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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맞춘 은폐, 올곧은 진술 국가인권위 현대사 잠행 시나리오 3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다음날 치안본부장은 “책상을 ‘탁’ 하고 치니 ‘억’ 하고 죽었다”고 발표한다. 그런데 박씨 사망 당시 검안의를 단도리하지 못한 게 실수였다. 의사는 기자들의 질문에 “수사관들이 ‘박씨가 물을 많이 먹었다’는 얘기를 했고, 바닥엔 물이 홍건했다”는 얘기를 해버린다.
뜻밖의 진술 잇따라 재수사 이끌어내
경찰 고위층은 부랴부랴 고문 가담자를 5명에서 2명으로 축소하는 짜맞추기 작업에 들어간다. 그날 밤 국과수의 정식 부검이 이뤄진다. 검찰은 16일 수사관 2명을 구속한다. 19일 “수사관 2명에 의한 물고문”으로 수사결과가 발표되고, 갑자기 김만철씨 일가가 탈북해오면서 들끓던 여론도 잦아든다. 사건 발생 넉달여가 지난 5월 중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은 “고문 가담자가 더 있으며, 당국이 사건을 축소했다”는 믿을 만한 제보를 받는다. 기초확인작업을 끝낸 사제단은 처음엔 언론에 먼저 폭로할까 고민했으나, 1년 전 설립된 국가인권위원회에 기대를 걸어보기로 한다. 공은 국가인권위로 넘어간다. 조사 착수 여부에서부터 인권위원들 사이에 첨예하게 견해가 갈린다. “수사당국에서 수사중인 사안이므로 국가인권위가 조사할 수 없다”는 주장에 “국가인권위가 조사할 사안은 고문치사가 아니라 축소은폐이므로 검찰의 수사와는 별개다”라는 주장이 맞서, 표결 끝에 조사를 결정한다. 그러나 검찰이 수사관들을 정식 기소할 때까지 조사결정을 대외비로 한다. 검찰이 국가인권위 결정사실을 알고 축소은폐를 수사하면 국가인권위는 손을 떼야 하기 때문이다. 마침내 검찰은 5월 하순께 수사관 2명만을 정식기소한다. 국가인권위는 즉시 서울구치소에 수감된 두 수사관을 찾아가 조사에 착수한다. 구속 뒤 상부의 조처에 불만을 품은 두 사람은 사제단의 진정내용과 거의 일치하는 진술을 한다. 특히 박종철씨 연행 전날 내무장관이 남영동 분실을 방문해 시국사범 검거를 독려했고, 보름 전에는 비상한 방법으로 좌경사범을 척결하라는 대통령 특별지시가 내려와 비상근무중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국가인권위는 치안본부장 등 경찰 고위층들을 조사한다. 그러나 하나같이 혐의를 부인한다. 뚜렷한 증거도 없다. 큰 기대없이 검안의와 부검의를 조사한다. 병원과 집을 떠나 종적을 감췄던 검안의는 국가인권위의 통보를 받고 찾아와 “언론에 말한 건 모두 사실이고, 현장에는 수사관 5∼6명이 있었다”는 유력한 진술을 한다. 더욱 놀라운 진술은 뜻밖에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부검의한테서 나온다. 부검의는 “치안본부장으로부터 부검소견 내용을 완화하라는 지시를 몇 차례 받았다”는 진술을 한다. 여기에 고무된 국가인권위는 검찰에 조사결과를 통보하자 예상대로 “수사가 진행중인 사안이므로 국가인권위 조사는 위법이다”라며 거세게 반발한다. 국가인권위는 조사내용을 고발하는 대신 언론에 공표한다.
아직도 풀리지 않은 사건의 의혹
여론의 추이를 살피던 군사정권은 결국 사건 재수사를 지시하고, 다음날 치안본부장 등 공모에 가담한 경찰 고위층이 대거 구속된다. 국가인권위는 가혹수사 가담자는 20년 이하 징역에 민사상 책임까지 물린다는 내용의 가혹수사금지특별법안을 만든다. 그러나 법안은 6공 정권 아래서 논란만 벌이다 문민정부 초기 금융실명제법과 함께 국회를 전격 통과한다. 실제 사실관계에 있어서는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상황이 급반전되고, 검찰이 서둘러 치안본부장 등을 구속했다. 그러나 사제단의 성명 발표 전에도 검찰은 경찰의 축소은폐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의혹을 샀다.
안영춘 기자 jo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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