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집 ] 2001년12월26일 제390호 

우리의 희망, 우리의 스승

지인들이 말하는 ‘나와 송건호’


사진/ (한겨레 곽윤섭 기자)


요구르트를 챙기던 순박한 벗

이호철/ 소설가

우리는 40년지기다. 조용한 성격 탓일까. 송건호 형과 나는 유난히 가까웠다. 송 형이 여섯살 위였지만, 벗으로 지내는 데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우리가 가까워진 것은 80년 ‘김대중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되면서다. 안기부 지하 밀실에 끌려갔을 때, 그는 내 옆방에서 심문을 당했다. 취조를 당한 뒤 지하 감방으로 들어오던 그의 모습이 선하다. 나를 보고도 못 본 체 고개를 떨구던 모습. 참 어리숙하면서도 순박해 보였다. 꼭 야단 맞고 벌 서러 들어오는 초등학생 같았으니까.

감옥에서 나온 뒤, 우리는 함께 산을 탔다. 83년 민주화 운동에 관여하던 몇명이 뜻을 모아 산악회를 만들었다. 이름은 그냥 ‘거시기 산악회’였다. 송건호 형은 산에 오르길 좋아했다. 그의 등산배낭 속에는 항상 같이 등산하는 사람의 숫자만큼 요구르트가 들어 있었다. 산에서 내려오면 그 요구르트를 나눠주곤 했다. 요즘도 우리는 “송건호씨 요구르트 없으니까 허전하네…”라고 아쉬움을 달래곤 했다. 그의 마음 씀씀이가 사무친다.



사진/ (한겨레)


노여움도 모르던 세심한 선배

이어령/ 중앙일보 고문

송건호 선생은 나에게 세상 보는 눈을 길러준 언론사 선배였다. 60년대 중반 경향신문에 논설위원으로 함께 있었다. 나는 문학에 밝은 사람이지 정치사회를 보는 눈은 어두웠다. 송건호 선생을 통해 신문 글쓰기를 배웠고, 사회와 정치를 보는 눈을 길렀다. 그는 당시 필화사건에 휘말리지 않도록 내 기사를 보고 항상 조언해주는 세심한 선배였다.

70년대 초 필화사건으로 안기부에 끌려가서 조사를 받을 때 일이다. 송건호 선생도 옆방에 있었다. 나를 취조하던 형사가 대뜸 “송건호란 사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왔다. 내가 머뭇거리자 그는 “사람도 아니다”면서 말을 풀어놓았다. 취조를 당하면 대개 밥을 못 먹게 마련인데, 그는 한 그릇을 말끔히 비우고, 한 그릇 더 내놓으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가 노여워하는 모습을 딱 한번 본 적이 있다. 경향신문 주필이 무슨 이유에선지 송건호 선생을 타박하곤 했다. 그래도 그는 항상 웃는 낯으로 넘겼다. 어느날 주필이 별일 아닌 것으로 핀잔을 주었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지 그가 논설위원실 밖으로 뛰어나갔다. 잠시 뒤 밖에서 “아무개 나쁜 사람!”이라는 고함이 들려왔다. 그는 화가 났을 때도 고작 “나쁜 사람”이라는 말밖에 할 줄 몰랐던 것이다. 그처럼 때묻지 않은 사람이었다.



사진/ (한겨레)


고서점 드나들던 타고난 선비

한승헌/ 변호사

우리는 거리에서 정든 사이다. 60년대부터 서로 안면은 있었지만, 75년 동아일보 해직 사태 뒤부터 가깝게 지냈다. 화려한 카리스마나 현란한 제스처는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저 조용히 공부하고 실천했던 분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군사정권에 대한 울분을 토할 때면 ‘과연 그 사람 맞나’ 싶게 거침이 없었다.

집회나 행사가 끝난 뒤 귀갓길에 자주 동행하곤 했다. 둘 다 은평구에 살았기 때문이다. 타고난 학자였던 그는 항상 책을 품고 다녔다. 궁핍한 시절에도 고서점과 책방을 돌아다니며 책을 사모으는 일은 그의 유일한 낙이었다. 하루는 집에 들어가기 전 책을 외투 안쪽에 깊숙이 숨기는 모습을 보았다. “왜 그러시느냐?”고 물었더니 “마누라 보기 미안해서”라고 답했다. 책 사는 돈도 아껴야 할 만큼 어려운 형편이었던 것이다.

80년 ‘김대중내란음모사건’에 연루돼 옥살이를 하고 나갈 때의 모습을 잊지 못한다. 다른 사람보다 조금 일찍 풀려난 그는 석방되면서 무척이나 미안해 했다. 일일이 감방을 찾아다니면서 인사를 챙긴 것은 물론이다. 어찌나 미안해 하는지 마치 죄라도 지은 사람 같았다.



사진/ (한겨레)


역사의식 심어준 영원한 학자

김언호/ 한길사 대표

송 선생은 대학생이나 목회자를 대상으로 강연을 하면서 항상 민족주의 정신을 심어줬다. 송 선생은 현대사 관련 자료를 모으러 여기저기를 찾아 헤맸다. 그래서 만나려면 주로 교보문고나 인사동 고서점 거리로 가야 했다. 그렇게 모은 책이 1만5천여권이나 된다.

74년 ‘10·24자유언론실천선언’ 무렵이었다. 유신 폭압에 맞서 재야인사들이 결성한 ‘민주회복국민회의’가 유신철폐선언을 했는데, 당시 <동아일보> 편집국장이던 송 선생이 이 기사를 1면에 올렸다. <신동아>에 있었던 나도 그렇게까지 크게 나갈지는 미처 몰랐다. 작은 기사로 처리하자는 얘기도 있었지만 송 선생이 “무슨 소리냐, 1면으로 올려야지!” 하면서 큰소리를 냈던 기억이 있다. 당시 반유신운동을 지핀 결정적 계기가 된 기사였다. 이듬해 <동아일보> 편집국장직을 그만둔 데 대해 송 선생은 “그때 젊은 언론인들과 함께 나선 것을 행복하게 여긴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언론인으로서 송 선생은 치열한 역사의식을 갖고 있는 분이었다. “진정한 언론인이라면 당대에 일어나는 사건을 어떤 역사적 관점에 따라 판단할 것인지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고 늘 말하곤 했다.



사진/ (한겨레)


타협을 모르던 지사적 언론인

박권상/ 한국방송 사장

어둡고 어려웠던 시절을 함께했던 언론계 동지였다. 68년 가을, <신동아> 사건으로 <동아일보>가 풍비박산이 난 뒤 송건호 형은 <조선일보>에서 <동아일보>로 옮겨왔다. 첫눈에도 꼿꼿한 선비 같았지만, 결코 융통성이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70년대 초 약 3년 동안 편집국장으로 일하던 시절 논설위원으로 일하던 송 형은 자주 편집국에 들러 “박형, 너무 세게 하지 말고 적절히 비판해. 그래야 오래 갈 수 있어”라고 격려하곤 했다. 87년 5공 말기에 월간 <말>의 보도지침 사건 증인으로 둘이서 함께 법정에서 검사와 3시간에 걸쳐 설전을 벌였던 기억이 생생하다.

우리 세대 언론인은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현실에 적당히 물드는 사람, 그리고 불의와 타협을 거절하는 부류가 있다. 송 형은 지사적 언론인의 전형이었다. 그는 항상 책을 읽고, 글을 쓰고, 고민하는 사람이었다. 시대가 그에게 조직을 이끌게 했지만, 그의 몸에 꼭 맞는 옷 같지는 않았다. 한겨레신문사 사장 시절에도 경영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나는 경영은 잘 몰라”하며 넘기곤 했다.



사진/ (한겨레)


어른으로 섬기며 친구처럼 지내며

김정환/ 시인

송건호 선생과는 28살 차이다. 그러나 우리는 ‘친구’처럼 지냈다. 그만큼 소탈하고 격의없는 분이었다. 송건호 선생을 처음 알게 된 것은 80년대 초 자유실천문인협의회 활동을 하면서부터다. 당시 문인협의회는 민주언론운동협의회와 같은 사무실을 썼다. 나는 자실의 상근자였고, 송건호 선생은 민언협 대표여서 자주 뵙게 된 것이다. 당시 송건호 선생은 이미 천하의 어른이었고, 나는 서른이 채 안 된 청년이었다. 그런데도 나를 “김정환 형”이라고 불렀다. 비단 내게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후배들에게 항상 존칭을 썼다.

그러나 자신의 뜻에 맞지 않으면 단호하게 호통도 쳤다. 한때 자실의 청년들이 가수 이연실씨와 어울린 적이 있다. 주말이면 이씨를 쫓아다니며 노래를 듣고, 술도 얻어먹었다. 우리는 놀러 갈 때마다 재미삼아 민주화 운동하는 어른들께 함께 가자고 제안하곤 했다. 원로 소설가, 운동가, 해직기자 가릴 것 없이 모두 따라 나섰다. 그러나 딱 한분 우리가 ‘꼬시는 데’ 실패한 어른이 있다. 송건호 선생이다. 겨우 이씨가 노래부르던 술집까지는 모시고 갔는데, 들어가자마자 송 선생이 “뭐하러 이런 데 오느냐”며 호통을 치셨다.

정리=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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