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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관계 돌파구 생길 것” 박재규 전 통일부 장관이 털어놓는 남북관계의 과제와 전망
박재규 전 통일부 장관은 남북정상회담 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으면서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비롯해 1차부터 4차까지의 장관급회담을 통해 남북간의 주요 합의를 이끌어 낸 장본인이다. 그는 “DJ의 대북정책이 지금 봐서는 약간 어려움에 처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현상이기 때문에 국민들은 인내심을 갖고 지켜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금강산 사업 중단은 안될 말
지금 남북관계가 진전되지 않는 이유를 무엇이라고 보는가. =두 가지 걸림돌 때문이다. 북-미관계와 금강산관광사업이다. 내가 알기로는 북-미관계는 우려와 달리 서로가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알고 있는데다가, 서로가 대화와 관계개선을 원하고 있기 때문에 파국으로 치닫지는 않을 것이다. 금강산 관광사업도 마찬가지다. 이는 남북한 당국과 기업 모두가 잘되기를 바라는 사안이다. 특히 이 사업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체면과도 관련이 있기 때문에 북한 당국도 어떻게든 돌파구를 마련할 것이다. 금강산 관광사업을 중단하라는 목소리가 높다. 방안은 있는가. =중단은 안 된다. 국민적 지혜를 모아야 한다. 남북한 당국이 현대아산과 함께 장기적 안목에서 한발씩 양보해 새 계약서를 맺어야 한다. 다국적기업이 참여하는 형태의 사업이 돼야 돌파구가 열릴 것으로 본다. 애초 현대아산이 북한과 계약을 맺을 때는 금강산 관광의 희소가치가 매우 높았기 때문에 매년 50만명 정도는 관광을 할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지난 3년간 관광객 수는 43만명에 그쳤다. 계약수정이 불가피하다. 김대중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우리가 너무 서둘면 안 된다. 이러면 북이 오히려 부담스러워서 거부할 가능성이 높다. 북한과의 협상은 첫째도 인내요, 둘째, 셋째도 인내를 필요로 한다. 애초부터 인내할 생각이 없으면 아예 북한과는 아무것도 안 하는 게 낫다. 따라서 지금와서 단기적 관점에서 정책의 잘못을 따진다는 것은 성급한 판단이라 생각된다. 반세기 동안 체제를 달리해온 북한을 상대로 화해협력을 통해 평화공존의 토대를 마련하여나간다는 것은 우여곡절이 따르고 많은 인내심과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6·15 공동선언은 최선의 합의
그렇다면 DJ 대북정책의 성과를 꼽는다면. =뭐니뭐니해도 6·15 남북정상회담을 통해서 남한의 대북화해협력정책을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알리고 이해시킨 것이다. 결과적으로 남북관계를 냉전적 대립관계에서 화해협력관계로 전환시키는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솔직히 지난해 남북정상회담은 엄청난 이벤트였지 않느냐. 남북한 사이에 50여년 동안 막혔던 것들이 한꺼번에 봇물처럼 터져나온 것 아니냐. 이때의 모멘텀을 살려나가야 한다. 6·15 남북공동선언을 어떻게 평가하느냐. 최선의 합의였다고 생각하는가. =6·15 공동선언은 역사적인 첫 만남에서, 그리고 극히 짧은 시간에 도출한 최선의 합의라고 생각한다. 공동선언은 평화통일을 이룰 때까지 남북이 화해·협력해가자는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서로 부담이 될 대목은 없다고 생각한다. 특히 김정일 위원장의 서울답방은 적절한 시기에 이행하겠다고 약속한 사항으로 반드시 지켜질 것으로 본다. 통일부 장관으로 있을 때 대북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는 무엇이 가장 어려웠나. =남북관계가 빠르면 빠르다고, 늦으면 늦다고, 또 뭔가 갖다주면 너무 퍼준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처럼 국내에서 남북관계를 긴 안목으로 보지 않고, 너무 성급하게 성과를 요구하는 여론 때문에 결집력이 약화되고, 공감대를 형성하는 게 어려웠다. 또 남쪽이 일관성 있는 정책을 추진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상응하는 북한의 변화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점도 아쉽다. 실제적으로는 지난 99년 6월 금강산 관광 유람선 금강호를 띄울 때 서해교전이 터져 배를 띄울까 말 것인가를 놓고 정말 힘들었다. 정부의 대북정책이 이전 정부와 다른 점을 꼽는다면. =이전 정부에서는 사실상 동구 공산권의 붕괴와 동독을 흡수한 독일 통일의 영향을 받아 흡수통일을 바탕으로 한 대북정책을 폈다. 하지만 현 정부는 화해협력을 통해 평화공존을 추구하는 데 역점을 두고 있다. 그리고 변화무쌍한 국제정세나 남북관계에도 불구하고 흔들림 없이 일관성 있는 정책을 폈다는 점도 평가하고 싶다. 이는 북한은 물론 국제사회에서의 신뢰성을 확보하는 데 큰 보탬이 됐다. 이른바 ‘햇볕정책’의 유용성은. =최근 미국의 반테러 전쟁으로 인해 만들어진 국제사회의 긴장에도 불구하고, 과거와 달리 한반도에 평화가 유지되고 있는 것은 대북정책이 추구한 평화과정(Peace Process) 때문이라고 본다. 교류협력이 꾸준히 이뤄져 올해 남북을 오간 사람은 7500여명으로 이전 9년간에 걸친 2400여명에 견줘 3배나 늘었다. 나아가 북한이 대부분의 유럽연합(EU) 국가들을 포함하여 서방국가들과 외교관계를 맺는 것도 화해협력정책의 간접효과이다.
북한도 변하고 있다
북한이 변했다고 보는가. =북한은 공식적으로는 사회주의 체제 고수를 강조하고 있으나 최근 수년 사이 경제난 극복을 위해 현실주의적 변화를 모색해왔다. 올 들어 ‘신사고’에 바탕을 둔 의식전환 캠페인까지 전개하고 있다. 경제 관리면에서도 실용주의 정책을 대폭 확대하고 있다. 이런 변화를 서구적 관점에서 보면 과소평가될 수 있으나, 북한체제의 특수성을 감안하면 매우 의미있는 진전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최근 여러 부문에 걸쳐 진행되고 있는 변화의 양적 확대는 질적 변화에도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본다. 정부가 남은 1년을 어떻게 마무리하는 게 가장 바람직하다고 보는가. =욕심을 내서는 안 된다.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한 이후의 국제질서 흐름과 한반도의 역학관계를 고려해볼 때, 한반도에서의 평화와 통일을 일구어가는 길은 남북화해협력정책의 지속적인 추진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 앞으로 남은 1년을 인내심을 갖고 대북화해협력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해야 한다. 다만 새로운 성과의 도출보다는 6·15 공동선언 이후 남북간에 이미 합의되었으나 미이행된 사안들을 쉬운 것부터 점진적이고 단계적으로 실천할 수 있도록 북쪽과 협의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대북정책은 어디까지나 북한이라는 어려운 상대가 있기 때문에 성급한 기대나 성급한 실망은 금물이다.
임을출 기자 ch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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