 시도 역시 미완의 과제로 남아 현실 속에서 시험받고 있는 것이다.

못다 이룬 그의 꿈을 어떻게 이룰 건가

그가 세상을 떠난 12월21일은 공교롭게도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지 만 40년이 되는 날이다. 진보적인 언론을 세우려 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31살의 젊은 나이에 박정희 정권에 의해 세상을 떠난 조용수 사장은 그 짧았던 언론인으로서의 생활에도 불구하고 한국 언론사의 한장을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한평생을 독립언론의 꿈으로 살아온 송건호 선생은 한국 언론사에 어떻게 기록될까? 현직 언론인으로서 30년, 재야 언론인으로서 20년. 50년 가까운 세월을 참언론 하나만을 위해 걸어온 그의 삶은 앞으로 한국에 진정한 독립언론을 꽃피우는 보이지 않는 저력으로 평가받아 마땅하지 않을까….

정남기 기자 jnamk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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