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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눈물 맺인 약자의 안식처 국가인권위 접수창구에 비친 오늘의 인권… 사회적 울분 해소하며 인권지수 높여
“면허문제 고발 대상은 경찰청인가요 아니면 행정자치부인가요?” “일단 진정서를 제출하시면 조사관이 알려드릴 겁니다.” 2001년 12월6일 오후 3시30분, 서울 종로구 이마빌딩 501호의 국가인권위 진정서 접수 창구에는 뜻밖에 정적만이 흘렀다. 한참 동안 필담이 오고간 끝에, 청각장애인 정아무개(28)씨는 “청각장애인에게 1종 대형면허를 발급해주지 않는 것은 차별행위”라는 요지의 진정서를 냈다. 그는 “진정서를 접수할 청각장애인들이 많다”며 진정서를 한 움큼 쥐고 접수처를 빠져나갔다. 접수처 직원들은 한산한 접수 대기석을 가리키며 “이미 (접수자들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가서 그렇다”고 말한다.
반세기 동안 눈감아온 인권침해들
국가인권위원회 진정서 접수 창구는 한국사회의 인권 지도를 조망하는 망원경이다. 11월26일 업무를 시작한 국가인권위 진정접수처에는 온갖 억울함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다. 천장까지 닿는 검은 만장에 억울한 사연을 빼곡이 적어와 하루 종일 들고 서 있는 중년 아저씨, 새벽 댓바람부터 지방에서 올라온 노인들…. 밀려드는 사연 속에는 한국사회가 반세기 동안 눈감아온 인권침해의 어제와 오늘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11월26일부터 12월8일까지 국가인권위에 들어온 진정접수 및 상담은 총 1603건에 이른다. 이중 682건이 진정접수였고, 국가인권위원회의 업무영역과 진정절차 등을 묻는 상담은 921건이었다. 숱한 진정접수자는 국가에 의해 인권을 침해당한 피해자들, 장애인 등 차별행위를 당한 소수자들로 크게 나뉜다. 10월26일, 동성애자 정아무개(23)씨는 군복무중 당한 차별행위를 진정했다. 정씨의 주장에 따르면, 그는 스스로 동성애자임을 밝히자 국군 창동병원에 보내졌다. 그러나 그곳에서 잇단 차별행위를 당했다. 입원 첫날, 발가벗겨진 채 신체검사를 받는 과정에서 군의관이 들어와 “누가 호모야?”라며 수치심을 일으키는 질문을 던진 것이다. 그뒤 그는 정신과로 보내졌고, 밤에는 감방과 다를 바 없는 독방에서 자야 했다. 정씨는 “성적 소수자들은 차별법도 보호법도 없는 상황 속에서 차별에 시달려왔다”면서 “인권법에 최초로 명시된 차별금지조항은 성적 소수자들에게 큰 보호장치가 된다”고 기대감을 나타냈다. 첫날 이주노동자 10여명이 “제발 때리지 마세요”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진정을 접수한 이래로 차별행위에 대한 진정접수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장애인, 동성애자 외에도 지역, 종교, 전과, 병력(病歷) 등에 의한 차별사례가 접수되었다. 국가인권위 사무처준비위 조용환 변호사는 “정치적 이유로 인권침해를 당한 피해자들은 이미 의문사진상규명특별위원회나 민주화운동보상추진위원회로 많이 갔고, 여성차별도 남녀차별금지법으로 처벌이 가능하다”면서 “소수자 인권문제야말로 국가인권위가 개척해야 할 불모지”라고 밝혔다. 국가인권위가 큰 역할을 담당할 인권의 사각지대로는 장애인 기관으로 대표되는 ‘다수인 보호시설’이 있다. 다수인 보호시설은 대개 민간에 위탁돼 있어 인권보호가 소홀하기 십상이다. 게다가 장애인들의 신체적 특성상 인권침해를 당해도 밖으로 호소할 길이 막막하다. 국가인권위 사무처 준비단 남규선 홍보팀장은 “아직 다수인 보호시설에서 들어온 진정접수건은 없다”면서도 “열흘 넘게 접수된 진정이 한건도 없다는 사실은 오히려 다수인 보호시설의 열악한 인권환경을 방증하는 것 아니냐”고 지적한다. 아예 국가인권위에 진정조차 내기 어려울 만큼 고립돼 있다는 얘기다. 이런 점에서 국가인권위가 방문조사권을 발동해 다수인 보호시설을 조사하게 되면, 획기적인 인권개선이 예상된다. 소수자에 대한 차별행위가 새롭게 떠오르는 인권영역이라면, 공권력에 의한 인권침해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는 고질적인 병폐다. 국가권력에 의한 인권 침해를 나눠보면, 수사과정에서의 고문 또는 가혹행위 사례가 가장 흔하고, 체포과정에서의 불법적인 절차로 인해 인권침해를 당했다는 진정도 잇따르고 있다.
여전히 지속되는 공권력의 고질적 병폐
다음날 관할경찰서 청문감사관이 찾아와 “경찰서장와 전경 중대장 등 여럿이 징계를 받으니 합의하자”고 종용했다. 그러나 하루 뒤 찾아온 청문감사관의 태도는 돌변해 있었다. 그는 이씨의 언니에게 “이양이 버스 위에서 시위를 주동하는 필름이 있다”며 “감옥 가게 생겼으니 어디 있는지 알려달라”고 윽박질렀다. 이씨는 통증이 도져 입원한 상태였다. 위기감을 느낀 이씨는 서울지방경찰청에 고소했다. 고소인 진술과정에서도 인권침해는 이어졌다. 이씨는 “경찰 4명과 대질신문을 받으며 일방적으로 불리한 진술을 강요받았다”고 주장한다. 이씨의 경우처럼, 경찰과 검찰의 수사과정에서 일어난 가혹행위와 잘못된 재판으로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는 진정이 이어지고 있다. 지금껏 어디에도 호소할 길이 없고, 탄원을 해도 해결기미가 보이지 않았던 사연들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공무원에 의한 인권침해 사건은 재판에 겨우 0.0045%밖에 회부되지 않는 형편이다. 국가인권위에 접수된 진정건들은 청와대 민원실, 국민고충처리위원회 등을 거쳤지만 억울함이 풀리지 않은 사연들이 대부분이다. 접수처 한쪽에 따로 마련된 전화상담실에도 접수가 밀려든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상담자들이 전화를 받느라 여념이 없다. 전화 한통으로 진정접수가 끝나기 때문에 날이 갈수록 방문접수보다 전화접수가 늘어나고 있다. 전화접수를 받는 한 자원봉사는 “하루에 30∼40통 정도는 받는다”며 “진정접수로 이어지는 비율은 절반 정도”라고 전한다. 접수 비율이 절반에 머무르는 것은 사인(私人)간의 재산권 다툼을 진정하려는 사람들이 꽤 많은 탓이다. 국가인권위법은 ‘사인간의 재산권 다툼’을 업무 영역에 넣지 않고 있다. 게다가 진정원인이 된 사건이 1년이 지났다면 역시 기각사유에 해당한다. 다만 민·형사상 공소시효가 끝나지 않은 사건의 경우에는 위원회가 조사할 수 있다. 진정접수를 받는 한 공무원은 “충분히 구제받을 수 있는 사안인데도 1년을 넘겨 진정접수를 받지 못하는 억울한 사연들이 적지 않다”고 안타까워 한다. 벌써부터 국가인권위에 대한 불신을 나타내는 사람도 없지 않다. 자원봉사자들은 “시효 때문에 진정을 내더라도 기각될 가능성이 많다는 얘기를 하면 ‘국가인권위라고 다른 기관과 뭐가 다르냐’며 실망을 나타내는 이들도 있다”고 전한다. 인권의식이 높아진 만큼 인권침해를 당한 국가기관에 대한 불신도 깊어진 결과다. 자원봉사자들과 얘기를 나누는 사이, 문 밖의 방문접수처에서 고성이 들려왔다. “어서오세요. 접수하시려고요?” “동사무소 직원이 못되게 굴어!” “어느 동네 사시는데요?” “뭐? 뭐라고?” “어느 동네 사시냐고요.” 백발이 성성한 노인은 가는귀가 먹어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접수처 안내데스크에 앉은 직원은 목청을 높이느라 애쓰고 있었다. 종로구에서 혼자 산다는 김 노인은 “생활보호 대상자인데 급여를 지급하는 동사무소 직원이 너무 불친절하다”며 울분을 터뜨렸다. 접수처 직원이 20분 넘게 진땀을 빼고서야 진정서 작성은 끝났다.
무기력한 약자에게 희망을 안기자
이처럼 국가인권위는 사회적 약자들이 기댈 언덕으로 떠오르고 있다. 그래서 곽노현 국가인권위원은 “국가인권위가 ‘환대의 문화’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어찌 보면 불편하고 위험해보이는 소수자들과 볼썽사납고 무기력해보이는 사회적 약자들을 극진히 대접하는 조직문화가 자리잡아야 한다는 얘기다. 곽 위원은 “그 첫 걸음은 국가인권위에 소속된 위원들과 직원들부터 인권지식을 쌓고, 인권 감수성을 높이는 일”이라고 지적한다. 어쩌면 국가인권위 접수창구는 한국사회의 톨레랑스를 시험하는 장이다. 고통의 탁류가 억울함을 풀고 해원의 바다로 나가는 길목. 그곳이 바로 국가인권위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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